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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0:54:24

시즈카 고젠

静御前 (しずかごぜん)

1. 개요2. 설명3. 창작물에서

1. 개요

헤이안 시대 말기의 시라뵤우시.[1] 그녀의 어머니인 이소노젠시는 카마쿠라 말기의 수필집 츠레즈레구사(徒然草)에 따르면 최초의 시라뵤시라 한다.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의 로맨스로 유명한 여인이다. 다만 요시츠네의 정실은 사토 고젠이었다. 그래서 시즈카 고젠은 이나 애인인 셈.[2]

2. 설명

춤을 매우 잘 췄다고 하며, '기케이키'에 따르면 고시라카와 법황[3]이 신센엔에서 기우제를 지내면서 백 명의 무희들이 춤을 봉납하게 했는데, 마지막에 그녀가 춤을 추자 비로소 비가 내렸다고 한다. 고시라카와 법황은 그녀를 일본 제일이라 칭찬하면서 '저 자는 신의 아이가 아니냐'하고 감탄했다 한다.

하지만 그녀가 유명한 것은 춤 때문이 아니라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의 애인이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연애담이 워낙 유명한 데다가 두 사람의 첫만남 또한 신센엔에서의 운명적인 만남이었다는 설화가 남아 있어, 혹자는 이 이야기를 한국의 고전인 춘향전에 빗대기도 한다. 하지만 시즈카 고젠에 대해 설화 속에서는 여러 우아한 이야기들이 남아있지만 정사 상으로는 무참한 비극들만이 전해지는 가련한 여성이기도 하다. 이하의 내용은 아즈마카가미의 서술.

요시츠네가 형에게 팽당해 큐슈로 도망칠 때 시즈카는 무사시보 벤케이[4]와 함께 따라갔으나, 성역이기 때문에 여성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요시노에서 이별한 뒤 교토로 돌아가던 중 종자에게 배신당해 가진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깊은 설산 속에서 미아가 되었다. 사찰에 피난하려던 시즈카는 사찰의 승병에게 잡혀 취조를 받고 이런 전후 사정을 진술하게 되었다. 주지조차도 시즈카를 불쌍하게 생각했지만(...) 역적의 첩이어서 개인적으로 위로하고 후대하는 것 정도 이외에는 어쩔 도리가 없어서 결국 시즈카는 카마쿠라로 압송된다. 이때 그녀는 요시츠네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잡혀간 시즈카는 포로의 신세였고 요시츠네의 애인인 것 때문에 본인도 적잖이 자신의 처지를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워낙 춤의 명인이자 미인으로 나라 안에 명성이 높았기 때문에 요리토모의 아내 마사코는 그런 유명 예능인이 모처럼 교토에서 가마쿠라로 왔으니 돌아가기 전에 츠루오카 하치만 궁에서 춤을 보여달라고 졸랐다. 병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던 시즈카는 결국 억지로 춤을 봉납하게 된다.

그런데 시즈카는 '시즈[5]여 시즈 시즈의 실꾸리를 다시 감듯이 옛날을 지금으로 되돌릴 수 있다면.'[6] '요시노 산봉우리 흰 눈을 헤치고 들어가신 이의 자취가 그리워라.' 라며 요시츠네와의 사랑을 노래했다.

연애시였지만 춤사위가 너무나 훌륭해서인지 주변 사람들은 신에게 바치기에 이만한 공연이 없다고 상하 모두 감동해 마지 않았으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간토 지방의 무사함을 기원하는 행사에서 감히 역적을 그리는 노래를 불렀다며 격노했다.

이 때 시즈카의 러브스토리에 감동한 부인 호죠 마사코가 앞을 막아서서 강력히 설득한다. 호조 마사코는 이즈로 유배 온 요리토모에게 반했으나 집안의 반대로 만나지 못하자 야반도주까지 감행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시즈카에게 크게 공감했던 것.[7]
나리께서 죄인으로 유배형에 처해져 이즈에 칩거하셨을 적, 저는 나리와 연모하는 사이가 되었으나 호조님[8]께서 당시 정세를 두려워하셔서 몰래 저를 가두셨습니다. 그런데도 전 나리를 만나고 싶은 나머지 칠흑같은 밤중에 장대비를 맞으며 나리 곁으로 달려갔지요. 그런가 하면 이시바시야마 전투[9]에서 하시리유 신사에 도망가 있을 적에는 나리의 생사를 알 수가 없어서 매일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제 심정을 생각하니, 지금 시즈카 고젠이 요시츠네가 예전에 사랑해주었던 것을 잊지 않고 그리워하는 마음은 그야말로 정절을 굳게 지키는 열녀의 모습이라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춤사위의 겉모습도 멋졌지만 저는 그 속에 움직이던 감정에도 감사하고 싶습니다. 정말 매혹적입니다. 거꾸로 상을 주시는 게 마땅하지요.

이에 요리토모는 결국 마지못해 입고 있던 옷을 벗어[10] 시즈카에게 감사를 표했다.

공연 다음 달에는 가마쿠라에 체류하는 동안 카지와라 카게토키의 아들 카지와라 카게모치가 동료들과 술에 취해 시즈카 고젠과 그 어머니 이소노젠지가 묵는 숙소로 찾아가 노래를 부르고 술을 따르라며 성추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시즈카는 분노해서 "요시츠네님은 가마쿠라님의 형제이시며 저는 그 첩입니다. 요리토모님의 고케닌이 어떻게 감히 보통 남녀처럼 제게 수작을 걸 수가 있는 것입니까? 요시츠네님이 역적으로 몰려 방랑하고 있지 않았다면 당신들 따위는 나와 대면도 하지 못했을 텐데 어찌 감히 이러는 겁니까."하면서 울며 소리쳤다고 한다.

