王得命
생몰년도 미상
명나라의 인물.
1388년에 고려 조정으로부터 명나라에서 지시가 내려왔는데, 고려에 요구한 말들이 쓸모없는 것들이라 장자온을 가둔다는 것과 고려에서는 무역을 하지 않고 군사를 정탐했기에 사신을 보내지 말라면서 철령 이북 지역은 원나라에 속한 것이라 명나라의 요동으로 귀속시킨다고 했다.
이로 인해 철령 이북 지역에 명나라에서는 요동도사가 지휘 두 명에게 군사 1천여 명을 보내 강계부로 가서 철령위를 설치하면서 철령위에는 진무 등에 관직을 두었으며, 요동에서 철령까지 70개 소에 참을 설치하고 각 참마다 백호를 두었다. 왕득명은 후군도독부의 요동백호로 사신이 돼서 고려에 철령위를 설치한 사실을 통보했으며, 이색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찾아가 귀국하면 황제에게 잘 보고해달라고 간청했지만 왕득명은 천자의 처분에 달린 것으로 자신이 독단으로 처리할 일이 아니라면서 명나라로 귀국했다.
1403년에 왕미실첩과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태종에게 동녕위의 군정에 편입되었다가 조선으로 도망간 만산군[1]들을 붙잡아 달라고 요청하면서 살아있는 자, 병든 자, 사망한 자 등 그들의 명단을 문서로 작성해달라고 했다가 태종으로부터 직접 그들을 잡으라는 답을 받았다.
[1]
고려의 동북면 지역에 살다가 호발도의 침입으로 인해 명나라 요양 지방에 끌려갔던 사람들로 이들은 동녕위의 군정에 배속되었다가
건문제,
영락제의 제위 다툼을 틈타 조선으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