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46년과 1947년에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친일 지주가 불러들인 서북청년회, 광복청년단에 의해 발생한 테러 사건.민주한국독립당[1] 소속 권태석이 1947년 9월 버치 중위에게 이 사건을 해결해 달라는 건의서를 올렸으며 이후 버치 중위의 문서를 정리했던 박태균 역사학자가 경향신문과 책[2]에 소개하면서 알려진 사건이다.
이 사건은 해방 이후 청산[3] 지역의 친일 지주와 계몽 지식인들, 농민과의 갈등으로 분노한 친일 지주가 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3차에 걸친 테러를 자행한 사건이다.
2. 배경
일제강점기에 청산 지방은 사회적 지휘가 높고 경제적 기반을 갖춘 다수의 반일 애국지사들이 은거하고 생활하던 장소였기 때문에 해방 이후 지역의 청년들과 농민들은 친일 지주들을 압박하기 시작했고 편파적인 지주-소작 관계를 청산하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 지주들이 불편함을 느끼던 중 이승만이 대한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고 친일파를 용허한다 선언하자 친일 지주는 독립촉성국민회 청산 지부를 조직했지만 지방 인사 및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친일 지주는 청산 지역을 장악하기 위해서 서북청년단과 광복청년단을 불러들여 테러를 자행하고자 했다.3. 전개
1946년 9월 2일 1차 사건9월 2일 오후 5시경 테러단 약 40명이 트럭으로 청산에 들어왔는데 일부는 경찰 지서에 있었고 일부는 초등학교로, 일부는 교평리로 가서 테러를 감행했다. 초등학교로 간 테러단들은 송득현 교장을 체포하여 구타하여 중상을 입혔고 교평리에서 테러대와 동민들의 충돌 중 2명이 죽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송교장 타살 소식을 들은 동민들은 학교로 가서 송교장을 구호했으며 테러단이 지서로 모이는 것을 보고 다수 동민들이 테러단을 따라 지서로 향했다. 경찰서에서도 갈등이 지속되었고 분노한 일부 동민들이 서(署)에 들어가려고 했다. 이에 경찰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총을 발사했고 동민 중 한명이 좌흉부에 부상을 당하고 지서장의 이번 사건은 외부 테러단의 폭행이 원인이었다고 말하면서 동민들을 안정시키면서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청산지역의 테러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1년 후 더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1947년 9월 2일 2차 사건
9월 2일 오후 9시에 기동부대가 청산에 도착하여 농민들에게 평상시 상태로 있으라고 선포한 후 총검거를 개시했다. 남자는 발견되는 대로 옥천경찰서로 압송하기 시작했고 이에 농민들은 각지로 피신했으며 하서리에서는 14세 정도의 목동이 공포를 느껴 도망가던 중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로부터 4일 뒤인 9월 6일 오후 5시 청년단은 다시 청산에 들어왔으며 오후 8시까지 구민회 완장이 없는 사람을 폭행하거나 집을 보이는 대로 침입해 테러를 가했고 8시 이후에는 가옥의 가구를 파괴하고 구타를 가했다. 그러나 4일 뒤 또 사건이 발생했다.
1947년 9월 11일 3차 사건
9월 11일 테러단이 청산에 들어와 20일까지 마을의 가옥을 침입해 가구를 파괴하고 구금을 감행했으며 30일에는 유지(有志)와 몇몇의 사람들을 옥청서로 압송했다.
4. 결과
권태석은 이 사건을 우익의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일방적인 폭행이라고 결론을 내렸다.이 사건은 테러단에 대한 경찰의 묵인과 지원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농민들은 우익이 아닌 좌익을 옹호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해방 이후 친일파와 농민, 계몽지식인들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며 다른 지역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유사하게 발생했을 것이다. 이러한 물리적인 억압은 6.25 전쟁이후 반공주의라는 사상 아래에 부역자 청산이라는 목적으로 더욱 강화되었으며 이승만 정부가 힘을 기르고 유지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