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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튼 존/196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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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 시절 (1947~1960)2. 술집 피아니스트, 콜벳스와 블루솔로지 (1961~1967)3. Scarecrow와 틴 팬 앨리 (1967~1968)4. Empty Sky와 세션 뮤지션 (1968~1969)

1. 유년 시절 (1947~1960)

엘튼 존 1947년 3월 25일, 영국 런던 피너[1]에 위치한 외조부모의 집에서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Reginald Kenneth Dwight)로 태어났다.[2][3][4] 아버지는 스탠리 드와이트(Stanley Dwight), 어머니는 실라 아일린 드와이트(Sheila Eileen Dwight). 처녀적 성은 해리스(Harris). 스탠리 드와이트와 실라 해리스는 1945년 각각 20살의 나이로 결혼했고 실라 해리스의 부모님 프레드, 아이비 해리스와 함께 피너의 피너 힐 로드 55번지에 신혼집을 차려 지냈다.[5] 둘 사이에 낳은 자식은 엘튼 존 밖에 없다. 두 사람 모두 음악적인 소향이 있었는데, 실라 해리스는 음반 수집가였고 스탠리 드와이트는 영국 공군 중대장였지만 한때는 1950년대 영국의 연주곡 밴드 <밥 밀러 앤 더 밀러멘>[6]의 트럼펫 연주자였다.[7] 이는 스탠리 드와이트의 아버지, 즉 엘튼 존의 친할아버지 에드윈 드와이트(Edwin Dwight)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1900년대 초반, 영국 랭커셔 프레스콧에 위치한 BICC 전선 회사에서 직원으로 일했을 때 사내 금관 밴드에서 금관악기 코넷을 연주한 적 있었고 특유의 연주력과 기교 덕분에 많은 상을 받은 적 있었다.[8][9]

부모의 음악적 소향을 물려받은 엘튼 존은 3살부터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3살 때 에밀 발퇴펠(Émile Waldteufel)의 스케이트 왈츠(Les Patineurs)를 외워서 연주하는 등[10][11] 어머니, 할머니, 이모로부터 천부적인 재능이 있다고 판단해 5살 때부터 피아노 교습을 정식적으로 받기 시작했다.[12] 6살이던 1953년에는 자신의 꿈이 무대 피아니스트라고 말했다. 엘튼 존은 3~4살부터 라디오와 부모님이 구매한 음반들로 프랭크 시나트라, 로즈메리 클루니, 냇킹 콜 등 주로 아버지 세대의 재즈, 스탠더드 팝 음악을 들으며 자랐고 특히 가장 큰 관심을 가졌던 장르는 스키플[13]이었다.[14]

어느 날, 자신의 어머니가 빌 헤일리의 "ABC Boogie", 엘비스 프레슬리의 "Heartbreak Hotel" 싱글 두 장을 들고 집에 와서 틀었는데 이것이 바로 엘튼 존이 로큰롤에 빠지게 된 계기였다. 이후 제리 리 루이스, 리틀 리처드의 곡들을 듣고 연달아 이어서 쏟아져 나오던 "Rock Around The Clock", "All Shook Up" 등의 로큰롤 히트곡들에 완전히 매료해 이를 계기로 음악가의 길을 꿈꾸기 시작했다.[15][16]

엘튼 존은 음악 말고도 스포츠에 큰 관심을 가졌다. 크리켓, 테니스, 축구를 좋아했고 축구팀 중에서는 왓포드 FC에 크게 열광했다. 이후 엘튼 존은 음악가로서 큰 성공을 맞이하면서도 왓포드 FC와 역사적인 인연을 이어가기 시작했는데, 1976년에 팀을 직접 사서 1976~1987년과 1997~2002년 두 차례에 걸쳐 회장을 역임하고 종신 명예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fc7a87b13876bf3eb6adfaea895c41dd.jpg
어린 시절의 레지널드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가수가 되고 싶어했지만, 당시 보수적인 성향의 군인이던 스탠리 드와이트는 아들의 직업 선택과 음악적 성향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항공 직원이나 은행원 등 안정적인 작업에 종사하도록 엄격하게 다그쳤다.[17] 아들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뿐 더러, 직업 상으로 집을 자주 비워 아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던 상당히 소원했던 사이였다. 심지어 유행을 타던 옷이나 신발도 못 신게 할 정도였다.

엘튼 존은 특유의 화려한 무대 의상이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제약에 대한 반항의 산물이었다고 뒤늦게 밝혔다. 남편의 교육 방식에 불만을 가졌던 아내와 자주 싸웠고 자신의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엘튼 존은 항상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었다. 이러한 환경이 트라우마가 되어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고 전반적인 성격이나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끼쳐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으로 변했고, 사교성도 떨어졌다. 방 안에 혼자 틀이 박혀 음반을 들으며 지내던 시간이 많았고 거의 외톨이로 지냈다.

