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올리비에 드 모니 (Olivier de Maun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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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1320년 ~ 1404년 이후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또히늬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생튀알 | |
아버지 | 에르베 드 모니 | |
어머니 | 마리 드 게클랭 | |
형제 | 에르베, 앙리, 외스타슈, 알랭 | |
아내 | 마리 드 로예 | |
자녀 | 에르베 드 모니 | |
직위 | 생튀알 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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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 베르트랑 뒤 게클랭과 함께 잉글랜드군에 대적했다.2. 생애
1320년경 프랑스 왕국 또히늬에서 또히늬 영주인 에르베 드 모니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큰삼촌인 기욤 드 게클랭의 딸인 마리 드 게클랭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일찍부터 형제인 에르베, 앙리, 외스타슈, 알랭과 함께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부관으로서 그와 함께 잉글랜드군에 대적했다. 1356년 렌 공방전에 참여해 장 드 볼통이라는 잉글랜드군 기사를 상대로 결투를 벌여 승리했다고 전해진다. 1364년 5월 16일 코르슈렐 전투에 참여해 게클랭의 깃발을 들어올리며 병사들을 독려해 승리에 기여했으며, 1364년 7월 8일 카랑탕 요새를 공략한 뒤 그곳의 수비 대장이 되었다. 1364년 9월 29일 오레 전투에서 게클랭과 함께 잉글랜드군에 생포되었지만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났다.1366년 보병대 1,200명을 이끌고 게클랭을 따라 카스티야 내전에 개입해 마글론과 비르비에스카 공방전을 이끌었으며, 나헤라 전투에 참여해 두각을 드러냈지만 게클랭이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패배하고 생포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1369년 게클랭과 함께 카스티야로 돌아와서 톨레도 공방전을 이끌었고, 몬티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페드로를 무너뜨리고 엔리케 2세가 카스티야 국왕이 되는데 기여했다. 엔리케 2세는 그의 공적을 기려 연간 4,000 파운드의 수입을 챙길 수 있는 아그레다 영지를 수여했지만, 그는 이 영지를 카스티야 왕이 포로로 잡았던 몇몇 저명한 영주와 교환했다. 이들이 지불한 몸값은 그를 부유하게 만들었고, 그 덕분에 피카르디의 손꼽히는 부유한 귀족 가문인 로예의 영주 마티외 2세의 외동딸이자 상속녀인 마리 드 로예와 결혼할 수 있게 해줬다.
이후 프랑스로 귀환한 그는 게클랭의 노르망디, 리무쟁, 푸아투 원정에 동행했으며, 1370년 생세베르 공방전과 생장당젤리 공방전에 참여해 두 곳을 함락는 데 기여했다. 1380년 샤토뇌프 드 랑동 공방전에 참여했고, 그곳에서 게클랭의 임종을 지켜봤다. 이후 생드니에서 열린 게클랭의 장례식에 참여했다. 1380년 4월 2일 샤를 5세의 법령에 따라 왕의 시종이자 수비대 50명을 거느린 돌의 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404년 브르타뉴 공작 장 5세가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에게 경의를 표하는 행사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그의 유언에 따라 생튀알 예배당에 안장되었다는 사실은 전해진다. 그의 영지는 외아들인 에르베 드 모니가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