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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28 02:11:19

알레만디 스캔들

파일:1926-27 Torino FC.jpg

1. 개요2. 진행
2.1. 발단2.2. 배경2.3. 음모
3. 결과4. 수수께끼5.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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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첫 대규모 스캔들.[1]

2. 진행[2]

2.1. 발단

1927년, 토리노의 여름은 찌는 듯이 더웠지만 스쿠데토의 경쟁은 토리노 FC의 우승으로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분위기였다. 이때 토리노에는 로마에서 온 레나토 페르미넬리라는 기자가 있었는데 그는 로마로 하나의 기사를 보내고 있었다. 기사의 제목은 셰익스피어 햄릿에서 등장하는 유명한 글귀를 패러디한 "이탈리아 축구에서는 무언가 썩었다"였는데[3] 그의 기자 생활에서 가장 큰 기사였으며 이탈리아 축구 역사상 첫 대형 스캔들이자 치부였다.

사실 페르미넬리가 이 취재거리를 발견한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였다. 그는 당시 토리노의 한 작은 호텔방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근처의 투숙객 중 한 명이 바로 유벤투스 국가대표팀 풀백인 루이지 알레만디였고, 그의 대화가 근처의 투숙객 페르미넬리에게 들릴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2.2. 배경

1926년은 이탈리아 축구 역사에 있어 중요한 한 해였다. 파시스트 정권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탈리아 전체를 아우르는 리그가 드디어 창설되었고, 이를 디비시오네 나치오날레라 불렀다.[4] 20개의 팀이 2조로 나뉘었고 각 조에서 상위 3팀씩 6개의 팀이 최종 우승을 위한 파이널 리그에 선발되었다.

리그가 진행되면서 유벤투스, 인테르, 제노아, 토리노, 볼로냐, AC 밀란 6개 팀 중 토리노와 볼로냐의 2파전으로 압축되어갔고, 토리노가 더 앞서나가는 형국이었다. 당시 토리노는 아돌포 발론체리, 훌리오 리보나티, 지노 로세티 등 훌륭한 공격수들이 많았고, 볼로냐에도 안젤로 스키아비오, 에랄도 몬첼리오 등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있었다.

1927년 5월 15일, 토리노와 볼로냐의 5라운드 경기. 당시 4라운드까지 토리노와 볼로냐는 승점 6점으로 공동 1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 시합은 정말 중요했다. 그리고 토리노는 이 시합에서 1대0으로 승리를 거둔다. 여기에서 볼로냐의 골이 취소되기도 했지만 많은 관중들은 그에 대해 정당한 판정이었다고 판단했으며 불씨는 6월 5일의 두 번째 데르비 델라 몰레로 넘어갔다.[5]

2.3. 음모

하지만 이 시즌의 첫 데르비 델라 몰레에서는 유벤투스가 승리를 거두었고 6라운드까지 토리노는 이 경기를 제외하면 전승을 거둔 상태였다. 그리고 당시 토리노의 회장이었던 엔리코 마로네 신자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경기를 잡기를 바랐다. 그리고 유벤투스의 회장이었던 에도아르도 아녤리와 저녁을 먹으며 결과에 대해 내기를 했다. 한편 신자노의 집행부 중 나니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 시합이 승리에 굶주린 회장의 눈에 들어갈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시칠리아의 공대생이었던 프란체스코 가우디오소는 나니에게 알레만디와 같은 빌딩에 산다고 귀띔했는데 나니는 처음에 그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나니는 그의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가우디오소를 중개인으로 하여 나니는 알레만디에게 2만 5천 리라 를 건넸다.[6] 나니는 그러면서 토리노 구단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알레만디는 즉시 1만 리라를 받았고, 나니는 남은 만 오천 리라는 시합 후에 주겠다고 답을 했다.[7]

드디어 시합일. 토리노는 당시 승점 12점으로 1위를 질주하고 있었으며, 볼로냐와 유벤투스가 그 뒤를 쫓고 있었다. 이 경기는 유벤투스에게 있어 토리노를 추격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알레만디는 엄청난 활약으로 토리노의 3인방을 틀어막으며 전반을 1대0, 오히려 유벤투스의 우세로 마무리하였다. 후반 10분, 토리노는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만들어냈는데 유벤투스의 피에트로 파스토레가 퇴장을 당하면서 유벤투스에게 불리하게 상황이 전개되었다. 결국 후반 29분에 터진 훌리오 리보나티의 골로 토리노가 우승에 한 발짝 더 다가서게 되었다.

