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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0 13:13:45

아스파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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Ἀσπασία / Aspasia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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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헤타이라(hetaira).[1] 아스파샤라고도 불린다.

밀레투스 출신으로 악시오코스라는 인물의 딸이었으며, 아테네로 와서 유명한 정치가 페리클레스의 정부가 되었다. '헤타이라'로 일했다고 하는데, 헤타이라란 수준 높은 교양을 갖추고 상류층의 연회에서 시를 읊고 담론을 즐기던 고급 매춘부로 조선의 일패 기생이나 유럽의 코르티잔과 유사한 점이 많은 사회 계층이었다. 아스파시아 또한 아름다운 용모와 출중한 언변, 명민함과 지식을 갖춘 재색겸비의 여성이었다. 이 명민함으로 페리클레스를 비롯한 아테네의 유력 인사들을 사로잡았고,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당대의 이름 높은 지성인들과 교류했다. 소크라테스는 아스파시아를 '변증법과 수사학에 있어 최고의 스승'이라고 칭송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페리클레스의 웅변 원고를 써 주는 등 그의 정치 활동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단순히 페리클레스의 애인, 내연녀 정도가 아니라 실질적인 배우자이자 정치적 파트너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정적들과, 아스파시아의 출신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 외국인 헤타이라가 페리클레스에게 영향을 행사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은 집요하게 그를 공격했다. 정적들은 아스파시아가 음탕하고 타락한 인물이라고 자극적인 모함을 하거나, 도편추방제를 동원해 쫓아내려 하거나, 이교도로 기소하여 사형을 선고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페리클레스의 장남조차도 아스파시아의 적들과 합심하여 아버지를 비난했다.[2] 그래도 결국 아스파시아는 페리클레스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페리클레스와의 사이에서 페리클레스 2세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그는 후일 펠로폰네소스 전쟁 후기 아르기누사이 해전에서 난파한 선원들을 구조하지 못했다는 죄로 처형당한 8명의 아테네 장군들 중 한 명이다.

페리클레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도중 아테네 역병으로 사망한 뒤 다른 정치인과 재혼하여 다른 아들을 하나 더 낳았다는 얘기도 있는데, 이에 대해 의문과 반론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BC 428년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남은 기록이 없으며,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불분명하나 소크라테스보다 먼저 죽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대체로 아스파시아의 생몰년은 BC 470~400년 정도로 추산한다.

어쌔신 크리드: 오디세이에서 등장한다. 아름다운 용모, 페리클레스와의 관계, 뛰어난 지성, 당대 아테네 제일의 지성인들과 교류하는 모습까지 모두 고증이 잘 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더 자세한 내용은 한국어 위키백과의 아스파시아 문서를 참고할 것.


[1] 한반도의 기생과도 같은 고대 그리스의 고급 매춘부로 주로 코린토스에 있던 아프로디테 신전의 여사제인 경우가 많았다. [2] 페리클레스는 당초에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으나, 본처와 정식으로 이혼한 뒤 25살이나 연하인 아스파시아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아들 입장에서 그게 껄끄러웠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페리클레스의 장남은 제 나름대로 정치적인 야심이 있었다고 하니 늙은 아버지 대신 아버지의 적들과 손을 잡고 정계에 진출해 힘을 키울 심산이었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