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2년
스페인의 에스트레마두라 지방에 있는 도시인 헤레스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1528년에
판필로 데나르바에스의 탐험대에 가담하여 그의 부관이자 재무 및 군기 담당이 되었다.
탐험 도중에
바스코 포르카이예에게 물자와 군수품을 받기 위해 석궁대 부대장인 판토하를 보냈을 때 그가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뒤를 따라서 산티 스피리투스(지금의 트리니다드) 항구에서 대기하다가 폭풍우가 올 것을 생각해서 마을로 향했다. 자신을 포함하여 육지에 상륙한 30여명을 제외하고 폭풍우 때문에 마을에 가는 것을 반대하여 그를 따라오지 않고 배에 남아있던 자들은 모두 죽었으며, 뒤늦게 나르바에스가 도착하자 시구아(지금의 씨엔푸에고) 항구에서 군수품을 보충하면서 2월 20일까지 머물렀다.
4월 22일에
플로리다에 도착하여 황금의 도시인 아팔라첸[1]을 찾기 위해 탐험했지만 아팔라첸으로 착각한 작은 마을을 공격해서 그 곳의 여자들과 아이들을 쫓아내면서 물건들을 약탈했다가 사냥을 하고 돌아온 분노한 원주민의 공격을 받아 크게 부상을 입고 도망쳤으며, 원주민들이 계속 공격해 열병에 걸렸다. 또한 탐험대의 식량이 떨어지면서 바다를 항해하려고 했지만 배를 만드는 기술이 없어서 셔츠와 속옷을 이용하여 돛을 세우는 등 갖은 고초를 겪었으며, 배를 타고 탐험하다가
미시시피 강 유역에서 역류를 만나는 바람에 나르바에스가 이끄는 탐험대와 헤어지게 되어
멕시코 만으로 떠내려간다.
그러다가 또다시 폭풍우를 만나서 자신의 대원 중에 60여명이 죽었으며, 1528년 9월에 오늘날 텍사스 주 갤버스틴 시에서 떨어진 섬에 해당하는 곳에 도착하게 되어 그 곳을 불운의 땅이라 명명했다. 그 곳에 사는 원주민인 코코족(카호크족)이 자신들을 보살펴주어 그들과 생활하였지만 그 섬의 식량이 떨어졌으며, 그들과 함께 유랑 생활을 하여 식물을 캐는 일을 하는 등 궁핍한 생활을 보냈다.
그 와중에 대원들이 흩어져서 생활해 이후 카루코스족에게 가서 생활했으며, 1529년 봄에는 자신과 함께 다닌 대원들 중에 15명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결국 자신과 함께 다닌 대원들은 단 3명만 살아남았으며, 이들과 여러 부족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멕시코 북부를 침입한
스페인의 다른 콩키스타도르와 만나서 구출되어 8년 만에
스페인에 귀환했다.
1542년에 자신이 겪은 것을 토대로 <조난 일기>를 저술하면서 그 뒤에는 리오데라플라타의 총독에 임명되어 1541년 11월부터 1542년 3월까지 지금의 브라질의 산토스에서 파라과이의 아순시온에 이르는 통로를 개척했으며, 이 과정에서 1541년에 지금의 이과수(이구아수) 폭포를 발견하여 살토데산타마리아라 명명하였다. 그러나
도밍고 마르티네스 데이랄라가 반란을 일으켜 총독 자리에 쫓겨나고 1545년에는 스페인으로 압송되어 관직을 이용한 부정행위로 아프리카에 추방되었으며, 1555년에는 산토스에서 아순시온까지 간 여행을 토대로 <보고와 해설 La Relacion>이라는 지리학서를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