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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8 01:34:16

시비르/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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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단문 배경2. 장문 배경3. 물4. 사막의 후예5. 불의 축제 세계관
5.1. 가면의 시험
6. 구 설정
6.1. 구 단문 배경6.2. 구 장문 배경 16.3. 구 장문 배경 26.4. 구 장문 배경 3

1. 단문 배경

"금화든 은화든 상관 없어. 보수만 짭짤하면 그만이지."

시비르는 슈리마 사막에서 활동하는 보물 사냥꾼이자 용병 대장이다. 몸값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비싸지만 전투를 벌이는 족족 이겨 몸값에 걸맞은 솜씨로 명성이 자자하다. 대담무쌍한 성격에 원대한 야심까지 겸비한 시비르. 그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슈리마의 묘역에서 진귀한 보물을 찾으며 남다른 자부심을 느낀다. 의뢰인에게서 두둑한 대가를 챙기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슈리마에 고대의 존재들이 귀환하면서 시비르도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2. 장문 배경

슈리마 사막 지대에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시비르는 어린 소녀일 때부터 몸으로 익혔다. 다른 부족을 침략하는 것으로 대사막에서 가장 악명 높은 크타온 족이 습격하는 바람에 가족 전체를 잃었던 것이다. 졸지에 고아가 된 시비르와 다른 아이들은 시장 가판대에서 먹을 것을 훔치고, 반쯤 파묻힌 고대 유적지에서 돈이 될 만한 자질구레한 장신구를 찾아내는 것으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좁디좁은 굴이나 오랫동안 발길이 끊긴 지하실로 애면글면 들어가 값나가는 것을 찾다 보면, 제일 좋은 물건을 갖겠다고 서로 악착같이 싸우는 일도 허다했다.

시비르는 다른 아이들을 이끌고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곤 했지만, 그렇게 죽을 힘을 다해 찾아낸 몇 개 안 되는 보물을 그대로 가질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자칭 친구였던 마이라에게 보물을 도둑맞고 난 후, 시비르는 다시는 배신을 당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녀는 아이하 지하로우라는 유명한 대장이 이끄는 용병단에 들어가 길 안내와 잔심부름을 맡았다.

이후 시비르는 무기를 다루는 기술이 일취월장하여 지하로우의 직속 부하가 되기에 이르렀으나, 그 바람에 지하로우가 매번 습격에서 획득하는 금과 공을 터무니없이 많이 가져간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심지어 시비르의 영리한 전략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던 습격에서조차… 결국 시비르는 다른 용병들과 손을 잡고 지하로우를 쫓아내고 자신이 대장이 되었다. 하지만 차마 스승 격이었던 지하로우를 처단할 수는 없었던지라, 행운을 빈다는 공허한 작별 인사와 함께 사막 한가운데에 남겨두는 쪽을 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시비르가 이끄는 용병단은 돈만 많이 준다면 무슨 일이든 해결하는 것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 중에는 나시라미의 어느 족장이 의뢰한, 오래 전 사라진 가보를 찾아달라는 임무가 있었다. ‘샬리카’라는 이름의 검이었다. 시비르는 족장의 개인 경호대와 함께 몇 달 간이나 검의 행방을 추적한 끝에 옛 슈리마 제국 어느 영웅의 석관에서 십자 형상의 검을 꺼낼 수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정교한 기술과 마법으로 만들어진 진짜 보물이었다. 시비르는 그 자리에서 샬리카에 매혹되어 버렸다. 그렇게 자신의 손에 꼭 들어맞는 무기는 본 적이 없었다. 경호대 대장이 샬리카를 족장에게 가져가겠다고 말하는 순간, 시비르는 샬리카를 던졌다. 십자날 검은 단번에 경호대 대장과, 그 뒤에 서 있는 남자 세 명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시비르는 내친 김에 경호대를 모두 처단해 버리고 무덤에서 나왔다.

시비르의 이름은 얼마 안 가 사막 전역에 퍼져나갔다. 녹서스가 북쪽 해안에서부터 내륙 지대로 밀고 들어왔을 때, 시비르는 뒤 쿠토 장군의 막내딸 카시오페아의 의뢰를 받아 함께 슈리마의 잊혀진 수도를 약탈하는 일에 나섰다. 구불구불한 지하묘지를 헤매는 동안 시비르가 이끄는 용병대원들이 고대의 함정에 걸려들어 숱하게 죽어갔지만, 카시오페아는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들은 무덤 속 거대한 문 앞에 다다랐다. 문 곁에는 수호신 조각상들이 버티고 있었고, 주변에는 강력한 신성전사들이 얕은 돋을새김으로 묘사되어 있었다. 시비르의 온 몸의 피가 용솟음쳤다. 그녀는 짐승의 머리를 한 영웅들의 모습에, 그들이 지하 세계의 사악한 생명체들과 벌이는 전쟁의 참상에 완전히 넋을 빼앗겨 버렸다.

시비르가 무방비 상태가 된 순간, 카시오페아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시비르의 등에 단검을 꽂았다.

시비르는 격한 통증을 느끼며 쓰러졌다. 피가 모랫바닥을 적셨다. 카시오페아는 샬리카를 집어들어 무덤의 문을 열었다. 그 행동이 무덤 안에 도사리고 있던 마법의 저주를 풀어놓는 것임을 알지 못한 채…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시비르의 눈에, 돌로 만든 뱀 한 마리가 살아 있는 뱀으로 변신하는 모습이 보였다. 뱀이 맹독을 내뿜자 카시오페아의 살갗이 타 버렸다. 몸의 감각이 사라지기 전, 시비르의 귀에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성난 신들의 사자후였다. 무덤에서 해방되어 다시 한 번 지상으로 나가려 하는…

하지만 시비르의 운명은 이 무덤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듯했다.