아버지는 군인답게 교율을 강조하는 사람이었고 아들이 약하게 자라는 걸 못마땅하게 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아들을 더욱 엄격히 키웠다. 십수 년이 지난 뒤, 엘튼 존은 각종 인터뷰에서 자신이 어렸을 때 가장 두렵게 느끼던 인물은 아버지였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두려움을 털어냈다. 자신이 가장 크게 후회하는 것들 중 하나가 불행했던 어린 시절이었고 트럼펫 연주자였던 아버지가 음악적으로 왜 반대하는지 이해가 가지 못했다고 밝혔다.[18] 어머니도 다소 엄격하긴 했지만 아버지에 비하면 더욱 유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영국 공군이었던 아버지는 군 복무로 바빴고 아들에게 무관심했던 아버지 대신 주로 어머니와 외할머니에 의해 길러졌다.

엘튼 존은 8~10살 사이에 피너 우드 초등학교, 피너 사립 학교, 11살부터 16살까지 피너 카운티 문법학교에 다녔다.[19]

1953년 공군에서 중대장으로 진급한 아버지는 이라크에서 두 번째 파병 근무를 마치고 버킹엄셔 주에 있는 메더넘 공군 기지에서 장기간 근무를 제안받게 되면서 피너에서 3km 떨어진 노스우드의 포터 스트리트 11번지로 이사를 갔지만 그 곳에서도 썩 좋은 기억은 없었다고 밝혔다.[20]

실라 해리스는 동네 건축업자이자 도배업자 프레드 페어브라더(Fred Farebrother)와 바람을 피우다가 스탠리 드와이트에게 들켰고 엘튼 존이 15살이던 1962년 5월 4일에 이혼했다.[21][22] 스탠리 드와이트는 자신이 근무하던 요크셔주 해러게이트에서 만난 연구기술자 '에드나 M 클라프'와 몇 개월 뒤 1962년 12월 28일에 재혼했고 에식스 주로 거처를 옮기고 나서 1964년부터 1969년까지 5년에 걸쳐 4명의 아들 스탠리 E 드와이트, 로버트 A 드와이트, 제프리 윌리엄 드와이트, 사이먼 매슈 드와이트를 낳았다. 한창 사춘기였던 엘튼 존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는데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금세 새 가정을 차린 것,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으면서 이복동생들에게 더욱 큰 사랑을 주면서 지내던 모습이 자신에게 커다란 상처로 다가오면서 자존심을 크게 망가뜨렸다고 밝혔다.[23]

이후 엘튼 존 가족은 런던 노스우드 힐에 위치하던 프롬 코트(Frome Court)라는 8가구 아파트 건물로 이사했다.[24] 1971년 4집 Madman Across The Water가 차트에 오를 때까지 그곳에서 9년간 거주했다. 엘튼 존은 의붓아버지의 이름 프레드(Fred)의 철자를 거꾸로 바꾸어서 그를 더프(Derf)라는 애칭으로 부르면서 의붓아버지와 더욱 친하게 지내왔다. 이러한 가정 환경에서도 엘튼 존은 꾸준히 무대 피아니스트, 음악가의 꿈을 키웠고 당시 다니던 피너 카운티 문법 학교에서도 행사 때 제리 리 루이스의 곡을 연주하여 칭찬을 받았다.[25]

1958년에는 11살의 나이로 영국 왕립음악원(RAM)[26]에서 주니어 장학생 자격으로 입학했고 그를 지도했던 교사 헬렌 피에나와 친하게 지냈다.[27][28] 당시 교사는 헨델 음악의 악보 네 장 분량(Four-page Piece)을 엘튼 존에게 들려주자, 마치 축음기 녹음을 재생하듯이 그대로 똑같이 연주했다고 회상했다.[29] 그 전까지는 악보를 못 보고 귀로만 듣고서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왕립음악원 수업을 통해 악보 보는 법도 즉시 익혔다.

2. 술집 피아니스트, 콜벳스와 블루솔로지 (1961~1967)

파일:external/www.eltonjohn.com/archive_006.jpg
1965년 블루솔로지, 가장 오른쪽이 엘튼 존이다.
1961년, 엘튼 존은 14살의 나이로 노스우드 힐스 호텔(Northwood Hills Hotel)의 선술집에서 주말 피아니스트로 고용되면서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저녁에 주로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당시 "레지''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짐 리브스의 "He'll Have To Go"부터 "When Irish Eyes Are Smiling"[30], "Roll Out The Barrel", 레이 찰스 곡들로 다양하게 연주했다. 초기에는 별 반응이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주말마다 사람들로 가득 채워졌고 팁도 두둑이 받았다.[31]

