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23 19:03:54

오쿠보 요시토

일본의 前 축구선수
파일:大久保 嘉人.jpg
<colbgcolor=#eeeeee> 이름 오쿠보 요시토
大久保 嘉人 | Yoshito Ōkubo
출생 1982년 6월 9일 ([age(1982-06-09)]세)
일본 후쿠오카현 칸다정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신체 170cm
직업 축구선수 ( 공격수 / 은퇴)
소속 선수 세레소 오사카 (2001~2006)
RCD 마요르카 (2005~2006 / 임대)
비셀 고베 (2007~2008)
VfL 볼프스부르크 (2009)
비셀 고베 (2009~2012)
가와사키 프론탈레 (2013~2016)
FC 도쿄 (2017)
가와사키 프론탈레 (2018)
주빌로 이와타 (2018~2019)
도쿄 베르디 (2020)
세레소 오사카 (2021)
국가대표 60경기 6골 ( 일본 / 2003~2014)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4. 기록
4.1. 대회 기록4.2. 개인 수상4.3. 개인 기록

[clearfix]

1. 개요

일본의 前 축구선수. 포지션은 공격수였다.

2013~2015년까지 3연속 리그 득점왕을 차지, J1리그 통산 득점 1위이며 리그 역대 최고의 스트라이커 중 하나로 꼽힌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세레소 오사카

고등학교 졸업 후 2001년 J1리그 클럽인 세레소 오사카에 입단하면서 프로 경력을 시작했다. 데뷔 시즌엔 주로 공격형 미드필더로 뛰었고 신인임에도 적지 않은 기회를 부여받았다. 하지만 팀은 리그 최하위(16위)로 시즌을 마감했고 J2리그로 강등되었다.

2002 시즌에는 2부 리그에서 18골을 터뜨리며 리그 득점 2위에 올랐고, 세레소 오사카 역시 오쿠보의 활약에 힘입어 리그 2위에 올라 강등 1년 만에 J1으로 복귀했다.

2003 시즌에도 팀의 주포로 활약, J1 리그에서는 24경기 16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 공동 5위에 올랐고, 천황배 JFA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대회 득점 2위에 해당하는 4골을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다. 이러한 활약들로 시즌 종료 후 2003년 AFC 올해의 영플레이어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2004 시즌 역시 리그 22경기에 나서 15골을 넣는 리그 정상급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1.2. RCD 마요르카(임대)

2005년 1월, 세레소 오사카와 라리가 RCD 마요르카가 오쿠보의 임대 이적에 합의하면서 4번째 일본인 프리메라리거가 되었다. 임대 기간은 6개월이며 마요르카가 200만 유로(한화 약 24억원)의 이적료를 지불할시 완전 이적 우선권을 갖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2004-05 시즌 라리가 18라운드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전에 선발 출전하였으며 데뷔전부터 1골 1도움을 기록하는 좋은 활약으로 2:2 무승부를 이끌어냈다.

이후 한동안은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라리가의 빠른 템포와 지능적인 수비에 고전하며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고 팀 동료 후안 아랑고와 주먹다짐까지 벌이는 등 험난한 적응기를 보내며 팀내 입지는 점점 줄어갔다. 그러던 중 시즌 막바지인 라리가 36라운드 아틀레틱 클루브전과 37라운드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전에서 2경기 연속 득점을 기록하며 강등권에서 허덕이던 팀을 극적으로 잔류시키는 데 일조하는 활약을 펼쳤다. 이에 마요르카는 세레소 오사카에 임대 연장을 요청했고 양 구단이 합의하여 1년 재임대가 결정되었다.

2005-06 시즌을 앞두고 포지션 경쟁자인 아르헨티나 대표팀 출신 베르나르도 로메오가 팀을 떠나면서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으나 장기간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고 시즌 후반기인 20라운드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전에서야 첫 득점을 기록했다. 2006년 2월 성적 부진으로 엑토르 쿠페르 감독이 자진 사임하면서 그레고리오 만사노 감독이 부임했고 만사노 체제에서는 출전 시간이 현저히 줄었다. 결국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마요르카에서의 최종 기록은 39경기 출전 5골 5도움.

2.1.3. 세레소 오사카 2기

2006년 6월 친정팀인 세레소 오사카로 복귀하여 잔여 시즌 동안 21경기에 나서 6골을 넣었지만 팀은 18개 팀 중 17위를 기록하며 강등되었고 시즌 종료 후 오쿠보는 J1리그 클럽인 비셀 고베로 이적했다.

2.1.4. 비셀 고베

오쿠보는 마츠다 히로시 감독의 지휘 아래에서 주로 좌측면 미드필더로 뛰었으며 2시즌 연속 리그 두 자릿수 득점(14골, 11골)을 기록했다.

