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 킨드발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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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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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68 · 1968-69 · 1970-71 |
스웨덴의 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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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
오베 킨드발 Ove Kindv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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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벵트 오베 킨드발 Bengt Ove Kindval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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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3년
5월 16일 ([age(1943-05-16)]세) 스웨덴 노르셰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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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스웨덴|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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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76cm | 체중 69kg | |
직업 | 축구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 |
소속 |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
IFK 노르셰핑 (1962~1966)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66~1971) IFK 노르셰핑 (1971~1975) IFK 예테보리 (1975~1977) |
경영인 | IFK 예테보리 (1979~1980 / 회장) | |
국가대표 | 43경기 16골 ( 스웨덴 / 1965~197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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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축구인이다.에레디비시 최초의 외인 득점왕으로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서 뛰는 5시즌 동안 3회의 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리그 우승 2회, 유러피언컵 우승, KNVB 베이커 우승 등을 일궈내며 팀의 전성기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으로 맹활약했다. 특히 팀이 더블을 달성한 1969년에는 발롱도르 4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고향인 노르셰핑을 연고로 하는 IFK 노르셰핑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며, 그곳에서 팀의 간판 공격수인 해리 빌트(Harry Bild)와 투톱 듀오를 이뤄 4시즌 동안 리그 84경기에 나서 70골을 기록하며 팀의 알스벤스칸 우승 2회를 이끌었다. 1966년에는 리그 득점왕(20골)과 UEFA 인터토토컵 득점왕(8골)을 차지하는 활약으로 스웨덴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이러한 활약들로 빅리그인 라리가와 세리에 A의 클럽들에게도 관심을 받았으나 가족이 스페인과 이탈리아보다 네덜란드의 문화와 생활방식에 적응하기 수월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에레디비시 진출로 가닥을 잡았고 마침 노르셰핑 시절 함께 호흡을 맞췄던 스웨덴 대표팀 선배 해리 빌트가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서 뛰고 있었기 때문에 1966년 페예노르트로 이적했다.
페예노르트에서의 첫 시즌인 1966-67시즌 리그 23경기에 나서 22골을 넣으며 리그 득점 순위 5위에 이름을 올렸고, 25골을 넣어 득점 순위 2위에 오른 해리 빌트와 함께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AFC 아약스에 맞서 리그 우승 경쟁을 펼쳤으나 아쉽게도 리그 2위에 만족해야 했다.
1967-68시즌 리그 32경기에서 28골을 터뜨리며 크루이프를 2골 차이로 제치고 외인 용병 최초로 에레디비시 득점왕에 올랐다.[1]
1968-69시즌 리그 33경기에 나서 30골을 기록하며 2시즌 연속 리그 득점왕에 등극함과 동시에 팀을 리그와 KNVB 베이커 정상에 올려놓았다.
1969-70시즌 새로 부임한 에른스트 하펠 감독 지휘 아래에서 리그 28경기에 출전하여 25골을 넣어 26골을 넣은 빌리 판데르카윌런에 이어 리그 득점 순위 2위에 이름을 올렸고, 유러피언컵에서도 9경기에 출전하여 7골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치며[2] 페예노르트에게 구단 역사상 첫 빅이어을 안겼다.[3]
1970-71시즌 리그 28경기에 나서 24골을 기록하는 맹활약으로 팀을 다시 한 번 리그 정상으로 이끌었고, 3번째 에레디비시 득점왕 타이틀을 차지하는 기쁨도 누렸다.
하지만 가족들이 향수병으로 고생하자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친정팀인 노르셰핑으로 리턴했다. 그곳에서 4시즌을 보낸 뒤 IFK 예테보리로 이적하였고 그곳에서 34세의 나이에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노르셰핑에서 스웨덴 리그 최고 수준의 활약을 선보이자 1965년 8월 성인 대표팀에 발탁되었고, 1965년 8월 22일 핀란드와의 친선전에서 선발 출전하면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1965년 11월 7일에 펼쳐진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유럽 지역예선 키프로스전에서 A매치 출전 3경기 만에 데뷔골을 기록했다.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에 참가하여 조별리그 3경기 전부 주전으로 뛰었지만 무득점으로 마쳤고, 팀도 1승 1무 1패의 성적으로 조별리그 탈락했다.
1974 FIFA 월드컵 서독에도 참가하였고 지난 대회처럼 닥주전은 아닌 준주전으로 뛰었지만 우루과이전에서 2도움을 올리며 팀의 3:0 완승과 8강 진출에 이바지했다.
1974년 10월 30일에 펼쳐진 UEFA 유로 1976 예선 북아일랜드전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3. 기록
3.1. 대회 기록
- 페예노르트 로테르담(1966~1971)
- 인터컨티넨탈컵: 1970
- 유러피언컵: 1969-70
- UEFA 인터토토컵: 1967, 1968
- 에레디비시: 1968-69, 1970-71
- KNVB 베이커: 1968-69
3.2. 개인 수상
- UEFA 인터토토컵 득점왕: 1965-66
- 스웨덴 올해의 축구 선수: 1966
- 알스벤스칸 득점왕: 1966
- 에레디비시 득점왕: 1967-68, 1968-69, 1970-71
- 발롱도르 4위: 1969, 14위: 1970, 16위: 1968, 27위: 1967
- 스벤스카 다그블라데트 금메달: 1969
[1]
이후에도 좀처럼 외인 득점왕이 나오지 않았는데, 1988-89시즌
호마리우가 득점왕에 오르기 전까지 20년 넘는 세월 동안 오베 킨드발이 유일무이한 외인 득점왕이었다.
[2]
유러피언컵 득점왕 믹 존스에 이은 득점 2위를 차지했다.
[3]
특히
셀틱 FC와의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토미 게멜에게 선제 실점을 허용하며 0:1로 끌려가다가 리누스 이스라엘의 동점골로 연장까지 가는 접전이 펼쳐졌고 연장 접전 끝에 킨드발이 승부를 끝내는 결승골을 터뜨리며 팀에게 극적인 역전승과 첫 우승을 안긴 것은 현재까지도 올드 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명승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