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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배급제를 설명하는 영상. 출처는 제국 전쟁 박물관. 식량으로는 설탕, 홍차, 라드, 버터, 치즈, 건조 달걀, 베이컨 등이 기본 지급된다. 통조림 등은 값을 지불하는 게 아니라 가정마다 할당된 포인트를 차감하는 식으로 구할 수 있다.
1. 개요
영국은 배급제를 실시한 대표적인 국가이다. 20세기 동안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자그마치 약 20년동안 배급 제도를 실시했고 이는 사회와 문화 전반에 큰 영향을 남겼다. 특히 영국 요리 문화는 배급제 실시 이후 크게 파괴되었다.2. 역사
2.1. 제1차 세계 대전
1914 ~ 19182.2. 제2차 세계 대전과 냉전 초
▲ 1951년 당시 한 사람에게 할당된 음식의 종류. 달걀, 베이컨, 버터, 치즈, 고기와 통조림 고기, 조리용 지방, 홍차, 마가린, 설탕으로 구성된다.
1939 ~ 1954
영국은 비록 2차대전 개전 문제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봤거나 대놓고 외면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전쟁이 발발할 것이라는 예감과 최소한의 대비는 되어 있었다. 1930년대 후반에는 누구나 곧 전쟁이 날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고, 영국 정부는 전시 체제를 위해 생산, 대피 등 여러 방면에서 계획을 세웠는데 그 중에는 배급제를 담당하기 위한 식량부(Ministry of Food)도 포함되어 있었다. 식량부는 1937년 설치되었으며 처음에는 배급계획보다는 기업 협조 등을 담당하는 실무적인 부서다.
1939년 9월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영국의 수송선들이 독일 잠수함 전단에 계속 격침된다. 영국은 식료품의 과반을 수입해 왔고 식자재 물가에 직격탄을 맞는다. 1939년 11월이 되면 12월 16일부터 하루에 골프공 만한 버터 한 조각, 일주일에 식빵 다섯 조각, 일주일에 베이컨 네 줄을 배급한다는 계획이 발표된다. 햄 샌드위치 하나를 만들어 먹으면 일주일 배급량의 절반이 거덜나는 셈이다. 1941년 5월 영국 성인의 주간 배급량은 우유 3파인트, 잼 225그램, 버터 170그램, 설탕 225그램, 베이컨 115그램, 치즈 30그램, 식용유 55그램, 홍차 55그램, 1실링 어치에 해당하는 기타 육류로 제한된다. 미국의 지원으로 조금 나아지기는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죽지 못해 사는 만큼 먹는 것에 지나지 않아 식량을 구하기 위한 투쟁이 곳곳에서 이어졌다. 그나마 햄의 경우에는 미국에서 건너오는 스팸 등 미국제 통조림으로 대체할수 있었지만, 이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무렵에 영국인들은 스팸에 대해 진절머리를 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나마 배급 외의 식량은 그 가격이 크게 올라 섣불리 구매하기 어려웠다. 영국에는 일요일 저녁을 푸짐하게 차려 먹는 전통이 있는데, 전시에는 One Pot Sunday 운동으로 검소한 식사가 권장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애초에 자재 값이 폭등한 상황에서 싸구려 스튜 한 솥 끓이는 가격이 전쟁 이전 사치스런 저녁식사와 가격이 같았음은 영국인들을 허탈하게 하였을 것이다. 다만 개전 초의 쇼크를 제외하면 영국에서 빵이 배급 대상이 되거나 아예 구하지 못해 못 먹는 상황까지는 간 적이 없었다. 다만 밀기울 섞인 통밀빵
(National Loaf 라고 부르며 번역하면 대충 나라빵, 정부빵 정도의 뜻)만 있었고, 80%를 수입에 의존했던 과일은 찾아보기 어려워졌다.[1]