1961년, 자신의 사촌 형 로이 드와이트[32]의 친구이자 보컬을 담당하던 기타리스트 '스튜어트 브라운'과 함께 <콜벳스>(The Corvettes)를 결성했다.[33][34][35][36] <콜벳스>는 주로 로큰롤과 블루스를 연주하던 아마추어 밴드였다. 보컬은 스튜어트 브라운, 엘튼 존은 키보드, 베이스와 드럼은 각각 엘튼 존의 학교 친구들이던 '제오프 다이슨'[37]과 '존 저비스'가 맡았다. 피너의 교회나 각종 클럽에서 공연을 열었지만 몇 차례의 공연을 끝으로 1962년 봄에 해산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학교, 토요일에는 왕립음악원에 다녔고 금요일/토요일/일요일 저녁 3일간 술집 피아니스트, 콜벳스 활동으로 바쁘게 지냈다. 엘튼 존의 음악 인생은 바로 여기서 시작되었다.

당시 엘튼 존의 성격은 소극적이면서 내성적인 편이었는데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본인의 모습을 감추려고 했고 이 시기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애초에 시력은 나쁜 편이 아니었고 굳이 안경을 쓸 이유가 없었지만, 버디 홀리의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으면서 안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도수가 높은 안경을 자주 쓰게 되면서 시력이 급격히 나빠졌다.[38]

콜벳스가 해체되고 6개월 뒤인 1962년 가을, 스튜어트 브라운과 믹 잉크펜와 함께 블루스 밴드 블루솔로지(Bluesology)를 결성했다. 밴드 이름은 벨기에의 재즈 가수 '장고 라인하르트'의 1949년 싱글 "Djangology"에서 빌렸다.[39] 베이시스트와 드럼은 제오프 다이슨, 존 저비스를 대신해서 '렉스 비숍'과 '믹 잉크펜'으로 교체했다. 이후 색소폰 연주자 '데이브 머피'가 합류했고 엘튼 존은 마찬가지로 피아노를 연주했다.[40]

블루솔로지는 콜벳스처럼 주로 로큰롤과 블루스 곡들로 불렀지만, 셋리스트에 수록된 대다수의 곡들은 당시 사람들이 거의 모르는 곡들이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마어마한 야유를 받았다. 술집의 사람들은 그들에게 물건을 집어 던지는 상황이 허다했지만 이를 이겨내면서 술집의 밴드로 활약했다. 약 3년간 런던의 여러 호텔 바에서 독주를 하거나 블루솔로지와 함께 연주를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한창 대중음악에 몰두하고 술집, 밴드에서 활동을 시작한 엘튼 존은 왕립음악원에서 클래식을 배우는 것에 대해 크게 내키지 않다고 생각했다. 클래식과 거리가 멀어지면서 결국 입학 5년 뒤 1963년, 16세의 나이로 왕립음악원을 중퇴했다. 그 후, 엘튼 존은 어렸을 때 클래식을 배운 것은 훌륭한 결정이었고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이해하게 되었고 곡을 작곡하는데 많은 면에서 도움이 크게 되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41]

1965년 3월 5일, 엘튼 존은 18살의 나이로 그동안 쌓여 왔던 학업 스트레스로 인해 피너 카운티 문법학교를 중퇴하기를 결심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학업에서 벗어났고 음악 활동에 더욱 몰두하기 시작했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밀스 음반사에서 배달원으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견습생 시절로 이어졌는데 이는 사촌 형 로이 드와이트가 음악업계에 연이 닿아 친구의 친구를 통해 엘튼 존이 일하도록 주선한 것이었다.[42]

1965년 6월, 블루솔로지는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싱글 발매를 고려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음반사와 계약 따위 하지 않은 상황이라서 자비로 녹음할 수밖에 없었고 데모를 녹음해서 음반사로 돌리기로 결정했다. 1965년 6월 3일, 블루솔로지가 아는 가장 가까운 스튜디오인 런던 피너의 잭슨스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엘튼 존 작사/작곡 Come Back Baby, 지미 위더스푼의 "Time's Getting Tougher Than Tough", 보 카터의 "Corrina Corrina"를 녹음했다. "Time's Getting Tougher Than Tough"와 "Corrina Corrina"에서는 스튜어트 브라운이 보컬을 맡았고 "Come Back Baby"는 엘튼 존이 불렀다. 당시 레코딩 스튜디오의 상태가 무척 열악했는지 드러머 믹 잉크펜은 마치 헛간 같았다고 회고했다.[43]

