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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1:20:42

아돌프 프리드리히 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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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클렌부르크 왕조
카를 2세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빌헬름 아돌프 프리드리히 5세
아돌프 프리드리히 6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

<colbgcolor=#004398>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아돌프 프리드리히 6세
Adolf Friedrich VI.,
Großherzog von Mecklenburg-Strelitz
파일:Großherzog_Friedrich_Adolph_VI._von_Mecklenburg-Strelitz.jpg
<colcolor=#ffc723> 이름 아돌프 프리드리히 게오르크 에른스트 알베르트 에두아르트
(Adolf Friedrich Georg Ernst Albert Eduard)
출생 1882년 6월 17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 노이슈트렐리츠
사망 1918년 2월 23일 (향년 35세)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국 노이슈트렐리츠
재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1914년 6월 11일 ~ 1918년 2월 23일
아버지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아돌프 프리드리히 5세
어머니 안할트의 엘리자베트 공녀
형제 마리, 유타, 카를 보르빈
종교 루터교회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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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마지막 대공.

2. 생애

1882년 6월 17일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아돌프 프리드리히 5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후계자로 기대받으며 자랐으나 정작 본인은 정치보다는 예술을 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 했다.

1914년 6월 11일 대공위를 물려받고 그로부터 7주 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독일 제17보병사단의 대령으로 임명되어 전쟁 내내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전후 신붓감을 찾던 그는 로이스쾨스트리츠의 베니그나와 혼담을 나누게 되었다. 그러나 대공에게는 한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는 이전에 마르그리트 홀리글이라는 체코인 귀족 여성과 교제했었다. 당시 대공위를 동생이 물려받길 원했던 아돌프 프리드리히 6세는 미혼으로 남기 위해 그녀와 헤어졌다. 그러나 동생 카를 보르빈이 결투 중 사망하고 아돌프 프리드리히가 대공이 되자 마르그리트 홀리글은 다시 그에게 접근했다. 당대에 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대공이 과거 그녀와 결혼을 약속한 증거가 있어 발목이 잡혔다, 대공의 동성애 성향을 폭로하겠다는 협박을 당했다 등, 여러 소문만을 남기고 아돌프 프리드리히 6세는 혼담을 물렀다.

1918년 2월 23일 대공은 개를 데리고 저녁 산책을 하러 나갔다. 한밤중에도 돌아오지 않자 수색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오후 노이스트렐리츠 근처 운하에서 가슴에 총상을 입은 대공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부검 결과 총상은 치명적이지 않았으나 직후 머리부터 물에 빠져 익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죽기 전 우울함을 호소했다는 지인들의 증언에 의해 자살로 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타살의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었기에 오늘날에도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사후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가문의 유일한 남성 생존자였던 카를 미하엘 공작이 계승권을 포기하면서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가 섭정을 맡았다. 섭정이 끝난 이후로는 공작위 자체가 다른 메클렌부르크 계열 가문의 공작위와 통합되어 명목상의 공작위마저도 사라진 듯 하다.[1]

[1] 사실 친척 중 양자를 들이거나 족보를 뒤져 먼 친척에게 계승하여 작위를 유지하는 사례는 매우 흔하지만 무조건 그런 것만은 아니다. 에드워드 8세의 윈저 공작위는 동생 조지 6세가 그를 배려하면서 동시에 정치 활동 같은 허튼짓을 못하도록 예전에는 없던 공작위를 신설해서 준 것이니 논외로 하고, 빅토리아 여왕의 3남 아서 왕자(1850~1942)의 코넛과 스트레선 공작위나 조지 5세의 처남 알렉산더 케임브리지(1874~1957)의 애슬론 백작위도 직계 후손이 없자 방계를 찾아 물려주지 않고 그대로 작위 자체가 단절되어 버렸다. 왕족, 귀족들 사이에서도 중요도가 비교적 낮은 공작위, 백작위 같은 경우는 굳이 어거지로 잇지 않고 명목상으로도 그대로 단절되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