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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10:36:14

얀 코데시

파일:얀 코데시.jpg
얀 코데시
(Jan Kodeš)
생년월일 1946년 3월 1일 ([age(1946-03-01)]세)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프라하
국적
[[체코|
체코
체코슬로바키아
]][[틀:국기|
행정구
체코슬로바키아
]][[틀:국기|
속령
체코슬로바키아
]]
프로데뷔 1968년[1]
신장 175cm[2] 체중 81kg
사용 손 오른손 (원핸드 백핸드)
ATP 싱글 랭킹 최고 5위
ATP 더블 랭킹 최고 12위
단식 통산 성적 506승 285패(64.0%)
단식 타이틀 획득 10회[3]
복식 타이틀 획득 16회[4]
통산 상금 획득 $693,197

1. 개요2. 커리어3. 선수 소개4. 코데시의 윔블던 우승을 타 선수들의 우승과 동등하게 볼 수 있는가?5. 여담6. 참고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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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코 테니스 선수.

세계 랭킹 5위까지 기록했던 테니스선수로, 70년대 체코 테니스를 대표했던 인물이다. 공산주의의 지배를 받는 등 국가가 힘든 상황 속 자국 대회에서의 활약을 중심으로 굵직한 기록을 남기는 활약을 보이며 체코의 국민 영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2. 커리어


그랜드슬램 대회 : 우승 3회 / 준우승 2회
얀 코데시의 연도별 메이저대회 성적표
연도 호주 프랑스 윔블던 US
1966 불참 2라운드 1라운드 불참
1967 불참 4라운드 1라운드 불참
1968 불참 1라운드 1라운드 불참
1969 불참 4라운드 2라운드 2라운드
1970 불참 우승 1라운드 불참
1971 불참 우승 1라운드 준우승
1972 불참 8강 4강 2라운드
1973 불참 8강 우승 준우승
1974 불참 4라운드 8강 4라운드
1975 불참 4라운드 2라운드 4라운드
1976 불참 3라운드 불참 8강
1977 불참 4라운드 1라운드 3라운드
1978 불참 3라운드 1라운드 불참
1979 불참 2라운드 1라운드 2라운드
1980 불참 2라운드 2라운드 불참
1980 불참 1라운드 1라운드 불참

기타 대회
* 마스터스 컵[6]: RR 4회(1970-1973)
* WCT 파이널스[7]: 4강(1974)
* 데이비스 컵: 우승 1회(1980)

3. 선수 소개


16년간 획득한 10회의 타이틀 중 무려 그랜드슬램 우승 3회를 기록할만큼 중요한 순간에 큰힘을 발휘했던 클러치플레이어.

통산 508승, 그랜드슬램 대회 남자 단식 우승 3회, 준우승 2회, 4강 진출 1회를 기록한 체코 출신의 테니스 레전드로, 은퇴 즈음 데뷔한 후배 이반 렌들과 더불어 1970-80년대 체코 테니스를 세계 강국으로 이끌었다.

통산 승률이 64.0%로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는 아니지만 클레이 코트에서 69.8%의 승률을, 잔디 코트에서 64.2%의 승률을 기록하는 등 주요 코트에서 편차 없는 모습을 보이며 롤랑 가로스(테니스 대회) 윔블던(테니스 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기록을 달성하였다.[8] 이는 동시대 미국을 대표하는 선수였던 지미 코너스 아서 애시, 루마니아의 테니스 전설 일리에 너스타세, 호주의 테니스 전설 존 뉴컴 켄 로즈웰 그리고 자국 후배이자 80년대 테니스 전설로 불리는 이반 렌들 등 수 많은 스타들 조차 달성하지 못한 기록이며 오픈시대 이후로는 얀 코데시를 포함하여 로드 레이버, 비에른 보리, 안드레 애거시, 로저 페더러, 라파엘 나달, 노박 조코비치, 카를로스 알카라스 등 8명이, 오픈 시대 이전을 포함하더라도 14명[9] 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그는 그와 동시대 선수인 일리에 너스타세, 마누엘 오란테스, 아서 애시, 아드리아노 파나타 등과 호각을 펼쳤으며, 그랜드슬램 단식 타이틀 3개를 포함하여 ATP 단식 타이틀 10회, 준우승 21회, 복식 우승 16회, 준우승 24회 등을 기록한 커리어를 인정 받아 1990년 국제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4. 코데시의 윔블던 우승을 타 선수들의 우승과 동등하게 볼 수 있는가?