그렇게 녹음된 데모 테이프를 음반사를 돌아다니며 관심을 얻으려고 노력했고 마침내 필립스의 산하 음반사, 폰타나의 기획부 서장 잭 배버스톡이 싱글을 녹음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그는 데모 테이프를 듣고서 발매하기에 알맞지 않다고 여겨 필립스의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새로 녹음하자고 했는데, 필립스 스튜디오에서의 녹음 작업이 전혀 순탄치 않았다고 한다. 피아노 사운드의 오작동, 마이크를 피아노에 연결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거의 모든 장비들이 엉망이었다. 값비싼 스튜디오에서의 녹음 진행이 잭슨스 스튜디오에서 녹음 한 것보다 훨씬 안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데모 테이프를 잘 손봐서 그냥 발매했다.[44] 1개월 뒤, 1965년 7월 23일 필립스 음반사에서 "레지 드와이트/블루솔로지" 명의로 첫 싱글 Come Back Baby가 발매되었고 블루솔로지의 멤버들과 더불어 엘튼 존은 18세의 나이로 음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후 블루솔로지는 아이슬리 브라더스, 메이저 랜스, 도리스 트로이, 패티 라벨[45], 블루벨르 등 미국의 소울, 블루스, R&B 뮤지션들의 공연 뒤 무대에 서면서 활동했고 1965년 11월에는 엘튼 존 작사/작곡이자 이번에도 보컬을 맡은 두 번째 싱글 Mr Frantic를 녹음하고 1966년 2월 발매했다. 1966년부터 블루솔로지는 1960년대 영국의 블루스 뮤지션 "롱 존 볼드리"(Long John Baldry)를 돕는 보조 밴드로 활동하면서 영국에서 카바레 투어를 시작했다.[46] 롱 존 볼드리는 1960년대 당시 영국에서 상당한 입지와 영향을 끼치던 인물이었다. 영국의 클럽에서 블루스를 연주하면서 각종 최초 기록을 세우거나 그가 공연을 진행했던 장소에는 무명의 믹 재거, 찰리 와츠가 연주를 했고, 무명이던 로드 스튜어트까지 발굴했다. 에릭 클랩튼이 가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한 계기가 바로 롱 존 볼드리의 공연을 보면서였다.[47]

블루솔로지는 롱 존 볼드리를 만나게 되면서 스웨덴, 프랑스 등 유럽 각지에서도 투어를 진행하여 입지를 조금씩 넓히기 시작했지만, 엘튼 존은 1967년까지 연달아 발매된 세 장의 싱글 "Come Back Baby", "Mr. Frantic", Since I Found You Baby가 연달아 상업적으로 실패한 것과 밴드 활동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결국 블루솔로지에서 탈퇴하기를 결심했고 크리스마스 이후인 1967년 12월 말, 블루솔로지에서 탈퇴했다. 비록 엘튼 존은 카바레 투어를 하면서 지내는 밴드 활동을 크게 불평했으나, 나름대로 즐거웠던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다.[48]

3. Scarecrow와 틴 팬 앨리 (1967~1968)

파일:external/www.eltonjohn.com/liberty01.jpg
리버티에서 인재 구함
신인 그룹 결성할 아티스트/작곡가/가수 모집
약속을 잡거나 오디션 테이프를 보내실 분은 런던 앨버말 스트리트 11번지나 메이페어 7362의 레이 윌리엄스에게 연락 바람
1967년 6월 17일, 영국의 음악 잡지 뉴 뮤지컬 익스프레스(NME)지에서 한 광고가 실렸는데 이는 리버티 음반사(Liberty Records)의 사장 레이 윌리엄스(Ray Williams)[49]가 쓴 것이다.[50][51] 엘튼 존은 이 잡지를 읽고 있었을 당시, 뉴캐슬에서 블루솔로지 공연 중이었다. 블루솔로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엘튼 존은 이 광고를 절호의 기회라고 여겨 바로 레이 윌리엄스에게 연락해서 첫 만남을 가졌다. 엘튼 존은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애착하는 짐 리브스 곡들을 골라서 녹음한 5곡을 레이 윌리엄스에게 선보였다.[52]

같은 날, 같은 광고에 응했던 신인 작사가 버니 토핀은 직접 작사한 가사를 레이 윌리엄스에게 보여주었는데 레이 윌리엄스는 엘튼 존과 버니 토핀 두 사람에게 큰 잠재력을 가졌다고 확인했다. 레이 윌리엄스는 버니 토핀의 가사들을 엘튼 존에게 넘기는 식으로 자연스레 협업을 키우기 시작했는데 버니 토핀이 작사한 Scarecrow를 우편으로 부쳐 엘튼 존에게 주었고 엘튼 존은 그 가사로 곡을 작곡했으며 이어서 "​A Dandelion Dies In The Wind", "Velvet Fountain"를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었고 이 곡들은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첫 번째 작품들이 되었다.

