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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7:45:00

여로보암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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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여로보암2세.jpg
이름 여로보암 2세 Jeroboam II
출생 미상
미상
사망 기원전 742년경
사마리아
소속 미상
재위년도 기원전 794년~기원전 753년
약 41년
국적 북이스라엘 왕국
아버지 여호아스
자녀 즈가리야
이전 국왕 여호아스
다음 국왕 즈가리야


1. 개요2. 생애3. 여로보암 2세 시대가 북이스라엘 전성기였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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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호아스(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은 유다 왕 요아스의 아들 아마지야 제 15년의 일이었다.
그는 사마리아에서 41년 간 다스렸다.
열왕기하 14:23 ( 공동번역성서)

여로보암 2세에 대한 연구 기사 자료

북이스라엘 왕국의 제13대 왕. 아버지는 여호아스, 할아버지는 여호아하즈이다. 그 이름답게 북이스라엘 왕국을 죄악으로 이끈 제 2의 여로보암 1세답다고 할 수 있었다.

2. 생애

그의 재위기에는 하술하겠지만 전성기에 필적하는 영역을 확보한데다 아람과의 전쟁도 이겨 다마스쿠스까지 점령했으며 북이스라엘이 가장 번영했던 시대다. 그러나 동시에 이방신이 들어오고 활동한 예언자들의 얘기에서 물질주의 비판이 나오는걸 보면 번영에 따라 타민족들의 신이 들어오며 늘어난 부에 따른 사치 같은 문제들이 터져나온 모양.

어쩌면 여로보암 2세가 죽자마자 예후 왕가가 무너진 것 또한 이런 문제점과 관련되어 있을 수 있다. 솔로몬 역시도 40년간 통치했는데 그의 재위 후반부에는 여러 문제점이 터져나왔고 결국 그가 죽자마자 이스라엘 왕국은 남북으로 갈라진다. 여로보암 2세 역시도 마찬가지로 재위중에 여러 문제점들이 생기긴 했으나 그래도 본인은 북이스라엘의 강역을 크게 넓힌지라 개인의 카리스마로 문제점들이 터져나오는 것을 억누를 수 있었으나 그가 죽고 그의 후계자에게 그만한 자질이 없어 순식간에 망했다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솔로몬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 역시도 재위 1년도 안 가서 나라가 반쪽나는걸 보게 되며 르호보암의 자질에 대해선 별 말이 없고 즈가리야도 별 얘기가 없는걸 보면 둘 다 능력이 아버지만도 못한 사람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성경에서의 서술에 의하면 르호보암 때 나라가 갈라진건 솔로몬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지만 그래도 다윗을 생각해서 솔로몬 생전에는 나라를 반쪽으로 내지 않은 것이며 즈가리야 또한 어차피 예후 사후 4대까지만 이어진다고 했기에 본인 자식이 왕이 될 수는 없었다.

여로보암 2세 사후 북이스라엘은 점점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다. 여로보암 2세 사후 아들인 즈가리야가 왕이 되지만 여섯 달 만에 살룸에게 살해당해 찬탈당하고 그 살룸은 다시 한달만에 므나헴에게 살해당해 찬탈당한다. 므나헴도 10년만에 사망 그 아들인 브가히야는 2년만에 찬탈당해 사망 베가도 8년만에 찬탈당해 사망 그리고 호세아는 마지막 왕이다. 이런 북이스라엘 초기에 버금가는 혼란 속에서 국력이 갈려나가는건 당연지사.

3. 여로보암 2세 시대가 북이스라엘 전성기였던 이유?

여로보암 2세 통치 당시 북이스라엘은 최고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성경에 의하면 그는 북이스라엘 초기 전성기 때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고구려 광개토대왕 시대 이후 400여 년 후 고구려의 땅을 거의 다 회복한 발해 시대 전성기에 비할 수 있다.[1] 또 이 시대 즈음부터 선지자 요나가 활약하기 시작한다.

역사학,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주요 무역로가 지나가는 레반트 지방 진출 야욕을 버리지 못하던 아시리아가 북이스라엘의 숙적인 아람 왕국에 큰 타격을 주고 북이스라엘로 다시금 손을 뻗치려는 순간 아시리아에 왕위 다툼이 벌어지며 아시리아의 힘도 약화된 국제적 힘의 공백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북이스라엘이 무역로 지배권을 차지해 세력을 떨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독교적인 해석으로 보자면, 너무나 악한 여로보암 2세 때 나라가 부흥해진 것은 순전히 하나님 은혜였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구절 참조.[2]
여호와께서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고통당하는 것과 그들을 도와줄 자가 없는 것을 보시고 또 이스라엘을 지상에서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여로보암 2세를 통하여 그들을 구해 주신 것이다.
열왕기하 14:26~27 (현대인의성경)

참고로 이렇게 보면 여로보암 2세가 독보적인 재위기간을 자랑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왕이 오래 재위하는 것도 야훼의 축복이 있어야 가능하다. 즉 야훼가 그 왕을 오래 재위하게 하고자 하면 축복을 하여 오래 재위할 수 있게 하는데 여로보암 2세 역시도 야훼가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하고자 하였기에 41년이란 시간동안 재위할 수 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3]

[1] 성경에서도 이를 부인할 수는 없었는지 그의 업적으로 꼽긴 한다. [2] 그럼 왜 나중에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냐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정확한 이유는 알기 힘들지만 일반적으로는 하나님이 기다리다 기다리다 결국 심판을 내린 것으로 해석한다. [3] 비슷하게 극악하다고 평가받는 므나쎄도 44년간 재위한 것은 기록했는데 이를 두고 므나쎼가 나라는 잘 다스렸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말하기도 하며 실제로도 므나쎄는 성경에서의 악평과는 달리 군주로서는 꽤나 유능했다는 평을 받는다. 애초에 히즈키야 요시야를 통해 알 수 있듯 군주 개인의 신앙심과 정치적 수완은 별개의 문제다. 오므리 아합은 열왕기에서 악평을 받으나 역사적 관점으로는 훌륭한 군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