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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3223d> 이름 |
예스페르 그룅키에르 Jesper Grønkjæ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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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77년 8월 12일 ([age(1977-08-12)]세) | |
[[그린란드| ]][[틀:국기| ]][[틀:국기| ]] 누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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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덴마크| ]][[틀:국기| ]][[틀:국기| ]]( [[틀:국기| ]][[틀:국기| ]][[그린란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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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87cm | 체중 81kg | |
직업 | 축구선수 ( 미드필더[1] / 은퇴) | |
소속 | 선수 |
올보르 BK (1995~1998) AFC 아약스 (1998~2000) 첼시 FC (2000~2004) 버밍엄 시티 FC (2004~2005)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05) VfB 슈투트가르트 (2005~2006) FC 코펜하겐 (2006~2011) |
국가대표 | 80경기 5골 ( 덴마크 / 1999~20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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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마크의 자치령인 그린란드 출신 前 축구선수[2]. 현역 시절 미드필더로 활약했으며, 국내 팬들에게는 2002-03 시즌 프리미어 리그 리버풀과의 최종전에서 맹활약으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진출을 이끌며 현재의 첼시를 있게 해준 일등공신으로 알려져있다.2. 클럽 경력
2.1. 경력 초기
그린란드의 수도인 누크에서 태어난 크룅키에르는 로컬팀 티스테드 FC에서 축구 경력을 시작했다. 경력 초기에는 달리기에 소질을 보이며 축구 선수가 아닌 단거리 육상선수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의 탁월한 축구 재능은 육상선수가 되기에는 아까웠고 1995년 당시 덴마크 수페르리가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올보르 BK에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클럽에서 100경기 이상을 소화했고, 1995-96 시즌에는 UEFA 챔피언스 리그 무대를 경험하기도 했다. 또한 올보르에서 뛰어난 퍼포먼스로 많은 탑 클럽들의 러브콜을 받게 된다.2.2. AFC 아약스
1997년 10월, 그는 350만 유로에 아약스와 사전계약을 채결했고, 이듬해 7월에 정식으로 팀에 합류하며 에레디비시에 입성하게 된다. 당시 클럽의 감독은 자국의 레전드이자 훗날 자국 대표팀을 오랜기간 이끌게 될 모르텐 올센이었는데, 그에게 두터운 신임을 보여주며 적극적으로 주전으로 기용한다. 그리고 그룅키에르는 이에 보답하듯 데뷔 시즌부터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고, KNVB 컵 우승을 견인했으며, 다음 시즌에도 그는 훌륭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팬들이 뽑은 아약스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 덕에 다시 한번 유럽 빅클럽들의 제안을 받기 시작했다.2.3. 첼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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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음 행선지는 첼시였다. 당시 첼시는 지금과는 위상이 달랐지만, 그래도 중상위권에 위치한 저력있는 팀이었다. 2000년 10월, 750만 유로의 이적료에 입단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가장 비싼 이적료에 이적한 덴마크 선수로 기록됐다. 많은 기대를 안고 합류했지만, 합류 초기부터 부상에 시달리며 2001년 1월까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복귀 후 1월 28일 FA컵 4라운드 질링엄전에서 그룅키에르는 멀티골을 넣고 4:2 승리를 이끌며 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에도 잦은 부상으로 많은 경기를 나서지 못했지만, 나올 때마다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를 보여주며 로테이션 멤버로 활약했다. 여기까지 봤을 때는 그냥 평범한 스쿼드 플레이어가 아니었나 싶겠지만, 그룅키에르는 단 한경기의 대활약으로 팀을 구해내는, 아니 더 나아가서 구단의 미래를 바꾸는 대형사고를 치게 된다.
