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1인칭 관찰자 시점 단편소설. 1921년에 쓰인 작품으로, 1922년에 《내셔널 아마추어(National Amateur)》라는 잡지에 실리면서 처음으로 발표되었다.서술자 '나'가 오제이유 가(Rue d'Auseil)라는 외딴 빈민촌의 하숙집에 세를 들었다가 밤마다 기괴하면서도 알 수 없는 광기와 에너지로 가득찬 음악을 연주하던 늙은 비올[1] 연주자인 에리히 잔(Erich Zann)과 만나게 되면서 벌어지는 미스테리한 일을 다루고 있다.
으스스하면서도 중독성이 있는 에리히 잔의 음악에 대한 묘사, 다락방의 창문을 통해 본 오제이유 가의 야경, 에리히 잔을 괴롭힌 정체 모를 무언가 등의 여러 요소가 기괴하면서도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또한 자기 작품을 평가하는 데 인색했던 러브크래프트가 우주에서 온 색채와 더불어 가장 만족스럽다고 자평한 소설이다. 러브크래프트가 추구하는 "미지의 공포"와 "음악"이라는 소재가 잘 섞여서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듯 하다.
그리고, 작품의 화자는 시각 보다는 청각, 즉 소리로써 지나간 기억과 현실을 전달하는데, 화자의 기억은 너무나 생생해서 쉽게 잊혀지지 않고, 너무 생경해서 공허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기억과 공포에 관련된 주제는 러브크래프트가 즐겨 다루는 내용 중 하나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오제이유 가는 러브크래프트 본인이 편지를 통해서 파리를 배경으로 했다고 밝혔지만[2], 가상적 공간에 작가 특유의 뉴잉글랜드 분위기를 사용했다는 관점에서 작품을 대하면 좋다고 한다.
2. 줄거리
이야기는 '나'가 과거에 모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하숙했던 빈민가인 오제이유 가(街)[3]와 그곳의 낡은 하숙집에 세들어 살며 겪은 일을 회상하면서 시작된다.하숙집의 4층 방을 쓰게 된 '나'는 첫날 밤부터 5층에서 들려오는 기괴한 음악을 듣고 푹 빠지게 되어 같은 하숙집 다락방에 기거하는 독일인 비올 연주자 '에리히 잔'에 대한 것을 집주인에게 듣게 된다. 노래에 푹 빠진 '나'는 천재적인 작곡가로 동경하게 되며 급기야는 복도를 가로막고 에리히 잔에게 연주를 요청하게 된다.
에리히 잔은 어딘가 모르게 무섭고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나'를 다락방에 초대해 신청곡도 묻지 않고 악보도 없이 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그의 연주에 도취되어 연주를 감상하던 '나'는 밤마다 들었던 그 기이한 음악을 들려줄 것을 청하며 이를 휘파람으로 불러 보지만, 잔은 갑자기 분노와 두려움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며 '나'의 입을 막으며 겁에 질린 눈으로 커튼 친 창가를 경계하는데, 이때 문득 다락방 창문으로 오제이유 가의 풍경을 전부 둘러볼 수 있다는 하숙집 주인의 말을 떠올린 '나'는 호기심에 다락방 창문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젖히려 했으나 에리히 잔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이를 거칠게 만류한다.
이에 '나'가 불쾌해 하며 다락방을 떠나려 하자, 에리히 잔은 그 자리에서 프랑스어로 쪽지를 써서 '나'에게 건네준다. 그 내용은 자신의 늙고 외로운 처지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져서 가끔 까닭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한다며 아까의 일은 사과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또한 '나'에게 자신의 음악을 들어주어 기쁘니 다시 찾아와 주기를 바라지만, 누구에게도 그 기괴한 음악은 들려줄 수 없으며 자신의 방에서 아무것도 손대지 말아달라는 부탁과, 추가비용은 본인이 낼테니 음악소리가 들리지 않는 아랫층 방으로 옮겨달라는 부탁을 건넨다.
