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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2 00:25:44

어니스트 시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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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a8518><colcolor=#fff> 어니스트 시튼
Ernest Seton
파일:lossy-page1-1024px-E._Thompson_Seton_LCCN2014682071.tif.jpg
출생명 어니스트 에반 톰슨
Ernest Evan Thompson
개명[1] 어니스트 톰슨 시튼
Ernest Thompson Seton
검은 늑대[2]
Black Wolf
출생 1860년 8월 14일
영국 잉글랜드 더럼 주 사우스실즈[3]
사망 1946년 10월 23일 (향년 86세)
미국 뉴멕시코 주 시튼 빌리지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1860년 – 1932년)

[[미국|]][[틀:국기|]][[틀:국기|]] (1932년 – 1946년)
직업 동물학자, 화가, 작가
수상 존 버로스 메달 (1927)
다니엘 엘리엇 메달 (1928)
실버 버팔로 상 (시기미상)
배우자 그레이스 갤라틴 (1896년 ~ 1935년, 이혼)[4]
줄리아 모스 버트리 (1935년경 결혼)
자녀 2명[5]
종교 무종교
서명 파일:Signature_of_Ernest_Evan_Seaton-Thompson.png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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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tfaoi.com/8cm154.jpg
"지구는 사람만이 사는 별이 아닙니다. 그리고 자연은 사람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지만 사람은 자연이 없다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동물보호론자들의 대선배이자 동물학자이자 화가. 시튼 동물기의 저자로 유명하다.

또한 1910년 미국에서 최초의 보이스카우트 협회를 만들고 최초의 치프 스카우트(스카우트 지도자)였다는 것만으로도 유명하다.

2. 생애

1860년 영국 북부 잉글랜드 더럼 주의 사우스실즈에서 태어났다.[6] 아버지 조셉 로건 톰슨이 해운업자로 12척의 상선을 가졌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에 상선 한 척이 해적에게 당하고, 두 척은 폭풍으로 침몰하는 사고를 겪으면서 큰 피해를 봐서 1866년 온 식구들과 함께 캐나다 토론토로 이주했다. 소년 시절을 캐나다 남부의 삼림지대의 자연 속에서 동물을 관찰하며 보냈다고 한다.

시튼이 21살이 되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성장하는데 들어간 식비, 의류비, 교육비 등을 계산한 용지를 들이밀면서 모두 갚으라고 했다고 한다. 시튼 가족이 캐나다로 이주한 영국인이긴 하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 가급적 빠른 시기에 독립을 생각하는 서양의 문화를 생각해도 상당히 드문 편이다. 나중에 시튼이 자서전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아버지가 청구한 돈은 537달러로 당시로서는 거액이며 이자를 6%로 책정해서 돈을 달라고 했다. 시튼은 처음에는 갚아야겠다고 생각을 하였으나 나중에는 아버지한테 이것보다 훨씬 적은 돈을 보내며 줄 돈도 없고 갚을 이유도 없다고 생각하였다.[7] 이렇게 집을 떠난 시튼은 1880년대 초에 매니토바에 정착해서 살게 된다.

어릴 때부터 아메리카 원주민들하고 많은 교류를 쌓아 자연의 흐름을 배웠으며, 당시로서는 백인으로 드물게 미국 및 여러 나라 원주민 보호 정책 및 차별 금지를 부르짖고 동물보호구역의 확대 및 자연 개발을 막으려고 노력한 사람이다. 캐나다에 있는 차스카 호수도 잠깐동안이지만 친하게 지냈던 원주민 사냥꾼 차스카(딱 한번 만나서 자연에 대한 위대함을 이야기하고 헤어진 뒤로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고 한다)와의 우정을 생각하며 호수 이름을 지은 바 있다.

단 북극권 지역을 여행했을 때는 그곳 원주민들을 경멸했는데 돈을 주고 일꾼으로 고용한 원주민들이 게으름을 피우고 식량을 낭비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양심적이고 뛰어난 원주민들에 대해서는 칭찬하고 존경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파일:external/giam.typepad.com/ets_caribou_2.gif
파일:external/giam.typepad.com/ets_buffalo_1.jpg
화가이기도 했으므로 동물을 직접 그려 삽화를 넣었는데, 경험에 근거한 섬세한 묘사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동물학자이다 보니 동물이 안 나오는 그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특징이다.
파일:external/www.philmontscoutranch.org/triumph.jpg
문제의 그림 '늑대들의 업적'
그러다가 늑대가 사람의 두개골을 물어뜯는 그림인 <늑대들의 업적 Triumph[8] of the Wolves>로 당시의 평론가들에게 잔인한 그림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시튼은 이 그림을 자랑스러워하면서 사람도 결국은 많은 피조물 중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1901년에 목공예 인디언(Woodcraft Indians)이라는 청소년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름과는 달리 아메리카 원주민이 아니라 백인 위주의 단체였다고 한다. 그 후 1910년 미국 보이스카우트 협회(BSA)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지만 1915년에 사직했고 Woodcraft Indians 단체를 다시 차렸다. 이후 이 단체는 1922년에 Woodcraft Rangers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파일:external/2c546b153942f09142796414f96cb21519ece135dff6269bcd644ba294202a99.jpg