유벤투스에게는 실망스러웠지만 알레만디는 훌륭한 시합을 펼쳤다. 그런데 나머지 1만 5천 리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어쨌든 유벤투스는 패배했고 이를 이유로 알레만디는 나니에게 잔금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나니는 당연히 거절했다. 이유는 유벤투스가 승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한 게 없다는 것. 결국 이 뇌물의 미지급은 가우디시오와 알레만디의 뜨거운 논쟁으로 이어졌고, 이를 페르미넬리가 엿듣게 된 것이었다.[8]

3. 결과

페르미넬리의 기사는 일 티포네를 통해 보도되었고, 즉시 조사가 시작되었다. 나니는 곧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고, 축구 연맹은 1927년 11월 4일, 토리노의 1926-27 시즌 우승 기록을 삭제한다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월말에는 알레만디도 축구계에서 퇴출되었으며 유벤투스의 팀 동료 페데리코 무네라티와 피에트로 파스토레 역시 공식적으로 징계를 받았다. 사유는 불고지죄.

한편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알레만디는 나니와 함께 1년 후에 복권되었고, 월드컵에서도 우승하는 등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보냈다. 당연하겠지만 그는 평생 이 사건을 언급하기를 꺼렸는데, 죽기 2년 전인 1976년에야 당시에는 투명치 않은 무언가가 있었는데 나에게는 죄가 없다는 식의 소극적인 인터뷰만 남겼을 뿐이다.

4. 수수께끼

하지만 오늘날에도 풀리지 않은 문제가 남아있다. 무네라티와 파스토레는 무죄로 풀려났지만 토리노의 첫 골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른 비르지니오 로세타는 오히려 누구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는 것. 그래서 혹자는 알레만디가 그 돈을 선수단 전원에 나눠준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판결로 유벤투스는 로세타를 지켜냈고 당시 라이벌이었던 볼로냐에 알레만디를 파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만약 알레만디가 볼로냐에 팔렸다면 1934년 월드컵 당시 나왔던 에랄도 몬첼리오-루이지 알레만디라는 이탈리아의 주전 풀백 라인이 훨씬 먼저 가동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의문들은 여기에 관련된 당사자들이 모두 죽었으니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5. 뒷이야기



[1] 이탈리아어로는 Caso Allemandi. 파장은 알레만디 스캔들보다 작았지만 이탈리아 축구계의 첫 스캔들은 로세타 이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2] 출처: http://www.thegentlemanultra.com/gazzetta/no-winner-the-allemandi-scandal-and-the-turin-derby-of-1927 [3] 원 출처에서는 햄릿의 글귀인 "Something Is Rotten in the State of Denmark"가 그대로 적혀있다. 하지만 덴마크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기사에 저 글귀를 그대로 적었을 리는 없고 원문을 찾는 것도 불가능한데다 그대로 적기에는 뜻이 맞지 않아 제목을 조금 바꾸었다. [4] 그 이전에는 프리마 디비시오네라고 하여 남부와 북부의 챔피언이 결승전을 치르는 방식이었다. [5] 이탈리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심판의 기술적 오류로 인해 6월 3일에 재경기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재경기에서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6] 이 당시 2만 5천 리라는 축구 선수에게 엄청난 금액이었다. 5년 후 월드컵 개최가 확정되었을 때 이탈리아 정부에서 편성한 예산이 350만 리라였고, 9년 후 출시된 소형차 피아트 토폴리노의 출시 가격이 대략 1만 리라였는데, 50년대까지만 해도 축구단이 선수를 영입하기 위해 집과 차를 주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7] 원 출처에서는 나니가 건네기로 약속한 돈은 5만 리라이고 절반씩 나눠 받기로 약속되었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이탈리아어 위키백과에 당시 축구 연맹의 조사문이 기록되어 있어 그를 따랐다. [8] 다른 이야기로는 가우디시오가 페르미넬리를 찾아가서 제보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