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Jacob Burckhardt |
|
본명 |
칼 야콥 크리스토프 부르크하르트 Carl Jacob Christoph Burckhardt |
출생 | 1818년 5월 25일 |
스위스 바젤 | |
사망 | 1897년 8월 8일 (향년 79세) |
스위스 바젤 | |
국적 |
[[스위스| ]][[틀:국기| ]][[틀:국기| ]] |
모교 | 본 대학교 |
경력 | 바젤 대학교 교수 |
분야 | 문화사가, 미술사가 |
[clearfix]
1. 개요
스위스의 미술사와 문화사를 연구한 역사가로, 각 분야의 역사학 연구에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그는 문화사의 중요한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학계가 문화의 역사를 생각하고 연구한 방식은 매우 다양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지크프리트 기디온(Siegfried Giedion)은 부르크하르트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발견자로서 그는 어떻게 시대를 온전히 다뤄야 하는지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회화와 조각, 건축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사회적 제도를 같이 고려함으로써 말이다."부르크하르트의 대표적인 저작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Die K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 1860)이다.
2. 생애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부르크하르트는 1839년 그가 종교적 신앙심을 잃을 때까지 바젤과 뇌샤텔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이후 그는 베를린 대학교로 옮겨 역사학, 특히 새로운 분야인 미술사를 공부하였다. 베를린에서 그는 레오폴트 폰 랑케(Leopold von Ranke)의 강의에 출석하였는데, 랑케는 역사가의 의견보다 사료와 기록에 의거한 상당한 학문적인 훈련으로서의 역사를 제창한 사람이다. 그는 1841년 본 대학교에서 미술사학자인 프란츠 쿠글러(Franz Kugler) 밑에서 공부하였는데, 부르크하르트는 쿠글러에게 자신의 첫 번째 책인 《벨기에 도시들의 미술작품》(Die Kunstwerke der belgischen Städte)을 헌정하였다. 1843년에서 1855년까지 바젤 대학교에서 강의한 이후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ETH Zürich)에서 강의하였다. 다시 1858년에 바젤 대학교로 되돌아가서는 1893년 은퇴하기까지 그 곳의 교수직을 맡았다. 1886년이 되어서야 오로지 미술사만을 강의하였다. 그는 두번이나 독일 대학들의 교수직 요청을 거절하였는데, 1867년의 튀빙겐 대학교와 1872년 베를린 대학교의 랑케가 있던 교수직이었다.3. 저서
부르크하르트의 역사에 관한 저술은 그 자체로 문어적인 가치가 있으며, 이 저술은 미술사를 하나의 학문으로 정착시켰다. 그의 역사 연구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기초가 되는 사회적, 정치적 경향을 분석할 때에 예술과 문화, 미적 표현의 가치를 강조했다. 그의 역사 연구에 대한 접근은 당시의 인간의 예술, 문화와 미적/사회적 존재를 강조했다. 그리고 역사가로서 그는 당시에 유행한, 지배적인 (사회과학을 포함한) 과학적 담론이었던 역사의 해석으로서의 경제지상주의와 실증주의인 헤겔주의의 해석에 반대했다.1838년 그는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여행하여 'Bemerkungen über schweizerische Kathedralen'(스위스 성당에 대한 고찰)이라는 저술을 출판한다. 1847년 그는 쿠글러의 두 저작인 'Geschichte der Malerei'(회화의 역사)와 'Kunstgeschichte'(미술사)를 접하고, 1853년에 자신의 저술인 《 콘스탄티누스 대제 시대 (Die Zeit Konstantins des Grossen)》 를 출판했다. 그는 1853년에서 1854년의 상당 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내면서 1855년에 쓴 쿠글러에게 헌정한 자신의 저서인 'Der Cicerone: Eine Anleitung zum Genuss der Kunstwerke Italiens'(이탈리아 예술을 즐기기 위한 안내서)의 자료를 수집하였다. 이 책은 당시까지 쓰인 여행서 중 가장 자세한[4] 것으로, 조각과 건축, 회화를 다루었으며, 이탈리아로 예술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될 안내서가 되었다.
이 책의 초판의 절반 가량은 르네상스 예술에 대하여 다루고 있었다. 부르크하르트는 자연스럽게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 (Die Cultur der Renaissance in Italien)》(1860)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역사 (Geschichte der Renaissance in Italien)》(1867)라는 두 권의 자신의 가장 유명한 책을 쓰게 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문화"는 19세기에 쓰인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이었으며 현재까지도 널리 읽히고 있다. 부르크하르트와 독일 역사가인 게오르크 포이크트(Georg Voigt)는 르네상스에 대한 역사적 연구를 확립하였다. 초기 이탈리아 인문주의로 자신의 연구를 제한한 포이크트와는 대조적으로,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 사회의 모든 면을 다루었다.
부르크하르트는 고대사 연구가 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고, 그리스 문명의 학자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그리스인과 그리스 문명에 대한 강의를 1872년에 시작하여 1885년까지 진행하였다. 죽을때까지 그는 4권의 그리스 문명 연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 책은 그의 사후 《그리스 문화사 (Griechische Kulturgeschichte)》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1869년 24세의 나이로 바젤 대학교의 고전 철학 교수로 임명된 프리드리히 니체는 부르크하르트를 칭찬하였고, 그의 강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부르크하르트와 니체는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후기 사상의 찬미자였다. 니체는 부르크하르트가 그리스 문화를 "아폴로"적인 경향과 "디오니소스"적인 경향의 대립으로 정의한 자신의 《비극의 탄생》이라는 논문에 동의할 것으로 믿었다. 부르크하르트는 니체의 철학 전개에는 거리를 두려고 하였으나, 그럼에도 니체와 부르크하르트는 수년간 동조 관계를 가지면서 즐겁게 지냈다. 부르크하르트의 제자인 하인리히 뵐플린(Heinrich Wölfflin)은 불과 28세의 나이로 바젤 대학교의 교수 자리를 물려받았다.