'나'는 늙고 외로워 보이는 에리히 잔에게 동정심을 느껴 그의 부탁에 따라 3층으로 옮겨갔으나, 에리히 잔은 여전히 수상쩍은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처음에 방을 옮기는 비용을 내줘서 생긴 고마운 감정과 연민도 들었으나, 시간이지나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어 다시 음악을 듣지 말아달라는 그의 부탁을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이후로도 밤마다 몰래 윗층으로 올라가 열쇠 구멍에 귀를 대어 에리히 잔의 기괴하면서도 놀라운 연주를 훔쳐 듣게 된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에리히 잔의 연주는 더욱 더 격렬해져 갔고, 그에 비례하여 에리히 잔은 날마다 수척해져간다.
그러던 어느 날, '나'가 평소처럼 음악소리를 엿듣던 중, 에리히 잔의 비올 소리가 찢어질 듯 솟아오르더니 큰 소음과 함께 잔이 비명을 질러댔다. 놀란 '나'가 방문을 두드리자 잠시 기절했다 일어난 에리히 잔이 문을 열어준다. 에리히 잔은 어떤 소리가 나는지 확인하려는 듯 주변에 귀를 기울이는 등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는 "나를 괴롭히는 알 수 없는 현상에 대하여 독일어로 설명해주겠다"는 쪽지를 주고는 벌벌 떨며 정신없이 글을 쓰기 시작한다.
에리히 잔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 1시간 정도가 흘렀을 무렵, 갑자기 잔이 쇼크 증세를 보이기 시작하더니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로 커튼을 친 창가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나'가 자세히 귀를 기울여보니, 그 창가 너머 어딘가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 소리를 들은 에리히 잔은 갑자기 쓰던 글을 팽개치고 어떤 끔찍한 소리를 잠재우려는 듯 필사적으로 광기에 가득 찬 연주를 하기 시작한다. '나'의 말에 따르면 이 음악은 에리히 잔의 자작곡이 아닌 헝가리 무곡으로, 원 음악을 바로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로 너무 거칠게 편곡되었지만, 에리히 잔이 자작곡이 아닌 다른 작곡가의 음악을 연주한 것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상황이 다급했다는 상황으로 추측된다. 즉, 그 정체 모를 소리를 막기 위해 에리히 잔이 기괴한 음악을 계속 연주한 것이다.
미친듯이 연주를 하는 에리히 잔의 시선은 줄곧 창가를 향해 있었고, 창가 너머의 정체모를 음악소리는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그때 갑자기 돌풍이 몰아닥쳐 창가의 유리창이 깨지더니, 에리히 잔이 자신의 비밀을 잔뜩 적어놓은 종이가 모두 창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이때 급하게 그 비밀이 적힌 종이를 회수하려고 창밖으로 나갔으나, '나'가 다락방 창 밖의 야경을 바라보니, 창 밖의 풍경은 어떤 것도 보이지 않는, 끝없이 펼쳐진 어둠뿐이었다. 도시의 가로등 불빛이나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같은 허공을 오직 광기에 찬 음악소리만이 메우고 있었다. 어둠 속에 무엇인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느낀 '나'는 공포에 질린 채 연주를 계속하는 에리히 잔을 붙잡고 방을 빠져나가자고 소리쳤지만, 그는 차갑게 굳어 숨결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휑한 눈만 허공을 향해 있을 뿐이었고, '나'는 그대로 내달려 오제이유 가를 빠져나와 다시는 그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오늘날의 '나'는 오제이유 가를 다시 찾아가기 위해 대학교 인근의 주민들을 수소문하거나 지도를 뒤져보기도 했으나 사람들은 그런 곳은 아예 처음 듣는다고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지도에서도, 어디에서도 그 위치를 알 수 없었고, 에리히 잔이 죽기 전에 독일어로 적어 놓았던 비밀도 없어졌기에 끝내 알 수 없게 되었다.
