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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01:00:41

앙리 샤리에르


<colbgcolor=#ddd,#000><colcolor=#000,#ddd> 앙리 안토닌 샤리에르
Henri Antonin Charrière
파일:henri-charrière-portrait.jpg
출생 1906년 11월 16일
프랑스 제3공화국 아르데슈 상테젠데리그다제
사망 1973년 7월 29일 (향년 66세)
스페인국 마드리드
국적
[[프랑스|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랑스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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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직업 소설가, 영화배우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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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소설가, 영화배우.

2. 생애

1906년 남부 프랑스에서 교사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10살에 모친을 여의고 고아가 되었다. 1925년에 프랑스 해군에 입대하여 3년간 복무했는데 이 시기 가슴에 나비 문신을 했다. 이후 1927년 파리에 정착해 삼류 깡패 생활을 하면서 좀도둑과 금고털이범으로 살았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포주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고도 한다. 1931년, 샤리에르는 롤랑 르그랑이라는 이름의 몽마르트르 지역의 돼지 도살업자이자 포주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결백을 주장하였으나 종신형과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프랑스는 정치범이든 잡범이든, 중범죄인이든 상관없이 8년 이상의 형을 받으면 프랑스 외부로 유배되었다.

1933년 프랑스 서북부의 깡(Caen) 구치소에서 출발해 배에 태워져 프랑스령 기아나로 보내졌다. 배 안에서 전직 은행가인 위조범 루이 드가와 친구가 되어 드가가 용기 안에 돈을 넣고 항문 속에 숨겨놓은 것을 다른 죄수들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보호해준다.[1] 프랑스령 기아나의 감옥에서 샤리에르는 조안 클루지오(Joanes Clousiot)와 앙드레 마튜레트(Andre Maturette)라는 두 명의 동료 죄수를 만난다. 세 명은 1933년 작은 보트를 이용해 생로랑 감옥에서 탈출한다. 5주 이상 거의 2천 마일을 항해하여 콜롬비아 북부 Riohacha 근처에 도달하지만 콜롬비아 경찰에 잡혀 수감된다. 하지만 어느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밤에 샤리에르는 홀로 다시 그곳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콜롬비아 북부의 Guajira 반도에 도착하여 해변에서 진주 채취를 주업으로 하는 한 부족에게 받아들여져 같이 지내게 된다.

그곳에서 두 명의 부족 여성과 결혼하고 두 아내들이 동시에 임신까지 하는 천국같은 생활을 보내지만 몇 달후 샤리에르는 무고한 자신을 모함한 자들의 복수를 위해 다시 움직여야겠다고 결심하고 부족마을을 떠나는데(샤리에르는 이 결정을 매우 후회했다고 뒤에 말하고 있다.) 곧 다시 체포되어 콜롬비아 감옥에 갇히고 그곳에서 클루지오와 마튜레트를 만난다. 결국 다시 프랑스령 기아나로 되돌려보내지고 세 명 모두 각자 2년 동안 독방 감금 생활을 하게 된다. 독방 감금에서 풀려난 후 감옥에서 7년을 더 보내는 동안 수 차례 더 탈옥 시도를 하지만 전부 실패한다. 악마의 섬이라는 악명높은 감옥섬에 갇힌 후 1941년 샤리에르는 악마의 섬의 높은 절벽에서 던진 코코넛 주머니들이 일곱 번째 파도마다 강력한 해류의 힘을 받아 육지쪽으로 세게 떠내려간다는 발견하고 코코넛 주머니를 이용한 뗏목을 타고 또 다른 한 명의 죄수 실뱅(Sylvain)과 함께 악마의 섬 탈출을 시도해 성공한다. 프랑스령 기아나에 온 이후로 여덟번째 만에 성공하였다. 며칠을 표류하여 육지에 도달하지만 실뱅은 퀵샌드(quicksand)에 빠져 익사하고 만다. 샤리에르는 그곳에서 탈옥하여 움막을 짓고 지내던 퀵퀵(CUic Cuic)이란 자를 만나 같이 보트를 사서 브리티시 기아나(현재의 가이아나)의 조지타운에 도달한다.

그곳에서 1년을 보낸 후 또다른 탈옥 죄수들과 함께 새 보트를 사서 브리티시 온두라스(현재의 벨리즈)를 목적지로 하고 항해하다 사이클론을 만나 베네수엘라에 도착하게 된다. 베네수엘라 감옥에서 일 년을 보낸 샤리에르는 1944년 석방되어 베네수엘라에서 바텐더, 레스토랑 주인, 나이트클럽 매니저 등의 일로 생계를 유지한다. 1956년 베네수엘라 시민권을 얻게 된다. 1968년에 자전소설 ' 빠삐용'을 몇 달에 걸쳐 쓴 후 출판하고 즉시 베스트셀러가 된다. 스페인으로 거처를 옮기고 지내던 중 1973년 후두암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뜻에 따라 프랑스의 자기 고향 마을에 묻혔다.


[1] 루이 드가는 샤리에르가 책을 쓰면서 내러티브를 위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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