교토에 있는 여성이 이런 봉변을 당하고 있는데 가마쿠라에 굳이 붙들어놓은 것은 결국 시즈카의 뱃속에 있는 요시츠네의 아이 때문이었다.[11] 요리토모는 아기가 딸이면 살려주고 아들이면 죽이겠다고 했는데, 공교롭게도 태어난 아이는 아들이었다. 이때 그녀를 불쌍하게 여긴 마사코는 시즈카가 낳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탄원했으나 비정한 요리토모는 단칼에 거부했다. 아기를 끌어안고 몇 시간이나 우는 시즈카의 앞에서 아이를 달라고 꾸짖던 요리토모의 가신을 보고 딸까지 해를 당할까봐 두려워한 시즈카의 어머니 이소노젠지가 결국 아기를 빼앗아 요리토모측에게 건네줘버리는 비극이 일어났다.[12]

아기는 유이가하마[13]에서 살해되었고, 시즈카는 실의에 잠겨 교토로 돌아간다. 마사코와 오오히메[14]에게 많은 보화를 받았다고 한다. 그 뒤 그녀의 행적은 끊기나 전설에 따르면 자결했거나 얼마 되지 않아 요절했다고 한다.

그녀와 요시츠네의 사랑 이야기는 민중들의 사랑을 얻어 가부키, 조루리, 노가쿠 등으로 만들어졌다. 가부키 '요시츠네 센본자쿠라'는 그녀가 요시츠네에게서 받은 '하츠네의 북'을 중심으로 진행된다.[15] 노가쿠 '후타리 시즈카'는 시즈카 고젠의 영혼이 동네 여인에게 빙의해 둘이서 이승에서의 원한을 풀기 위해 춤을 추는 내용이다.

3. 창작물에서



[1] 남장을 하고 춤을 추는 기녀. [2] 다만 인지도로는 일본에서도 시즈카 고젠 쪽이 더 널리 알려져있긴하다. 마치 거창군부인 장녹수처럼 말이다. [3] 양위한 뒤 출가한 덴노 [4] 동화적인 활약이 많아 전설 속 영웅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엄연히 정사에 이름이 있는 인물로, 시즈카의 공초에 이름이 나온다. [5] 옷감인 '시즈'와 시즈카 자신을 가리키는 중의적 의미가 있다 [6] 이 노래 자체는 '이세모노가타리'의 노래를 차용한 것이다. [7] 호조 집안을 다소 미화하는 편인 아즈마카가미에서는 요리토모의 비정한 모습을, 마사코의 인정많은 모습을 자주 그리고 있다. 비극적인 오히메 사건에서도 사위 요시타카를 죽였다면서 요리토모를 다그쳤고, 시즈카를 불러내 공연을 연 것도 냉혹한 요리토모에게 어필해 구명해주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8] 마사코의 아버지 호조 토키마사를 말한다. [9] 요리토모가 헤이케에 대항해 거병한 이후의 첫 전투. 요리토모는 이 전투에 대패해서 동굴로 숨기까지 했다. [10] 당시의 예능인들에게는 공연 주최자가 입고 있던 귀한 옷을 벗어서 포상을 주었다. [11] 요리토모는 헤이케가 화근이었던 자신을 살려두어 멸망한만큼 일체의 자비를 베풀지 않는 비정한 인물이었다. 자신과 싸워 죽은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아들 요시타카는 사위인데도 죽였고, 헤이케의 후손들은 위협이 되지 않더라도 모두 추격해 몰살했으며 사후 원령이 두려워 각지에 불탑을 세우거나 공양을 했다. [12] 당시의 일본은 전제 군주정에 가까웠고, 장자 승계의 원칙과 가부장적인 문화가 확고하던 시기였다. 여자아이라면 어딘가로 시집을 보내 그 집안의 사람으로 살게 하면 그만이지만, 남자 아이라면 요시츠네의 뒤를 이을 자격이 있다며 새로운 전쟁의 명분으로 사용되도 이상하지 않았을 시기였다. 결국 진짜로 남자아이가 태어나버린 이상 요리모토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3] 가마쿠라 외곽 해변. [14] 요리토모의 장녀. 그녀 역시, 어린 시절 그녀와 약혼했으나 결국 살해된 요시나카의 아들 요시타카를 평생 마음에 품고 지냈으므로 시즈카에게 공감하고 있었던 듯 하다. [15] 하츠네의 북에 얽힌 사연은 4막에서 자세히 나온다. 시즈카 고젠이 하츠네의 북을 두드리자 요시츠네의 가신 사토 타다노부가 나타나는데, 사실 이 타다노부는 진짜가 아니라 여우였다. 사연인즉 간무 천황대에 나라에 심한 가뭄이 들어 기우제를 지냈을 때, 천 년을 살았다는 여우 암수 한 쌍을 잡아 그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들어 두드리자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 여우 가죽으로 만든 북이 바로 하츠네의 북이었고, 타다노부로 둔갑한 여우는 북이 된 여우 부부의 자식이었다. 죽은 부모를 그리워하던 새끼 여우가 시즈카 고젠을 모시던 타다노부로 둔갑해서 계속 곁에 머물러 왔던 것. 나중에 모든 사정을 알게 된 요시츠네는 측은한 마음과 이제까지 시즈카 고젠을 지켜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하츠네의 북을 여우에게 주었다. [16] 물론 자신도 모르게 대형 스포를 날린 유즈루는 매우 난처해 하면서 대신 자신이 아는 다른 와카를 알려준다고 했다. 단순한 쿠로는 쿄우에서 귀족들과 교류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매우 좋아라 했지만 이 와카의 유래를 아는 현대인인 유즈루나 플레이어는 매우 복잡한 심경이 든다. (...) [17] 나머지 두 명은 노랑색, 파랑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