미국에도 가서 여러 동물을 연구하고 싶어 했지만 미국 시민권을 받는데 번번이 실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숲을 밀어서 목축 농장을 확대하는 것을 반대하고 원주민 보호구역의 확대를 주장하며 개발을 우선시하던 미국 기득권자에게 찍혀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 1932년에 노구의 몸이던 72살 때, 그것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미국 정치와 경제가 엉망이 되고 이들 미국 내 기득권 세력들이 대공황으로 다 몰락한 상황에서 미국 시민권을 얻게 된다. 사실 미국 보이스카우트 협회의 초대 지도자가 왜 영국인이냐는 소리를 듣기도 해서 미국 시민권을 빨리 얻고 싶어 했다고 한다.[9]

파일:external/www.privatepress.org/1_39_seton_map.jpg

미국 국적을 얻은 이후인 1933년 뉴멕시코 주 산타페에서 고작 10km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그의 마을 공동체인 시튼 빌리지를 지었고, 그곳에서 야생동물 보호 운동을 하며 살다가 1946년 노환으로 사망한다. 뉴멕시코 주의 사적지(Historical Marker)로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3. 기타

파일:external/www.stowevintage.com/ernest-thompson-seton-auto.jpg

스스로 원주민 이름으로 "검은 늑대"(Black Wolf)라고 지었고, 그 이름과 함께 늑대 발 모양의 사인을 고집했다고 한다.

<인디언의 복음>이란 책을 써서 기독교 근본주의와 백인우월주의가 얼마나 미국 원주민을 학살했는지, 그들의 위대한 문화를 파괴했는지 통렬히 비판했다. 주요 내용을 보면...
17세기의 기독교 골수주의자 묘비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기록이 바로 이렇다. 그중 하나인 '린 S. 러브'라는 자의 묘비명에 자랑하듯이 올라온 글귀이다.

"한평생 그는 주께서 그의 손에 부치신 인디언 98명을 죽였다. 그는 삶이 끝나 그의 본향에서 주의 팔에 안겨 잠들기 전에 100명을 채우길 바랐다." ( <인디언의 복음>, p. 132)

콩고에서 대학살을 저지른 벨기에의 국왕인 레오폴드 2세를 늑대 똥보다 못한 놈이라면서 분노에 찬 비난을 했다. 학살도 학살이지만, 다이아몬드와 자원을 캐내고자 콩고의 울창한 정글들을 마구 뒤엎어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동물을 사랑하고 원주민 보호정책과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금지를 부르짖었던 사람인 시튼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치가 떨리고 단단히 화가 났을 것이다. 물론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식민지 통치가 세계적으로도 가장 유례가 없는 막장이었다보니[10] 자국인 벨기에에서도 레오폴드 2세에게 오만 쌍욕을 퍼부을 정도로 레오폴드 2세를 증오했다.[11]


[1]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톰슨이라는 성을 쓰다 21살 이후 톰슨 - 시튼이라는 성씨를 병기해서 썼다. 어머니와 몇몇 형제들은 여러 성씨를 병기하여 쓰는 것이 종교적으로 불경하다 생각하여 이를 탐탁지 않아했으며, 어머니 생전까지는 주로 톰슨을 쓰다가 어머니 사후 시튼이라는 성씨로 고착되었다. [2] 본인이 만든 원주민식 이름. [3] 현 잉글랜드 타인 위어 주 사우스타인사이드 자치구 사우스실즈 [4] 미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5] 이중 딸 앤 시튼(Ann Seton)은 역사 소설가로 활동했다. [6] 1974년에 타인 위어주가 생기면서 타인 위어 주 소속이 되었다. [7] 이후에도 아버지와 가끔 왕래는 하는 사이였다. [8] 큰 업적, 환희, 대승리, 대성공, 승리의 기쁨 등으로 번역된다. 마음에 드는 것으로 골라잡자. [9] 생애 대부분을 캐나다에서 보냈으나 캐나다 국적 없이 영국 국적 신분으로 캐나다에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캐나다 국적은 시튼 사후인 1947년에 제정되었고 그 이전에는 캐나다 국적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대영제국 시민권(British Subject)이라는 식민지와 자치령만의 시민권이 영국 국적과 별개로 존재했었다. 그러나 시튼과 가족들은 법적으로 캐나다 자치령의 시민이 되지는 않았다. [10] 오죽하면 당대에 식민지에 대한 식민지인 학살을 자행했던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다른 제국주의 서구 국가들도 벨기에의 레오폴드 2세가 펼치는 콩고 지배는 그 정도가 지나치다고 비난할 정도였다. [11] 사실 시튼은 레오폴드 2세 이외에도 숲과 초원, 산을 깎거나 개간하고, 야생동물들을 사냥하고 농장과 광산, 공장, 도로를 만들며 무분별한 개발에 집중하던 미국이나 중남미, 유럽 국가들의 정치인들도 쓰레기라며 분노하고 비난한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