처음에는 얼굴도 모른 채 우편으로 통해 곡을 작업했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레이 윌리엄스가 추천해준 딕 제임스(Dick James) 음반사의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53] 커피를 마시면서 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친해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트너 사이로 가까워지게 되었다. 1967년 11월 17일,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향후 계획을 위해 영국 런던 덴마크스트리트[54] 위치한 딕 제임스[55]의 음반사 DJM(Dick James Music)과 계약을 했고 서로 DJM 레코딩 스튜디오에서 수많은 곡들을 작업하기 시작했다.[56]

1968년 3월 1일에 싱글 발매를 앞두고 있었는데, 싱글 표지에 표기할 이름을 생각했고 레지널드 케네스 드와이트보다 발음하기 쉽고 잊어버리기 쉽지 않은 이름으로 쓰고자 했다. DJM 음반사도 이 이름으로 음반을 낼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블루솔로지의 멤버 엘튼 딘(Elton Dean)과 롱 볼드리(Long John Baldry)의 이름에서 각각 한 단어씩 따 온 엘튼 존으로 표기했고 예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967년 12월부터 4년간 예명으로 사용하다가 1972년 1월 7일, 엘튼 허큘리스 존(Elton Hercules John)으로 법적개명했다.[57][58]
파일:external/si.wsj.net/BN-JI319_NYSCEN_P_20150710155018.jpg
엘튼 허큘리스 존과 버나드 존 토핀, 1969년 런던에서.
그렇게 발매된 첫 솔로 싱글 I've Been Loving You는 블루솔로지 시절 때 발매된 3장의 싱글들처럼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이후 DJM 음반사의 사장 '딕 제임스'(Dick James)는 신인이던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을 상근 작사/작곡가로 고용하여 톰 존스나 잉글버트 험퍼딩크 풍의 곡들을 작업하라는 임무를 부여했고 몇 개월 동안 엄청난 양의 곡들을 작업하던 '틴 팬 앨리'(Tin Pan Alley)[59] 시절을 보내었다.[60] 3년간 한 해에 18곡 이상을 작곡하라는 계약 내용과 음반사의 압력으로 인해 몇 개월간 70곡을 가뿐히 넘길 정도로 수많은 양의 곡들을 작곡했다.[61]

곡을 작곡하는데 10~20분 채도 걸리지 않는 엘튼 존의 신속한 작곡 방식을 이용하여 단기간 내에 10곡, 20곡 이상을 한꺼번에 작곡했고 여기에 DJM에서 일하던 기타리스트 케일럽 퀘이, 엘튼 존도 작사까지 맡으면서 더욱 많은 곡들을 작업했다. 첫 싱글 I've Been Loving You와 싱글 B면으로 수록된 Here's To The Next Time은 이런 식으로 작업되면서 엘튼 존이 작사까지 맡았던 것이다.

딕 제임스의 요구에 맞게 가벼운 연예계에 어울리는 감성적인 곡들을 작업하라는 임무를 부여했지만 단기간 내에 엄청난 양의 곡들을 한꺼번에 작업하고 피로가 금방 누적되는 바람에 에너지를 많이 잃었으며, 당시 작업된 곡들 대부분은 진부한 선율에 진부한 가사로 범벅인 시콜콜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기대이하의 결과물들을 많이 양산했다.

단기간 내에 수많은 곡들을 한꺼번에 작업하면서 끼니도 제대로 떼우지 못하고, 인근 야간 카페에서 졸음을 달아내는 등 힘든 시기를 보내었고 몇년 뒤, 상근 작사/작곡가로서 지내던 경험을 포함한 무명을 1975년 9집이자 자서전 앨범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에서 상세히 묘사했다. 당시 DJM에서 일했던 사람들에 따르면, 엘튼 존은 수십곡들의 데모를 녹음하면서 앨범 전체를 녹음했지만 발매되지 못했다.[62]

1968년 6월에는 1967년 크리스마스 이브부터 몇 개월간 관계를 유지했던 여자친구이자 DJM에서 엘튼 존의 비서로 일했던 '린다 우드로'와 갑작스러운 약혼과 결혼 문제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 아파트에서 가스를 틀어놓으며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

1968년에 작곡된 "I Can't Go On Living Without You"를 1969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서 출품했는데 당시 룰루가 부른 6곡 중 하나이고 영국 예선을 통과한 6곡 중에서 6위로 기록되었다.[63] 룰루가 부른 "Boom-Bang-A-Bang"이 당시 대회에서 영국 대표로 참가하여 공동 우승을 차지한 것. 이 곡은 엘튼 존이 작사까지 맡았는데 가사가 워낙 진부한 형편 없는 곡이라고 싫어한다.[64] 두 사람이 작업한 곡들 중에서 동료 뮤지션이 커버하여 세상에 공개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정작 무명이던 버니 토핀와 엘튼 존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4. Empty Sky와 세션 뮤지션 (1968~1969)