2003년 5월 11일, 첼시는 홈구장인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프리미어리그 2002-03 시즌 최종라운드 리버풀전을 치르게 된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자면, 두 팀 모두 승점 64점에 첼시가 4위, 리버풀이 5위에 랭크되어 있었고, 둘 중 이기는 팀은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첼시는 극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며 다음 시즌 주력 선수들을 처분해야하는 위기에 봉착되어 있었다. 어느정도였다면 첼시는 2,300만 파운드 가량의 부채를 6주안에 갚아야 했고, 이미 다음 시즌 TV중계권료 수입을 담보로 잡은 상태였으며, 당시 첼시 구단 CEO였던 트레버 버치는 경기 전 선수들에게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패하면 너희들은 물론 구단에도 엄청난 경제적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직접 당부했을 정도였다. 따라서 구단의 미래를 위해서 사활을 걸어야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리버풀 또한 양보를 할 수 없었고, 비겨도 본선 진출이 가능했던 첼시와 달리 무조건 승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경기 전부터 치열한 단두대 매치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됐고, 첼시는 이 경기에서 패하면 챔스 진출이 물거품이 되기 때문에 초반부터 의욕적으로 나섰지만, 되려 전반 11분만에 사미 히피아에게 선제골을 허용하며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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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중한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는 그룅키에르 |
그러나 실점한지 2분만에 그룅키에르가 박스 안에 들어와있는 드사이를 향해 크로스를 올렸고, 이를 장거리 헤딩으로 연결하며 동점골을 만들었다.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한 선수들은 약 4만명 홈팬들의 응원을 받아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반 2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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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 파운드의 골'이라고 불리는 그룅키에르의 역전골 |
우측 하프스페이스 부근에서 볼을 잡은 그룅키에르는 리세와의 몸싸움을 벌인 후 균형이 무너진 채로 슈팅을 날렸고, 슛은 날카로운 계적을 그리며 상대 골키퍼 예지 두덱이 손을 쓸 수 없이 골문 안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스코어는 2:1. 그리고 이 골은 결승골이 되면서 첼시는 4위 자리를 지키며 챔스 본선 진출을 확정 짓게 된다. 단순히 유럽 대항전 진출을 넘어서 그룅키에르의 득점은 구단에 엄청난 가치를 가져다 주었는데, 가장 먼저 중계권료를 확보함으로서 잠시 한숨을 돌릴 수 있었고, 또 하나는 2002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축구에 빠져들게 된 러시아의 부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첼시를 인수하게 끔 만들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3] 로만 인수 후 첼시는 빛을 청산함과 동시에 그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팀은 강팀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에 언론들은 그의 골을 10억 파운드의 골이라고 칭했고, 현재까지 종종 화자가 되고 있다.
여튼, 그는 리버풀전의 대활약으로 나락으로 갈뻔한 팀을 구하는데 성공했으며, 다음 시즌에는 적극적으로 중용받으며 48경기를 소화했다. 하지만 구단을 구해낸 그도 팀 개편 앞에서 예외는 없었고, 결국 2004-05 시즌을 앞두고 버밍엄 시티로 이적하게 된다. 자신의 첼시 경력 마지막 경기였던 38라운드 리즈 유나이티드와의 홈경기에서 1-0 승리를 이끄는 결승골을 넣어 최종전에서 2년 연속 결승골을 넣었다.
2.4. 버밍엄 시티 FC
2004년 7월, 그는 UEFA 유로 2004를 마친 뒤 버밍엄 시티에 입단했다. 그러나 적응에 어려움을 겪으며[4] 고단한 전반기를 보냈다. 버밍엄에서 18경기 동안 고작 1골을 득점했으며, 그것도 하위리그 팀인 링컨 시티전에서 나온 골이었다.2.5.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그 해 12월, 200만 유로의 이적료에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하면서 잉글랜드 무대를 떠나게 됐다. 스페인에 입성한 그룅키에르는 합류하자마자 주전으로 기용되며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활약을 보이며 결국 리그 마지막 4경기에는 아예 명단에서 제외되고 말았다.2.6. VfB 슈투트가르트
버밍엄과 AT에서 실패를 맛 본 그는 반등를 노리기 위해 새 팀을 모색했고, 2005년 여름 대표팀 동료인 욘 달 토마손과 함께 독일 분데스리가의 슈투트가르트에 입단하게 된다.확실하게 전력보강에 성공한 팀은 시즌 초부터 많은 기대를 모았지만, 시즌 내내 팀은 어려움을 겪으며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거두었다. 2006년 2월, 그는 토마손과 함께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을 향해 공격적으로 나서기를 겁낸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에 트라파토니는 20라운드 베르더 브레멘전에서 두 선수 모두 벤치로 내리는 강단을 내렸고, 이로 인해 팀 내 분위기는 엉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다음 날 트라파토니는 감독이 된지 7개월 만에 경질되었다. 이후 아르민 페가 새롭게 부임했으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부진한 경기력을 보인 그룅키에르는 책임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결국 팀은 리그 9위로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으로 마쳤고, 그는 1시즌만에 팀을 떠나게 된다.