정부는 이 참에 국민 식단을 좀 건강하게 구성해 보기로 한다. 영국인 이미지상 생선튀김, 베이컨, 콩조림, 견과류, 감자칩만 먹고 산다는 건 단순한 편견이 아니었는지 전쟁 이전 전국민의 25%가 영양불균형에 근로여성 50%가 건강이 나빴고(poor health), 5세 이하 유아의 80%가 각기병 등 다양한 골이형성증(bone abnormality)을 앓았으며 전인구의 90%가 충치나 기타 치과적 이상이 있었다. 이 당시 영양학은 이미 과학적 토대가 잡혀 있었으니 식량부 공무원들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열량과 무기염류의 종류를 알고 있었다. 식량부에서는 유아와 산모에게 영양분이 첨가된 우유와 대구 기름, 오렌지 주스 등을 배급하고 사회적으로 우유, 당근, 감자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신선채소류는 배급하기 매우 까다로우니 텃밭에서 길러 먹을 것(Dig On for Victory, 이 텃밭은 Victory Garden이라고 불렀다. 이 텃밭 만들기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에서도 권장되었다.)이 권장되었다. 정부는 나치의 폭격에도 경작지를 늘리며 식량 정책에 열성을 보였다. 이 정책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역설적으로 이 시기 영유아의 영양 상태는 전쟁 이전보다 더 좋았다고 한다.
한편 식당에서는 배급제를 도입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있는 부유층들은 여전히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풍족한 식사를 먹을수있었지만, 이 때문에 서민층들의 분노가 커지자, 1942년자로 영국 정부에서 레스토랑들의 점심영업을 제한하고 고급 레스토랑집의 코스요리를 3단계로 간소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한편 영국에서는 1941년 6월 1일부로 의류와 신발도 배급 대상이 되었다. 정확히는 옷감과 가죽 소비를 통제한 것으로, 사람들은 연간 의류 배급표 66매를 받았다. 재킷 한 장을 사려면 쿠폰 13장을, 넥타이 한 장에 쿠폰 한 장을 써야 했다고 한다. 물론 배급표를 내면 공짜인 게 아니고 돈은 따로 내야 했다. 이를 두고 유틸리티 패션이라 하였는데, 남자들은 죄다 똑같은 옷을 입고 다니고 여자들의 옷도 적은 장식, 적은 옷감, 적은 단추를 쓴 다소 고만고만한 종류들 안에서 짜맞춰 입게 되었다. 옷감 전체를 대상으로 하였기 때문에 수건이나 이불 역시 배급표를 들고 가서 사야 했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배급표는 연간 48장까지 줄었다고 한다.
이 배급제는 왕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영국 왕실의 경우에는 배급식량을 안 사먹어도 될 정도의 돈은 있었지만 전시상황이었기 때문에 먼저 모범을 보인다는 의미에서 일부러 배급제를 지켰던것이었다. 목욕과 난방도 제한되었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결혼식때에는 웨딩드레스를 배급표에서 차감해서 샀을 정도였다. 물론 평시보다 훨씬 궁핍하게 생활하기는 했지만, 왕실직속 농장에서 상당량의 농작물을 공급받았기 때문에 일반인들처럼 식료품을 구하려고 줄을 길게 서는 수고는 안해도 되기는 했다.
배급제 자체는 전후에도 지속되었다. 전쟁 직후 영국 정부는 전쟁수행의 결과로 재정파탄에 직면해있었고, 거기에 더해서 미국에서 오는 지원이 끊어진데다가 산업시설 복구 및 국유화에도 많은 돈이 투입되었던 관계로 영국 정부의 재정이 궁핍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46년 ~ 1947년도 영국의 농업작황사정이 좋지 않았다는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1949년부터 배급제도가 점차 축소되었지만, 배급제는 1954년이 되어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 참고자료
- Willian Shirer, <Berlin Diary>, 22nd October 1939
- Norman Longmate, <How We Lived Then>, 1971
- Peter Lewis, <A people's war>, 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