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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15 12:00:06

아우시크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후스파3.2. 후스파 십자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후스 전쟁 시기인 서기 1426년 6월 16일 북부 보헤미아의 아우시크에서 후스파 군대와 십자군이 맞붙은 전투. 우스티 나드 라벰 전투로 불리기도 한다.

2. 배경

서기 1424년 10월 11일, 후스 전쟁에서 십자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한 후스파의 명장 얀 지슈카가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 후스파는 새 지휘관으로 야콥 프로코프를 선출했다. 그는 타보르파인 얀 지슈카와 대립했던 양형파 출신이었지만, 타보르파 역시 포용하여 명장의 죽음 이후 흔들리던 군심을 다잡는데 성공했다. 한편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얀 지슈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이야말로 후스 전쟁을 끝낼 기회라고 판단하여 독일과 헝가리 각지에 사절을 보내 십자군을 재조직하라고 호소했다.

1426년 초, 프로코프는 십자군이 보헤미아로 쳐들어오기 전에 선제공격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군대를 일으켜 작센 및 상부 루사티아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한 우스티 나드 라벰(Ústí nad Labem, 현재 아우쉬크)로 진격했다. 이에 맞서 군사 행동을 취한 이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카테리나였다. 그녀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하인리히 1세의 외동딸로, 17살때인 1402년 5월 8일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변경백인 프리드리히 4세와 결혼했다.

후스파 군대가 우스티 나드 라벰으로 쳐들어가고 있을 때, 남편 프리드리히 4세는 독일 의회에 출석하기 위해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을 대신해 병력을 소집하여 적을 몰아내려 했다. 후스파 군대는 우스티 나드 라벰을 포위한 뒤 6월 6일 공성전을 감행했지만, 수비군이 결사 항전하여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 사이 십자군이 집결하자, 카테리나는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그들을 파견했다. 십자군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프로코프는 인근 언덕에 바겐부르크(Wagenburg)를 배치하여 대비하였다.

이윽고 6월 16일 십자군이 현장에 도착했다. 마침 이날은 일요일이었기에, 프로코프는 십자군에게 사절을 보내 전투를 미루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를 거부하고 돌격을 감행했다. 이리하여 아우쉬크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후스파

3.2. 후스파 십자군

4. 전투 경과

6월 16일 오전, 십자군 기병대는 언덕 위에 바겐부르크를 세워놓고 버티고 있는 후스파를 향해 돌격했다. 하지만 후스 전쟁 발발 이래 바겐부르크에게 가로막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완패하기 일쑤였던 그들은 이번에는 특별한 방법을 동원했다. 바로 배틀액스를 사용하는 기사들을 동원한 것이다. 기사들은 배틀액스로 바겐부르크들을 잇는 쇠사슬을 찍어서 파괴하고 마차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당시 후스파는 바겐부르크 대열을 3개 두었는데, 1차 대열과 2차 대열 모두 십자군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뚫려버리자 최후의 방어선으로 후퇴했다.

몇 시간에 걸쳐 배틀액스로 공격한 끝에 적을 최후 방어선까지 몰아넣은 기사들은 이제 조금만 더 하면 적을 도륙낼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마지막 힘을 짜내 공격했다. 그러나 후스파 기병대가 출격하여 바겐부르크를 뚫는 데 혈안이 되어 있던 십자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또한 바겐부르크를 억지로 뚫고 진입한 일부 십자군은 할버드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후스파 장병들의 집중 공격으로 인해 낙마하여 잔혹하게 살해되었고, 바겐부르크 위에 있는 후스파는 적을 향해 핸드 캐논과 석궁, 화승총 세례를 퍼부었다.

결국 견디다 못한 십자군은 패주했고, 후스파 장병들은 이들을 추격하여 마구잡이로 베었다. 그들은 전투가 끝난 뒤 근처 마을로 도망친 십자군을 일일이 적발하여 처단했다. 이리하여 아우쉬크 전투는 후스파의 완승으로 끝났다.

5. 결과

십자군의 피해는 여러 사료마다 다르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4,000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한다.십자군이 대패한 뒤, 우스티 나드 라벰 시는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함락되었다. 후스파는 도시에 진입한 뒤 시민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이후 그들은 오스트리아의 즈베틀까지 침입했으나 1427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에게 패퇴하여 보헤미아로 귀환했다.

교황 마르티노 5세는 갈수록 기세등등해지는 후스파를 어떻게든 무너뜨리기 위해 4차 십자군을 선포하고, 곤트의 존의 아들이자 헨리 4세의 동생이며, 윈체스터 주교인 헨리 보퍼트를 수장으로 세워 후스파를 치게 했다. 그러나 4차 후스파 십자군 마저 1427년 8월 4일 타호프 전투에서 참패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