1968년 7~8월 경, DJM의 출판업자 "스티브 브라운"는 실의에 빠져있던 엘튼 존과 버니 토핀에게 갖가지 조언을 해주면서 도와주었다. 당시 엘튼과 버니를 도와주던 이는 몇 명 더 있었는데 당시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영국의 가수 "로저 쿡"과 "로저 그리너웨이" 작곡팀도 응원을 해주었다.[65] 기운을 북돋워줄 생각으로 엘튼과 버니에게 새로 쓴 곡이 있으면 들려주라고 했고 당시 신곡이었던 Skyline Pigeon, "When I Was Tealby Abbey"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로저 그리너웨이는 본인이 프로듀서로 맡고 있던 듀오 <영 앤 렌쇼>로 "When I Was Tealby Abbey"를 녹음했고 로저 쿡은 "Skyline Pigeon"을 녹음하여 DJM로 통해 발매되었다. 로저 쿡은 "Skyline Pigeon"을 엘튼 존의 명곡 중 명곡이라고 칭찬했고 비둘기를 소재를 한 그런 놀라운 곡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해 감탄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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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1집 Empty Sky의 영국판 표지
1968년 12월에 스티븐 브라운이 프로듀싱을 맡으면서 녹음된 Lady Samantha가 1969년 1월에 두 번째 솔로 싱글로 발매되었다. 이 곡도 차트 진입에 실패했지만 실제 판매에 비해 라디오에서 많이 방영되던 이른바 "턴테이블 히트곡"이 되는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67] 당시 음악 업계에서는 엘튼 존이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고 딕 제임스 또한 "남들을 위한 음악이 아닌, 자신들을 위한 음악을 만들고 싶다"라는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면서 상근 작사/작곡가 생활에서 벗어났고 상업적인 구성의 곡들에서 한층 수준을 높인 자신들만의 음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다.

1969년 5월, "Lady Samantha"의 후속 싱글로 It's Me That You Need가 발매되었고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잠재력을 느낄 수 있는 곡이라는 호의적인 평을 받았으나 이 곡도 차트 진입에 실패되었다. 2개월 뒤 1969년 6월, 1968년 12월부터 1969년 4월까지 5개월간 작업된 1집 Empty Sky가 6월 6일 발매되었다. 1집은 DJM 음반사의 레코딩 스튜디오 지하에 위치한 8 트랙 녹음 장비를 사용해 작업되었다. 전반적인 음악은 사이키델릭 록과 포크 록의 분위기가 보이고 소박하면서도 기묘한 분위기를 담은 괜찮은 수준의 앨범이다.

1집까지만 해도 엘튼 존 특유의 음악성과 천부적인 기질을 펼치기 전이었으나 잠재력을 충분히 보이는 앨범이라는 괜찮은 평을 받았다. 하지만 데뷔 앨범은 상업적으로 실패되었고 발매 당시 영국에서 판매량은 고작 2,500장에서 머물고 있었다.[68] 비록 1~2년 전보다는 한층 나아진 상황에 있었으나 몇년 간 이어지던 상업적 실패로 상실감은 느낀 엘튼 존은 1968년 가을부터 1970년 여름까지 갖가지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이며, 스케줄이 비는 날이 없이 아주 바쁘게 지내었다.

상근 작곡가로서 활동을 마친 이후, 1968년 9월 27일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 맞춰서 발매되어 영국에서 35위로 오른 코미디 그룹 <배런 나이츠>의 히트곡 "An Oylmpic Record"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동료 뮤지션들의 히트곡, 앨범에 참여하여 건반과 백 보컬을 맡는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했다.[69][70] 1968년 2월 발매된 톰 존스의 "Delilah"에서 백보컬을 맡은 것이 세션으로서 참여한 첫 번째 경우였으며 몇 개월 뒤부터 한동안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한 것이다. 1968년 11월 발매되어 영국 1위로 오른 <더 스캐폴드>[71]의 "Lily The Pink"에서 백 보컬, 1969년 9월 26일 발매된 <더 홀리스>의 "He Ain't Heavy He's My Brother"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자세한 내용은 엘튼 존/싱글 목록의 '피처링' 문단 참고.

1968년 12월 2일, DJM 음반사에서 일하던 세션 연주자들이던 기타리스트 케일럽 퀘이, 드러머 로저 포프, 베이스 버니 캘버트와 함께 기악곡 밴드 <Bread Beer And Band>를 결성했다. 백밴드로 만들겠다는 야심과 달리, 당시 작업된 앨범은 1969년 2월 발매된 리드 싱글 "The Dick Barton Theme (The Devil's Gallop)"의 부진한 판매로 인해 판매를 취소했다.[72] 이 앨범은 1990년대에 부틀렉으로 뒤늦게 공개되었다.