2.1.5. VfL 볼프스부르크

2009년 1월, 대표팀 동료인 하세베 마코토가 뛰고있는 분데스리가 VfL 볼프스부르크로 이적했다. 등번호는 8번. 마지막 유럽 빅리그 도전이 될 것이라는 비장한 각오를 남기고 독일로 향했지만 당시 볼프스에는 하필이면 에딘 제코 그라피테라는 유럽 최고 수준의 듀오가 버티고 있어 좀처럼 출전 기회를 잡지 못했고 5개월간 제코와 그라피테의 체력 안배용 배터리 겸 벤치워머 역할만 수행했다. 결국 제코와 그라피테 투톱을 앞세운 볼프스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오쿠보는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획득한 최초의 일본인 공격수가 되었다. 하지만 시즌 종료 후 오쿠보는 2010 남아공 월드컵에 참가하기 위해 주전으로 뛸 수 있는 친정팀 비셀 고베로 리턴하게 된다. 볼프스부르크에서의 최종 기록은 리그 9경기, UEFA컵 2경기, DFB-포칼 2경기 출전 0골 0도움.

2.1.6. 비셀 고베 2기

비셀 고베로 복귀한 오쿠보는 잔여 시즌 동안 19경기 8골을 기록하는 준수한 활약을 선보였으나 2010시즌에는 장기 부상을 당했고 이후엔 부상의 여파 때문인지 폼이 떨어져 예전과 같은 파괴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2012시즌에는 리그 26경기 4골로 부진했고 비셀 고베도 리그 16위에 그쳐 J2리그로 강등되었다.

2.1.7. 가와사키 프론탈레

비셀 고베가 강등된 후, 2013시즌 오쿠보는 J1리그의 가와사키 프론탈레로 이적했다.
그곳에서 오쿠보는 J리그 역사상 최초로 2013시즌(26골), 2014시즌(18골), 2015시즌(23골) 3년 연속으로 리그 득점왕에 등극함과 동시에 J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며 서른이 넘은 나이에 커리어 하이를 경신하고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2016시즌에도 리그에서 15골을 넣으며 리그 득점 4위에 이름을 올렸고 천황배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서도 5골을 넣어 팀의 준우승을 견인하는 등 녹슬지 않은 기량을 선보였다. 또한 이 시즌에 나카야마 마사시의 J1리그 통산 최다 득점 기록을 경신하고 J1리그 통산 최다 득점자에 등극하기도 했다.

2.1.8. 말년

그러나 시즌 종료 후 카자마 야히로 감독이 사임함에 따라 오쿠보는 재개약을 거절했고 전성기를 누린 가와사키를 떠나 FC 도쿄로 이적했다.

2017 시즌 중반까지는 그럭저럭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나 정강이 부상 이후로 폼이 하락했고 리그 28경기 8골로 시즌을 마감했다.

이후 한 시즌 만에 다시 가와사키 프론탈레로 복귀했지만 교체 자원으로 전락해버렸고 결국 반시즌 만에 다시 주빌로 이와타로 이적했다.

이와타에서는 더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지만 폼을 되찾지 못하면서 1시즌 반동안 41경기 4골에 그쳤다.

2020 시즌 J2리그의 도쿄 베르디로 이적하면서 신인 시절 이후 약 17년 만에 2부 리그에서 뛰게 되었다. 도쿄 베르디는 오쿠보가 1부 승격을 견인해줄 거란 기대감으로 영입했지만 오쿠보는 부상과 노쇠화로 폼이 떨어질대로 떨어져 무려 19경기 연속 무득점이라는 최악의 기록만을 남겼고 도쿄 베르디 역시 승격에 실패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오쿠보는 은퇴를 심각하게 고려했지만 고심 끝에 은퇴는 자신의 첫 친정팀인 세레소 오사카에서 하고 싶다고 밝혔고 2021 시즌을 앞두고 15년 만에 세레소 오사카로 복귀했다.

시즌 초반 전성기 시절을 연상케 하는 퍼포먼스로 4경기에서 5골 1도움을 몰아치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고 그뒤로는 다시 원상복귀하여 부진의 늪에 빠졌다. 시즌 종료 후 오쿠보는 은퇴를 발표했고 39세에 20년간의 프로 경력에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2.2. 국가대표 경력

각급 연령별 대표팀을 거치면서 2000년 AFC U-19 챔피언십 준우승과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은메달을 차지했다.

2003년 5월 지쿠 감독에 의해 일본 성인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으며 당월 31일에 치러진 대한민국과의 친선전에서 후반 교체 출전하면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이후 지쿠 감독의 총애를 받으며 주전 스트라이커로 중용되었으나 번번이 득점에 실패했고 2003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2003 동아시아 축구 선수권 대회 마저 무득점으로 마쳐 결국 지쿠 감독의 플랜에서 배제되어 부상자가 있는 경우에만 대표팀에 차출되는 보결 자원 신세로 전락했다.

A대표팀에는 좀처럼 부름받지 못했지만 워낙 리그에서의 폼은 좋다보니 일본 U-23 축구 국가대표팀에는 곧잘 차출되었고 2004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하여 조별리그에서 파라과이와 가나를 상대로 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2005년 10월부터 2007년 7월까지 2년 가까이 대표팀에 차출되지 못해 2006 독일 월드컵 2007 AFC 아시안컵 같은 굵직한 메이저 대회에도 참가하지 못했다.