얀 코데시는 1970년, 1971년 프랑스 오픈을 우승하며 체코를 대표하는 것은 물론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테니스 선수로 거듭났다. 더군다나 1973년 윔블던 우승을 기록하여 테니스 역사상 14명밖에 달성하지 못한 프랑스 오픈과 윔블던 모두 챔피언을 달성한 인물이 되었다. 하지만 코데시의 이 기록 중 윔블던 우승에 관해서는 의견이 많이 갈린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973년 윔블던을 앞두고 유고슬라비아를 대표하던 테니스 선수 니콜라 필리치[10] 데이비스 컵 동점 상황 중 경기 출전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10개월 선수 자격 정지라는 징계를 받게 되었다. 물론 ILTF[11]의 도움으로 9개월을 줄인 1개월 정지로 징계를 최소화하였지만 당시 막 생겼던 남자 테니스 노조인 프로 테니스 협회 ATP의 선수들은 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필리치가 경쟁할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경쟁해서는 안된다."라는 슬로건 하에 윔블던 출전을 단체 보이콧하였다. 실제로 1972년 윔블던 우승자였던 스탠 스미스를 필두로 81명의 상위 랭커들이 당해 윔블던에 출전하지 않으며 유고슬라비아 테니스 협회의 부당한 징계에 항의하였다. 이로 인해 상위 16명의 시드 중 오직 4명만이 참가하였으며, 당장 6번 시드가 훗날 전설로 거듭나게 되는 비에른 보리였는데 당시 보리는 세계 30위권 중후반 정도에 머물고 있는 유망주였을 정도로 상위 시드라고 부르기 민망한 랭킹의 선수들이 시드를 받은 상태로 1973년 윔블던이 개최되었다. 참고로 코데시는 세계 15위의 선수였는데 2번 시드를 받았고, 1번 시드는 ATP의 보이콧을 무시한 체 대회에 참가했던 일리에 너스타세였다.[12]

이러한 열약한 참가 선수층 사이에서 유일하게 자신보다 시드가 높았던 일리에 너스타세가 하위 라운드에서 일찍이 패함에 따라 코데시의 상대는 마땅하지 않았다. 당장 8강에서 만난 비제이 암리트라지는 당시 세계 50위권이였고, 그와 경기하기 전까지 만났던 128강, 64강, 32강, 16강 선수들은 모두 기존 선수들의 부재에 의한 럭키 루저 혹은 예선 진출자였을 정도로 편한 대진운을 받았다. 4강에서 만난 로저 테일러가 세계 16위로 가장 높은 순위였는데 그를 5세트 풀접전(89 97 57 64 75) 끝에 간신히 제압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에서는 4번 시드였던 알렉스 미터벨리[13]와 경기를 펼쳤는데 미터벨리는 이미 전성기가 저물고 있었고 또 세계 30위권에 머물 정도로 정체되어 있던 상황이였다. 더군다나 32강부터는 기존 참가 자격이 있던 선수들을 만났고 8강에서는 지미 코너스를, 4강에서는 세계 1위 일리에 너스타세를 압도하며 제대로 물이 올랐던 샌디 메이어와 경기를 펼치는 등 체력적으로도 손해가 큰 상황이였다. 이런 미터벨리를 코다시는 3-0(61 98 63)으로 가볍게 제압하며 우승을 기록할 수 있었다.

실제로 수많은 럭키루저들의 양산과 상위 16위 시드 중 1위, 15위, 16위 그리고 시딩 리스트 13위였던 미터벨리[14] 위 이렇게 4명만이 참가한 상황 속에서 복합적인 운이 따라줬다는 점에 의해 코다시의 우승이 조금은 낮게 평가되는 경향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이와는 별개로 대회 전 보이콧이라는 큰 이슈가 발생했던 덕에 300,172명의 관중이 이를 관람하며 윔블던 역사상 2번째로 높은 관중수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5. 여담

6. 참고 링크



[1] 아마추어 데뷔는 1966년 [2] 5 ft 9 in [3] ATP 미인정 타이틀까지 포함하면 11개,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총 25회 우승했다고 적혀있다. [4] ATP 미인정 타이틀까지 포함하면 17개,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총 32회 우승했다고 적혀있다. [5] 16년간의 긴 커리어 동안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6] 현재는 ATP 파이널스라 불린다. [7] 1971년부터 1989년까지 19년간 개최되었다. [8] 이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이들도 소수 존재한다. 이는 후술하도록 하겠다. [9] 오픈 시대 이전에 달성한 6명: 르네 라코스테, 앙리 코셰, 돈 버지, 프레드 페리, 루 이드, 토니 트래버트 [10] 당장 이 시기 프랑스 오픈 준우승을 기록하며 세계 6위에 랭크되어있었고, 이뿐만 아니라 1970년 US 오픈 복식 부분에서 로드 레이버와 로이 에머슨 듀오를 제압하여 우승을 차지했던 30대 중반의 베테랑 선수였다. [11] 현재는 ITF [12] 너스타세는 당시 군복무 중이였기에 상위 간부들의 압박에 어쩔 수 없이 대회에 참가하였고 보이콧에 동참하는 의미로 16강에서 탈락했다고 주장했으나, 16강에서 그를 쓰러뜨린 샌디 메이어에게 실력으로 패했다는 의견이 중론이 되어 벌금을 내었다. [13] 소련과 조지아 이중국적의 선수로 1974년 세계 9위까지 기록하였다. 오픈 시대 이전 주로 활약했던 선수로 ATP 인정 타이틀 9개, 비인정 타이틀 53개를 기록하였다. [14] 미터벨리의 세계 랭킹은 이정도로 높지 않았다. 하지만 이 당시 시드를 주는 시딩리스트는 단순히 랭킹 뿐만 아니라 선수의 명성과 평판, 지난해 그랜드슬램 성적 등을 주관적으로 평가하여 제공했었고, 그로 인해 낮은 랭킹에도 불구하고 1972년 8강 진출자의 자격으로 높은 시드를 받았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