1969년 초반, 킹 크림슨과 젠틀 자이언트 오디션에 나갔지만 탈락되었다.[73] 이후 1970년 3월, 킹 크림슨 멤버들은 엘튼 존을 보컬리스트로 영입하려고 했으나 나중에 이 결정을 취소하게 되면서 엘튼 존 영입은 무산되었다.[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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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부터 1971년까지 곡들을 작곡하면서 사용된 1910년형 흰색 에이데이 업라이트 피아노
1972년 5월 31일, 엘튼 존은 당시 거주하던 아파트의 이웃에게 이 피아노를 주었고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은 피아노에 잘 보살피라는 말을 써놓았고 19년 뒤 1991년 5월, 엘튼 존은 다시 그 이웃 집을 찾아가 이 피아노에 2차로 고맙다는 말을 써놓기도 했다.
"브라이언, 나네트, 새러와 에마에게 사랑을, 엘튼 존." 1972년 5월 31일
"많은 성공을 함께한 오리지널 피아노입니다. 이 피아노 안에는 100곡의 노래 유령들이 있어요. 그들을 잘 보살펴줘요. 그들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행운이 함께하길, 노래 가사를 쓴 버니 토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피아노는 1995년 영국 경매로 통해 톰 폰테인이라는 사람에게 낙찰되었고 2002년 클리블랜드의 로큰롤 명예의 전당 박물관으로 옮겨졌다.[75] 2004년 4월, 이 피아노는 댈러스 경매로 통해 익명의 낙찰자에게 넘겨지면서 캐나다 앨버타주 캘거리에 위치한 내셔널 뮤직 센터 박물관에 전시되었다.[76][77]

1969년 6월에는 "It's Me That You Need"를 녹음한 런던의 Olympic 스튜디오에서 1970년 영화 《더 게임》의 OST From Denver To L.A.를 녹음했고[78] 런던 소호의 버윅 스트리트에 위치한 음반 매장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만약 가수로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음반 매장을 운영했을 것이라고 밝혔다.[79]

1969년부터 1970년까지 몇개월 동안 커버곡들로 수록되어 저예산으로 작업된 컴필레이션 앨범이 영국에서 잠시 유행이었는데 이에 엘튼 존도 열풍에 따라 이런 구성의 앨범을 작업하면서 다수의 커버곡들을 녹음했다. 1969년 가을부터 1970년 여름까지 런던에서 동료 세션 뮤지션들과 무명의 세션들과 "Cotton Fields", "United We Stand", "I Can't Tell The Bottom From The Top"[80], "In The Summertime", "Come And Get It" 등의 유명한 히트곡들을 몇 개월간 녹음했는데 결국 발매가 취소되었고 사반세기나 지나고 나서 1994년에 Chartbusters Go Pop로 뒤늦게 발매되었다.

1969년 봄부터 가을까지 엘튼 존의 부모님이 거주하던 런던 노스우드 힐에 위치하던 8가구 아파트에서 지내면서 1년 내내 수많은 곡들을 작곡했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서로의 음악적인 역량이 더욱 세밀해지기 시작했고 곡을 작곡하고 가사를 작사하는 방식도 전보다 제대로 확립하게 되었다.[81]

