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아틸리오 세페리노 가르시아 페레스 (Atilio Ceferino García Pérez) |
생년월일 | 1914년 8월 26일 |
사망년월일 | 1973년 12월 12일 (향년 59세) |
국적 | 우루과이 | 아르헨티나 |
출신지 | 아르헨티나 후닌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
신체조건 | 180cm / 80kg |
소속팀 |
CA 플라텐세 (1936) CA 보카 주니어스 (1937)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38-1951) 라싱 클루브 데 몬테비데오 (1952) 미라마르 (1953) |
국가대표 | 6경기 5골 (1945-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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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가르시아는 CA 플라텐세에서 데뷔했고 1937년, CA 보카 주니어스에서 한 시즌을 보냈다.1938년부터 가르시아는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의 나시오날에서 뛰었다. 데뷔 시즌부터 그는 리그 득점왕이 되었고 이후 6시즌 더 득점왕을 차지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이 해에 나시오날은 에스투디안테스와의 친선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이 경기는 몇몇 선수들이 머리에 상처를 입고 유혈 사태가 터지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는데 경기는 가르시아의 2골에 힘입어 나시오날의 2대1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1939년, 나시오날은 영원한 라이벌 CA 페냐롤의 리그 5연패를 저지하고 리그 챔피언이 되었다. 이후 나시오날은 1943년까지 리그 5연패를 달성했고 1940년 12월 8일의 우루과이언 클라시코에서 페냐롤을 5대1로 대파하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가르시아는 4골을 넣어 아직도 우루과이언 클라시코 단일 경기 최다 득점자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44년, 나시오날의 리그 6연패 도전은 페냐롤과 공동 1위로 끝남으로써 우승팀을 가리기 위한 최종전을 치르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도 가르시아는 2골을 넣으며 분전했지만 페냐롤에 2대3으로 패배, 리그 6연패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1950년의 우승은 가르시아의 8번째 리그 우승이자 그의 마지막 리그 우승이었다. 1951년, 나시오날과 이별한 가르시아는 1953년, 미라마르(Miramar)에서 축구화를 벗었다.
2.1.2. 국가대표
가르시아는 1945년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 우루과이 대표로 참가했다.그는 이 대회에서 에콰도르를 상대로 해트 트릭, 콜롬비아를 상대로 2골을 넣어 총 5골을 넣어 득점 2위에 랭크되었다. 하지만 우루과이는 브라질에 0대3으로 패배하는 등 3승 3패, 4위의 성적을 거뒀다.
가르시아는 1947년 3월 29일, 브라질을 상대로 한번 더 A매치에 출전했고 그것이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팀 경기가 되었다.
2.2. 이후
선수 은퇴 이후 가르시아는 아르헨티나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몬테비데오에서 살았고 1973년에 사망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가르시아는 465골의 나시오날의 역대 최다 득점자이자 35골의 페냐롤전 역대 최다 득점자로 나시오날 구단과 서포터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구단에서도 홈구장 남쪽 관람석에 그의 이름을 헌정했고 본사에는 그의 그림과 흉상이 있다.나시오날의 서포터로 유명한 우루과이의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도 그의 활약을 담은 글 Gol de Atilio를 저술했고 2014년 7월 20일에 나시오날은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서 CA 보카 주니어스와의 가르시아 탄생 100주년 기념 경기를 갖기도 했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8회: 1939, 1940, 1941, 1942, 1943, 1946, 1947, 1950(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5회: 1938, 1944, 1945, 1949, 1951(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4.1.2. 개인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8회: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1944, 1946(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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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