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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22:02:00

열양세시기

1. 개요2. 편찬 배경3. 내용4. 의의

1. 개요

洌陽歲時記. 조선 순조 19년, 1819년에 김매순(金邁淳)이 한양 세시풍속을 기록한 책. 고려대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2. 편찬 배경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울로 상업자본이 집중되고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자 서울의 상권은 도성 밖으로 확장되고,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유통구조도 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종루시전(鐘樓市廛), 배오개시장, 칠패시장, 이현시장 등의 등장으로 상권이 발달하면서 서울의 도시화를 가속화시켰고 활발해진 대외무역을 통해 외국에서 전해져오는 다양한 서적, 문물 등이 들어오는데 그 대외무역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역관 상인층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시세 차익을 축적한 평민 부자층, 중인의 형성으로 서울에는 소비적 유흥문화가 급격히 발달한다.

이 과정에서 서울만의 도시적 분위기, 생활 문화가 만들어진다. 다른 지역과는 차별되는 생활양식과 독자적 민속 풍토가 이루어지는데 이를 기록한 책 중 하나가 바로 이 열양세시기이다.

3. 내용

서울의 세시풍속 80여종을 월별로 구분하고 각각에 절후에 해당하는 풍속을 기록했다. 월별로 나눈 것은 다음과 같다.
민속에 관한 풍속이 40여종, 궁중풍속에 관한 것이 30여종, 나머지는 음식치례에 관한 것이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농암시는 설날에서 3일까지 고관대작들의 잔치 분위기를 시로 지은 것인데 사기(邪氣)를 막아준다는 도소주(屠蘇酒)를 마시며 노인부터 소년들까지 모두 취흥에 빠져 즐거워하는 묘사가 있고, 삼연시는 서울 장안의 수 많은 남녀들이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안색에 윤기가 돈채 노니는 풍경을 묘사했다.

오월 단오절에는 조정에서 전라도, 경상도 감영과 통제영에서 직접 만든 고품질 부채들을 시종관 삼영에까지 상례에 따라 모두 나누어주고, 부채를 하사받은 각 대신들은 일반 백성들과 자신들의 노비, 소작인, 묘지기에게까지 모두 찾아가 이 부채를 나누어주며 축복해 주었다. 때문에 당시 민간에서는 "여름에는 부채, 겨울에는 달력으로 생색낸다"는 속담이 생겼다고 한다.

6월에는 내의원에서 기념으로 옥추단(玉樞丹)이란 걸 만들었고 임금이 직접 대신들의 건강을 빌며 옥추단을 각 대신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옥추단은 일종의 구급약으로 구멍을 뚫어서 부채 장식 끝에 매달아 가지고 다니다가 급할때 갈아서 물에 타 마시도록 했다. 12월에는 황감제(黃柑製)라 하여 제주도에서 진상한 황감을 과거보러 온 유생들에게 임금이 직접 나누어줬다.

민간인들의 세시풍속의 경우 상해일에 팥비누를 만들어 머리를 감았고 상자일에는 새옷을 사 밖으로 외출하는 풍속이 있었다. 1월 15일에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모여 밤에 정화수를 뜨고 물고기 밥을 줬으며 연을 날리고 호로 차기를 했다. 2월 6일에는 별자리 점치기가 유행했고 3월 동안에는 대부분의 민간인들이 남산 북한산 유람을 다녔다. 4월 8일에는 연등을 켜고 물장구 놀이를 즐겼으며 5월 5일에는 창포물에 머리감고 그네를 뛰었다. 6월에는 민간인들의 집에서 하루씩 날을 잡아 잔치 향연을 벌였으며 7월 15일에는 부처님에게 꽃을 바치고 제를 올렸다. 중추절(仲秋節)에는 가배절(嘉俳節) 성묘를 지냈고, 9월 9일에는 수많은 민간인들이 꽃구경을 다녔다. 10월 20일에는 손돌[1]묘 고사를 지내고 가죽옷을 나누어 입었으며 12월에는 다같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참새잡이를 했다.

4. 의의

동국세시기, 경도잡지, 동경잡기 등의 책과 함께 18세기 우리나라의 민속문화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볼 수 있다.

또한 서울의 세시풍속을 전해주는 한편, 실학사상의 맥락과 연결되면서 개화기의 국학연구에도 도움을 주었다.

[1] 고려때 강화도의 뱃사공으로 피난가는 임금을 태우고 강화도로 가다 배 안에서 의심을 사서 억울하게 참형을 당했는데 이후 10월 20일이면 그의 원한으로 강화도 인근 해역에 대풍이 분다는 속설이 떠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