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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3 11:52:34

양칠성

야나가와 시치세이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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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칠성
梁七星
출생 1919년 5월 29일
일제 강점기 조선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리
(現 대한민국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삼례읍)
사망 1949년 8월 10일 (향년 30세)
네덜란드령 동인도 가룻 케르크호프
다른 이름 야나가와 시치세이 ([ruby(梁川七星, ruby=やながわ しちせい)])
코마루딘 (Komarudin)
소속 일본 제국 육군
인도네시아군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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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양칠성은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시기에 활약한 일본군 패잔병 출신의 한국인으로, 일본 육군에 자원입대해 죽을 때까지 일본인으로 살아간 친일반민족행위자였지만, 얄궂게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어 인도네시아 독립 영웅의 한 사람으로 역사에 남은 인물이다.

2. 생애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 출신으로,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한 뒤에 1942년에 일본 육군에 자원입대[1] 태평양 전쟁에 투입되어 패망 때까지 자와 섬 포로 수용소 감시원으로 있었다. 같은 조선 출신 수용소 감시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골수 친일파였던 것 같다. #

이 때 현지인과 결혼해 자식들을 두었고, 일본군 패망 이후에는 돌아가지 않고 인도네시아에 남아 Komarudin(인도네시아어로 빛)이라는 이름으로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가담해 네덜란드와 싸우다 잡혀 1949년에 함께 싸우던 일본 육군 패잔병 2명[2]과 함께 총살되었다. 이후 인도네시아군 고위 장성이 된 옛 동료들의 노력으로 1975년에 세상에 알려졌으며, 인도네시아 정부는 그를 외국인 독립 영웅으로 공인하였다. 양칠성은 현재 자카르타의 칼리비타 국립 묘지에 안장돼 있으며, 현재 그의 묘비에는 KOMARUDIN YANG CHIL SUNG, KOREA 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후손들은 자카르타 인근에 살고 있다.

여기에도 우여곡절이 있는데, 양칠성은 식솔들에게 자신이 조선 출신임을 밝히지 않고 일본인이라고만 알려줬기에, 인도네시아에서는 그를 일본인이라고 생각해서 이후 독립영웅으로 추서된 뒤에 일본의 유족에게 유골을 전달하고자 했으나, 야나가와 시치세이라는 일본인만 일본의 유족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그때 마침 일본에서 인도네시아에 와있던 일본의 역사학자 무라이 요시노리, 우쓰미 아이코 부부에게 야나가와 시치세이는 사실 한국인이라고 알려준 사람이 있었기에, 이들은 주인도네시아 일본대사관에 찾아가서 '자카르타에 남북한의 대사관이 다 있는데 왜 유족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지 않느냐'고 따졌지만, " 일일이 그런 거 하기 귀찮다."는 답만 돌아왔다고 한다. 이에 빡친 교수 부부가 나서서 야나가와 시치세이, 즉 조선인 양칠성의 존재를 유족에게 알려주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실제로 일본에 돌아온 뒤 교수 부부가 기고한 글을 읽은 양칠성의 조카를 찾아냈고, 동진회 모임에서 함께 지냈다는 동료들로부터 그의 고향이 전라북도 완주군이라는 것도 알아냈으며 1978년에 방한해 그곳을 찾아갔는데 그때 이미 양칠성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이 남아있어 양칠성이 인도네시아 영웅묘지에 묻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더니, 여동생도 "알려줘서 고맙기는 하지만 왜 좀더 일찍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오빠에 대해 자신은 아무 연락을 받지 못했고 죽은 줄도 몰랐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사실 전범 항목에서 일본 제국의 경우에 설명된 것처럼 양칠성과 같은 조선인 출신 일본군 군속들(B,C급 전범)에 경우는 일본과 남북한 모두에게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잊히다시피 한 경우가 많다.[3] 한국에서도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등 국가기관의 조사와 함께 현대에 들어서야 어느 정도씩 연구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추세.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보다 일본에서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에 대해 활발히 연구되었다. 이 분야의 전문가로 손꼽히는 사람이 일본의 우쓰미 아이코다. 관련 저서로 "적도에 묻히다",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등이 있다. "적도에 묻히다"는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 사건의 피해자로 알려진 김종익씨가 번역해서, 언론의 화제가 되기도 했었다.

3. 대중매체

1980년대에 양칠성을 소재로 가톨릭 어린이 잡지에 <영웅묘지의 꼬마루딘>이라는 소설이 연재되었고 1989년에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현재는 절판되었다. 단 이 소설은 역사적 사실과는 별 상관없이 거의 전적으로 작가의 창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씁쓸하지만, 당시 한반도 내의 조선인 청년들은 일본 육군 입대를 못해서 안달이었다. 양칠성도 56.5 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자원입대한 케이스였다. 이는 일제 강점기 치하에서의 극심한 차별을 면하기 위해, 그나마 출세의 가능성이라도 엿볼 수 있는 군인이나 법조인, 공무원을 지망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같은 예로 인종차별에 시달리다 못해 자원입대 후에 자청해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미국 흑인의 사례가 있다. [2] 상관이었던 아오키(靑木)와 하세가와(長谷川)로 양칠성에게 인도네시아 독립전쟁 참전을 권유한 인물들이었다고. [3] 애초에 이들 중에서는 자진해서 입대한 경우도 많았고 일부는 친일 성향을 가지기고 했다. 반일감정이 매우 심했던 시절에는 아예 일제 앞잡이 취급했을 정도. 지금도 다를 바 없지만 그 시절에는 매우 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