부르크하르크의 외적 인격에는 현명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연구자로서의 면과 내각을 위해 광범위하게 연구한 스위스 칼뱅주의적인 주의깊은 면 사이에 흥미로운 긴장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삶 대부분을 보낸 스위스는 19세기 유럽의 평균에 비해 대체로 민주적이고 안정적이었다. 스위스인으로서, 부르크하르트는 독일 민족주의와 독일이 문화적,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주장에 냉담하였다. 그는 또한 급속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당시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여, 산업 혁명과 유럽의 정치적 격변, 점점 늘어나는 유럽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에 대하여 자신의 강의와 저술을 통해 의견을 말하였다. 그는 폭력적인 선동 정치가가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게 될 20세기의 극심한 격변기에 대해 충분히 예견하였다. 때문에 부르크하르트는 문명의 발전으로 개인이 부품화 되는 것을 우려하였고, 그로 인한 정치적-사회적 무관심으로 독재자의 출현을 우려하였다. 그리고 그 우려는 독일에서 현실이 되었다. 말년에 부르크하르트는 민주주의, 개인주의, 사회주의와 그 외에 당시에 유행한 여러가지 사상들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예술사 평론 《루벤스의 그림과 생애 Erinnerungen aus Rubens》(1898)와 《이탈리아 예술사에 대하여 Beiträge zur Kunstgeschichte von Italien》(1898)가 그의 사후 친구들에 의해 편집·출판되었다.
4. 개인주의
부르크하르트를 르네상스의 속성을 정의한 역사가라는 인식으로 그치기 쉽지만,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의 토대가 근대 시점에서 어떻게 등장하고 중요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업적이 있다.부르크하르트는 19세기 근대에서 가장 선진적인 사회 문화를 갖췄던 스위스에서 관조적으로도 또 여러 국가들간의 명징한 차이들을 직접 찾아다니면서 체험하면서 서술했다.
세계 최초의 근대 국가를 피렌체 공화국을 꼽았는데, 그 이유를 개인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이라고 답했다. 이러한 관점은 과거의 역사가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인간의 재능과 본성이 개인적인 개성으로 표현될 때 만능인 (l'uomo universale)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개성들은 신앙심, 선입견, 민족, 국가, 집단을 위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업적과 명성을 최대화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르네상스의 핵심이 중세의 고루함을 벗어나고 고전의 장점들을 취하는 것이나 세속화를 중심적으로 관찰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의 핵심이란 고전을 취하든 무언가를 다시 찾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성을 발현하고 로마 공화정을 닮은 합의에 따른 정치 제도를 구성하며 새로운 항로와 지역을 개척하며 자연과학적 이해의 확장이 르네상스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피렌체는 또한 메디치 가문과 엮이면서 기독교를 채택한 모든 국가들과 무역망을 독점하면서, 광대한 무역망을 합법적이고 정기적으로 활용하며 그러한 무역망을 통해서 국가의 산업과 정체성이 결정되는 근대적 국가와 역사상 처음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현대 시대의 지금의 시각으로서는 활발한 무역이 당연한 개념이지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근대 말기에 까지도 상업적으로 다수의 국가와 무역을 합법적으로 그리고 정기적으로 하는 국가는 매우 소수였다.
특히나, 피렌체는 작은 도시 국가의 특성상 군사적 목적이나 식민지 개척 등의 목적은 전혀 배제된 채로 활발한 무역을 했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매우 넓은 시야를 갖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 세계 어디에도 개인의 역량을 중시하는 철학이나 개념 자체가 없었으며, 압도적으로 개인보다 집단을 중요시 하는게 당연한 시대였기 때문에 당시 피렌체에서는 각자 알아서 견문을 넓히고 성장하면서 위인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다.
실제로 르네상스가 있었다고 해서, 별도의 르네상스 학문 또는 철학이라는 개념은 르네상스 시기 자체에는 없었다. 여전히 중세 기독교의 세계관 속에서 살았으며, 수많은 부조리함과 악습들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일대에는 다빈치를 비롯한 초월적인 업적을 이룬 개인들이 다른 지역에 비해서 더 빈번하게 출현했다.
심지어 르네상스 시기 당시의 사람들은 개인에 대해 주목하는 개념 또한 존재하지 않았지만, 공교롭게도 정치제도와 사회문화 그리고 시대적 이해관계가 적극적으로 개인을 위한 환경으로 구성되었던 세계 최초의 공간이 피렌체 공화국이었던 것이다.
5. 르네상스와 부르크하르트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상스가 근대의 시작이며, 중세로부터 벗어나는 계기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르네상스관은 후대 역사가들의 논쟁거리가 된다. '20세기의 부르크하르트' 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부르크하르트랑 유사한 면이 많은 요한 하위징아는 르네상스가 중세의 가을, 즉 중세의 연장이라고 주장하면서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을 비판한다. 현재 서구 학계에서는 르네상스에 대해 하위징아와 비슷하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부르크하르트의 르네상스관을 계승하는 경우도 있다.* 참고 : 부르크하르트 문화사의 새로운 신화를 만들다, 최성철, 한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