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여준현(呂駿鉉) |
생몰 | 1876년 2월 23일 ~ 1950년 7월 16일 |
출생지 |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
사망지 | 경기도 양평군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여준현은 1876년 2월 23일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0년 음력 1월부터 안종운, 장응규, 이민식(李敏軾) 등과 함께 서울 연지동의 자택에서 여러 차례 회합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후원할 수 있는 조직체를 결성하기로 협의했다. 그들은 임시정부의 요인이며 친족인 여운형에게 보내는 소개장(紹介狀)을 작성하여 장응규를 상해로 파견하여 임시정부가 발행한 서류 또는 증서를 받아내게 했다. 그해 5월 초, 장응규는 임시정부로부터 서울에서도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여 임시정부와 연락하며 독립을 위해 운동자금 모집에 진력해 달라는 의뢰서를 받고 서울로 돌아왔다.1920년 6월, 여준현은 서울 연지동 경신학교(儆新學校)에서 이민식, 안종운, 심영택, 이규승(李奎承), 장응규 등과 함께 주비단을 조직하고 주비단의 재무장(財務長)으로 선출되었으며, 9월에 주비단의 주요 간부들과 회합하여 소진형을 단장(團長)으로, 신석환(申奭煥)을 참모장(參謀長)으로 선출하는 등 새롭게 조직을 보강하였다. 이후 이민식, 신석환, 이규승 등과 임시정부 발행의 공채증권(公債證券)인 액면가 100원권 30매, 500원권 6매, 1,000원권 4매 합계 10,000원의 증권을 장응규로부터 받아서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모집을 결행하기로 협의하고 그중 5,000원의 공채증권을 안종운에게 교부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22년 4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양평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50년 7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여준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