당시 버니 토핀은 안방에서 가사를 썼고 엘튼 존은 거실에 있는 업라이트 피아노에 앉아서 그의 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작사를 마친 버니 토핀이 거실에 있는 엘튼 존에게 가사를 전달했고 엘튼 존은 가사를 보면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10~20분 만에 곡을 작곡했다. 한 곡이 완성되면 버니 토핀은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새 가사를 쓰기 시작하는 이런 방식으로 1년 동안 50곡에 달하는 수많은 곡들을 썼다.[82] 1975년 9집 Captain Fantastic And The Brown Dirt Cowboy의 8번 트랙 "Writing"은 이 때를 기점으로 더욱 확연히 알게 된 서로의 작사/작곡 방식을 묘사한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엘튼 존과 버니 토핀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게 된 계기가 1969년 10월 27일에 생겼다. 당일 오전, 20분 만에 작곡된 Your Song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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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생 당시에는 미들섹스 주에 속한 런던권 위성도시였으나, 1965년에 그레이터 런던으로 편입되었다. [2] 엘튼 존 공식 웹사이트의 '경력' 페이지 [3] Tin Pan Alley: The Rise of Elton John [4] ELTON JOHN 17 페이지 [5] ELTON JOHN, 17 페이지 [6] 당시 영국의 라디오와 방송에서 가수, 합창단의 반주를 맡아서 연주했던 밴드 [7] ELTON JOHN, 17~18 페이지 [8] ELTON JOHN, 17~18 페이지 [9] 위키트리 사이트의 에드윈 드와이트 문서 [10] 엘튼 존 공식 웹사이트의 '경력' 페이지 [11] Elton or Elton John [12] ELTON JOHN, 18 페이지 [13] 1950년대 유행하던 재즈와 포크가 혼합된 형태의 장르. [14] ELTON JOHN, 19~20 페이지 [15] ELTON JOHN, 20 페이지 [16] His Song: The Musical Journey of Elton John, Elton or Elton John [17] ELTON JOHN, 24~26 페이지 [18] ELTON JOHN, 26 페이지 [19] Pinner: Where Elton John was Born [20] ELTON JOHN, 25~26 페이지 [21] 스탠리 드와이트 가족 관계 [22] ELTON JOHN, 27 페이지 [23] ELTON JOHN, 27 페이지 [24] Elton John's Teenage Home; Where early Elton John songs were written; Inspiration for the 1975 song "Writing" [25] Pinner: Where Elton John was Born [26] RAM은 미국의 줄리어드, 독일의 베를린 음악대학 등과 함께 세계 5대 음대로 꼽히기도 했다. [27] ELTON JOHN, 29 페이지 [28] His Song: The Musical Journey of Elton John [29] ELTON JOHN, 30 페이지 [30] 이 곡을 부르지 않으면 손님들이 술잔을 던졌다. [31] ELTON JOHN, 33 페이지 [32] 리버풀 FC,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활동하던 축구선수 [33] ELTON JOHN 33 페이지, His Song: The Musical Journey of Elton John [34] 레지 드와이트의 첫 밴드, 콜벳스 [35] Elton John, 30 페이지 [36] More about Elton John [37] 영국의 록 밴드 <더 모킹버스>의 멤버로 소속한 적 있다. [38] ELTON JOHN, 31 페이지 [39] ELTON JOHN, 39 페이지 [40] 올뮤직의 블루솔로지 페이지 [41] ELTON JOHN, 31~32 페이지 [42] ELTON JOHN, 34 페이지 [43] ELTON JOHN, 44 페이지 [44] ELTON JOHN, 45 페이지 [45] 10년 뒤, 엘튼 존의 1975년 10집 Rock Of The Westies의 1번 트랙 "Yell Help/Wednesday Night/Ugly"에서 백 보컬을 맡았고 2005년에는 듀엣으로 Your Song을 불렀다. [46] ELTON JOHN, 54~55 페이지 [47] 롱 존 볼드리 웹사이트 [48] ELTON JOHN, 74 페이지 [49] 1947년생으로 엘튼 존과 동갑이다. 2010년대 근황 사진들을 보면 70대가 아니라 40~50대로 보일 정도의 엄청난 동안이다. [50] 1997년 10월 4일자 빌보드 [51] ELTON JOHN 57 페이지 [52] ELTON JOHN, 58 페이지 [53] ELTON JOHN, 72 페이지 [54] 웨스트 런던에 위치한 음악거리, 한국으로 치면 낙원상가와 비슷한 장소. [55] 딕 제임스는 본인의 이름을 딴 DJM(Dick James Music) 음반사의 대표자이자, 비틀즈의 음반사 'Northern Songs'의 社공동 대표자이다. 비틀즈 덕에 크게 성공했다가 결국 뒤돌아서 배신해버린 인물. [56] ELTON JOHN, 75 페이지 [57] 엘튼 존의 1972년 연대기, 증명사진 [58] Heritage Odyssey Music and Hollywood Memorabilia Auction Catalog 148 페이지 [59] 1940~6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하던 대중음악 작곡 그룹 [60] 30, 40대가 좋아하는 팝아티스트, 212 페이지 [61] ELTON JOHN, 80~81 페이지 [62] ELTON JOHN, 79 페이지 [63] 영어 위키피디아의 1969년 제14회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문서 [64] ELTON JOHN, 78~79 페이지 [65] ELTON JOHN, 81~82 페이지 [66] ELTON JOHN, 82 페이지 [67] ELTON JOHN, 83 페이지 [68] ELTON JOHN, 85 페이지 [69] 엘튼오그래피의 '피처링 참여' 페이지 [70] 엘튼오그래피의 '세션 뮤지션' 페이지 [71] 폴 매카트니의 동생 마이클 매카트니가 활동한 코미디 록 그룹. [72] ELTON JOHN, 86 페이지 [73] ELTON JOHN, 83 페이지 [74] 2001년 12월 29일 킹 크림슨 Q&A [75] Elton John and Bernie Taupin's Historic Songwriting Piano [76] Elton John's piano sells for $164,500 at auction [77] Elton John's white piano acquistion where he wrote music from his first 6 albums [78] 이 곡은 1970년 7월 3일에 발매되었다. [79] ELTON JOHN, 87 페이지 [80] 엘튼 존은 <더 홀리스> 원곡에서도 백 보컬을 맡았다. [81] ELTON JOHN, 94 페이지 [82] ELTON JOHN, 94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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