2.7. FC 코펜하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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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23일, 덴마크 리그 챔피언인 코펜하겐으로 이적하면서 8년만에 고국으로 복귀했다. 초반에는 챔피언스리그 조별라운드 1차전 SL 벤피카와의 경기에서 무릎 부상으로 2달간 결장하며 시작이 좋지 않았지만, 부상 복귀 후에는 절륜한 기량으로 팀의 리그 우승을 견인했고, 본인은 수페르리가 올해의 선수에 선정되는 영예를 누렸다.
2008년 5월에는 2007-08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입은 뒤 해당 부위에 포도상구균이 감염되면서 세 차례 수술을 받아야했고, 다음 시즌 중반까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해 1월 말뫼 FF와의 친선경기를 통해 8개월만에 팀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은 시즌 동안 리그와 리그 컵 우승을 거머쥐며 더블 달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다음 시즌에는 큰 부상없이 팀에 합류한 이래 가장 많은 경기를 소화하며 2연속 리그 타이틀을 따내는데 공헌했다. 2010-11 시즌에는 챔피언스 리그 16강전에서 친정팀 첼시와 재회하기도 했다. 결과는 최종스코어 0:2로 패하며 8강 진출에 실패.
2011년 5월, 그는 2010-11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이번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겠다고 밝혔고, 자신의 친정팀인 올보르를 상대로 고별전을 치른 뒤 34살의 나이에 은퇴했다.
3.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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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3월 27일, 이탈리아와의 유로 예선전을 통해 정식으로 성인 대표팀에 데뷔했다. 그러나 경기 초반 필리포 인자기에게 백패스를 잘못 넘겨 실점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결국 팀은 1:2로 패하면서 실망스러운 데뷔전이 되었으나, 감독은 변함없는 신뢰를 보이며 이후에도 그를 대표팀에 소집시켰고, UEFA 유로 2000 본선 엔트리에도 포함시켰다. 그리고 조별라운드 3경기 모두 선발로 풀타임 출전했다. 비록 팀은 3전 전패로 최하위를 기록했지만.
이후 아약스 시절 인연이 있었던 모르텐 올센 감독이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주축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2002 FIFA 월드컵에서는 팀의 4경기를 모두 뛰었으며, 2년 뒤 UEFA 유로 2004 지역예선에서는 가까운 라이벌인 노르웨이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으며 1:0으로 꺾고 포르투갈에서 열리는 본선 대회에 참가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어머니의 부고로 개막전에는 불참했지만, 2차전 불가리아전부터 합류하여 2번째 골을 득점하면서 2:0 승리를 이끌었다.
2010년 6월, 남아공에서 열린 FIFA 월드컵에 참가했으나,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진출할 수 있었던 상대인 일본에게 1-3으로 져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그리고 대회 종료 후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4. 은퇴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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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생활을 마친 뒤에는 축구 전문가로 활약하고 있다.
[1]
주로
윙어로 배치되었으나, 때에 따라서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도 소화했다.
[2]
같은 덴마크령인
페로 제도 축구 국가대표팀이
FIFA에 가맹하여 독자적으로 대표팀을 이끄는 것과 달리
그린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은 FIFA 미가맹국이다. 따라서 그룅키에르는 덴마크 프로축구팀에서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국가대표도 덴마크 선수로 활약했다.
[3]
당시 로만은 축구 구단을 인수할 생각을 하고 있었고, 조건은 챔스에 진출할 수 있는 팀이었다. 그리고 그룅키에르의 득점으로 팀이 챔스에 진출하게 되자 인수를 단행하게 된다.
[4]
당시
스티브 브루스 감독은 그룅키에르에 대해 경기를 지배하는 강팀에서는 영향력을 발휘하는 선수지만, 그와 반대인 팀에서는 그렇지 못하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