2007년 10월 17일에 치러진 이집트와의 친선전에서 왼발과 헤더로 멀티골을 터뜨리며 무려 A매치 데뷔 후 4년 5개월(21경기) 만에 데뷔골을 기록했다. 혈이 뚫렸는지 이후엔 공격포인트를 쏠쏠하게 올렸고 한동안 일본 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다.

2010 남아공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면서 커리어 첫 메이저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조별리그 1R 카메룬전에서 4-1-4-1의 레프트 윙으로 선발 출전하였으며 포지션은 윙어지만 사실상 혼다 케이스케와 함께 최전방 투톱 역할을 수행했다. 이 경기에서 일본이 수비적인 경기 운용을 했기 때문에 페널티 에어리어 부근에서 프리킥을 얻어낸 것 외엔 위협적인 장면은 만들어내지 못했다.

조별리그 2R 네덜란드전에서는 0:1로 끌려가던 후반에 3차례 중거리 슈팅을 때렸지만 전부 골키퍼에게 막히고 골문을 벗어났다.

조별리그 3R 덴마크전에서는 전반 12분 날카로운 키패스로 결정적인 득점 찬스를 만들어냈지만 마츠이 다이스케가 날려버리면서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했다. 이어서 전반 30분경 아크 정면에서 파울을 당해 프리킥을 얻어냈고 키커로 나선 엔도 야스히토가 골을 성공시키면서 결승골에 기여하게 되었다. 후반 42분에는 혼다에게 키패스를 연결했고 혼다가 오카자키 신지의 쐐기골을 어시스트하면서 쐐기골의 기점이 되었다. 결국 3:1로 승리한 일본이 최종적으로 2승 1패를 기록하며 조 2위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 파라과이전에서는 연장까지 106분을 소화했으나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고 일본이 승부차기 끝에 패하면서 원정 대회 첫 16강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남아공 월드컵 이후 부상과 부진으로 인해 4년 가까운 시간동안 대표팀에 단 1회밖에 차출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2013시즌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데 이어 2014시즌에도 리그 득점 선두를 달리고 있는 활약을 인정받아 2014 브라질 월드컵을 1개월여 앞둔 2014년 5월 처음으로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의 부름을 받아 오랜만에 대표팀에 승선했고 브라질 월드컵 최종 엔트리 23인에도 포함되어 생애 두 번째 월드컵에 참가하게 되었다.

조별리그 1R 코트디부아르전에서는 벤치에서 시작했고 67분 오사코 유야와 교체되어 출전했지만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조별리그 2R 그리스전에서는 레프트 윙어로 선발 출전했다. 경기 초반부터 드리블 돌파로 그리스 수비 둘을 뚫은 뒤 컷백까지 연결하며 일본의 첫 찬스를 만들어냈고, 아크 정면 좋은 위치에서 프리킥을 얻어내기도 하는 등 전반전에는 준수한 활약을 선보였으나...
파일:후지산대폭발슛.gif
후반 22분, 그리스의 골문을 향해 쇄도해 들어가면서 우치다 아쓰토의 땅볼 크로스를 받아 빈골문 앞에서 슈팅을 시도했지만 오쿠보의 발을 떠난 공은 골문이 아닌 하늘로 치솟아 올랐고 이는 오쿠보 커리어 사상 최악의 장면으로 남았다. 이후 실수를 만회하고자 위협적인 중거리 슈팅도 시도했지만 골키퍼의 선방에 막혀 득점에 실패했고 결국 일본은 숫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와 아쉬운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조별리그 3R 콜롬비아전에서는 최전방 원톱으로 선발 출전하여 풀타임을 소화했지만 후반 20분경 빅찬스 미스 1회만을 기록했다. 일본은 콜롬비아에게 1:4 대패를 당했고 1무 2패 조 최하위로 조별리그 탈락했다.

32세의 오쿠보는 브라질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3. 플레이 스타일

키는 작아도 스트라이커로서 갖춰야 할 장점을 다 가지고 있다. 상당히 좋은 선수다.
최용수
170cm의 단신이지만 단단한 체구에 균형 감각과 힘도 좋아 자신보다 월등히 큰 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도 좀처럼 밀리지 않으며 순간 스피드도 빠르고 빼어난 위치선정, 라인 브레이킹 능력과 준수한 드리블 능력도 갖췄다. 또한 J리그 역대 최다 득점자이자 3연속 득점왕 출신답게 골 결정력과 슈팅 능력 역시 뛰어나다. 하지만 골 결정력 같은 경우에는 이상하게도 J리그만 벗어나면 대폭 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줬다.[1]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4.3. 개인 기록



[1] FIFA 월드컵과 프리메라리가처럼 수준 높은 무대는 물론이고 J리그와 비슷한 수준인 AFC 챔피언스 리그나 약팀을 상대로 치르는 A매치에서 조차도 많은 득점을 기록하지 못했다. [2] 일본인 선수 중 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