3. 그 외에
러브크래프트가 남긴 소설 중에서도 우주에서 온 색채와 더불어 공포의 대상의 실체가 직접 등장하지 않는 작품이기도 하다. 에리히 잔을 괴롭혔던 그 알 수 없는 소리의 정체도, 그리고 그에 얽힌 사연도 잔이 남긴 쪽지가 날아가는 바람에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맥거핀으로 남게 된다.만화가인 알딘 바로자(Aldin Baroza)는 이 작품을 소재로 단편만화를 그렸는데, 배경은 현대로 옮겨갔으며 에리히 잔은 유대인 혈통으로 묘사된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유대인 수용소에 끌려간 잔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나치를 위해 부역해야 했는데,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괴로워하다가 자신의 앞에 강림한 니알라토텝과 계약을 맺어 아자토스의 힘을 불러내기 위해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는 음악을 따라서 연주하게 된다. 그러자 다른 세계에서 소환된 괴물들이 나타나 수용소를 파괴하고 나치들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후로 에리히 잔은 계약에 얽매인 몸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세상에 혼돈을 불러올 음악을 평생토록 연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80년대에 일어판을 중역하여 나온 책에선 <환상의 도시>라는 괴이한 제목을 붙였고, 에리히 잔을 에리히 투안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했던 바 있다. 더불어 이 중역판에선 프랑스 도시 이름을 오제이유라고 표기했었다.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책에서는 '에리히 짠의 음악'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Unspeakable Vault of Doom>에서는 그가 지내고 있는 방이 크툴루의 MP3 플레이어로 나온다.
1980년,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동명의 단편영화가 제작되기도 하였는데 검색해보면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 중에서는 그나마 원작에 충실한 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분량은 18분 정도이다.
2014년에도 22분 정도 단편 영화로 만들어졌지만 '나'가 창밖으로 본 심연을 생략해버렸다.
이 작품을 한국 배경으로 각색한 국산 독립영화 '조혜자의 음악'이 2012년에 제작되었다. 한국적으로 잘 현지화된 내용[5]과 효과적인 공포연출로 호평받았으며 러브크래프트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했다.
[1]
바이올린 또는
비올라라고 오역하거나 심지어 원어민조차 오해석하는 경우가 있으나, 비올은 별개의 악기이다. 작중 바이올린의 전신이라고 언급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계통의 악기이며, 삽화나 영상 등 2차 창작물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처럼 어깨로 지지하는 방식의 묘사와 달리
첼로처럼 앉아서 무릎 사이에 두고 연주한다. 또한 러브크래프트는 개인 서한에서 에리히 잔을 첼리스트라고 기술했다.
[2]
그러나 정작 러브크래프트는 생전 한 번도 프랑스에 가본 적이 없었다. 또한 러브크래프트 본인이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던
에드거 앨런 포도
모르그 가의 살인 사건에서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는
오귀스트 뒤팽이라는 인물을 그려냈지만 역시 프랑스에 가본 적은 평생 없었다고 한다.
[3]
도대체
지구에 있는 동네인지, 애초에 현실에 존재하기나 한 건지 의심스럽다. 건물이 노후화로 기울어져 맞은편 건물과 맞닿아 아치를 이루고, 주민은 대부분 노인들뿐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젊은이들이 모두 징병을 나가서 그렇다지만 여자들도 더 보기 힘들었기에 이상한 곳이었다.
[4]
Zahn 같은 철자로 적어야 더 자연스러운 독일 성씨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독일인 정체성을 갖고 있고 독일어를 쓰는 사람이라 해도 꼭 자연스러운 독일식 성씨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오스트리아 쪽에서 체코나 헝가리처럼 독일어권에 동화된 타민족 출신들이 그렇다.
[5]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비올을
해금으로 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