시비르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피에는 슈리마 황가의 마지막 남은 피가 섞여 흐르고 있었다. 시비르가 정신을 차려 보자, 그녀의 곁에는 다름 아닌 아지르가 있었다. 슈리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초월 의식이 실패하는 바람에 옛 전설 속 존재로나 남게 된 아지르였다. 시비르가 흘린 피가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아지르의 영혼을 부활시키고, 초월 의식을 마무리하고, 아지르에게 신성 황제가 지니는 천상의 힘을 남김 없이 불어넣은 것이었다. 그리고 아지르는 신성한 치유력을 지닌 새벽의 오아시스에서 그 물로 시비르의 치명상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했다.

아지르라는 이름과 그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내용의 이야기는 시비르도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바보들이나 믿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도저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슈리마의 고대 도시가 무덤에서 솟아오르자, 대지가 온통 갈라지고 자욱한 먼지가 기둥처럼 허공으로 솟구쳤다. 하늘에는 거대한 황금 원판이 떠올라 태양빛을 받으며 환하게 빛났다. 뼛속까지 울리는 진동을 느끼며, 시비르는 샬리카를 등에 메고 달아났다.

그 이후 시비르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오히려 필멸의 존재들 대부분은 이해조차 할 수 없는 힘의 분쟁에 휘말려 버렸다. 베커라 시에서 또 다른 초월체인 제라스를 만난 것이었다. 고대 슈리마의 마법사였다가 자유로워진 제라스는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아지르의 혈통을 이은 자를 찾고 있었다. 시비르는 또 다시 죽음의 위기에 처했으나, 나서스라는 학자와 탈리야라는 젊은 바위술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이제 시비르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오래 전부터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슈리마의 변화무쌍한 모래사막에서 스스로 운명을 만들어나갈 것인지.

3.

목구멍에 유리 조각이 잔뜩 들러붙은 것처럼 칼칼했다. 갈라진 입술은 불이 붙은 듯 화끈거렸다. 눈이 자꾸만 침침해져서 집중하기가 영 힘들었다.
‘이만큼 기다렸으면 슬슬 움직일 때도 되었는데...’

시비르는 바위 너머를 슬쩍 내다보았다. 짐마차들은 아직 샘 주위에 그대로 서 있었다. 하필이면 크타온족의 야영지라니, 재수가 없어도 너무나 없었다. 시비르가 죽기를 바라는 부족이야 많기는 하지만, 크타온족은 그중에서도 유독 앙심이 깊은 부족이었다.

시비르는 말라붙은 강바닥에 꾸려진 야영지를 다시금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짐마차에 올라타 출발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비르는 아무래도 크타온족의 장정 여섯 명과 싸울 각오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어깨 근육을 풀었다. 불시에 기습해야만 승산이 있을 것이다.

그 앙큼한 녹서스 여자에게 기습당했던 때를 생각하면...

시비르는 머리를 휘휘 저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목이 너무 말라서 정신이 산란해지는 것 같았다. 물을 충분히 가져오지 않은 게 뼈저리게 후회되었다.

그 도시에는 물이 가득했다. 물줄기가 콸콸 뿜어져 나오는 석상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모두 어느 고대의 존재가 되살려낸 것이었다. 그는 시비르의 목숨을 구하고 상처를 치료해주고는, 주위의 신전들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모래밖에 없는 죽은 도시에서, 알아듣기도 힘든 옛 언어로 된 이상한 주문을 외치면서... 시비르는 거기서 급히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마법사가 도시 전체를 다시 먼지로 만들어버릴까 봐 겁이 났으니까. 아니면 그에게 빚을 지게 될까 봐 겁이 났는지도 모르겠지만.

침을 삼키자 목구멍이 화끈 아파왔다. 시비르는 다시 샘 쪽을 내다보았다. 샘이라 봤자 누리끼리한 물웅덩이 정도였다. 저걸 마시려고 꼬박 하루를 기다렸다.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시비르가 저들을 죽이고 물을 얻거나, 그들이 시비르를 죽이고 금을 몇 닢 얻거나. 사막의 법칙이란 이런 것이다.

시비르는 가장 가까운 곳의 바위 위에 서 있는 보초를 향해 뛰어가면서 십자날 검을 들어올렸다. 보초가 뒤를 돌아보기 전에 덮칠 수 있을까? 그녀는 걸음을 헤아렸다. 열네 걸음, 열두 걸음, 열 걸음...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두 걸음... 시비르는 뛰어올라 보초를 공격했다.

시비르와 보초가 한데 뒤엉켜 바위 밑으로 넘어졌다. 보초는 이미 치명상을 입고도 몸부림치며 저항했다. 그는 시비르가 팔을 부여잡고 압박하자 절명했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죽지 않아도 될 목숨이었는데.

카시오페아에게 공격당했던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그 녹서스 여자가 시비르를 찔렀을 때, 시비르는 한 번 죽었다. 그 죽음에는 무슨 의미가 있었나?

멀리서 무언가가 우르릉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말발굽 소리인가? 모래언덕이 무너지는 소리인가? 궁리할 시간이 없었다. 크타온족 남자들은 동료가 사라졌다는 것을 금세 눈치 챌 것이다. 시비르는 저편에 솟아오른 둔덕을 따라 움직이고 있는 또 다른 보초를 두 번째 표적으로 결정하고, 돌바닥에 엎드려 조용히 기어갔다. 표적이 둔덕에서 내려오기 전에 깔끔하게 맞춰야 한다. 시비르는 확실히 조준을 한 뒤 십자날 검을 던졌다.

명중했다. 보초의 몸이 둔덕에서 떨어져내리고, 동시에 십자날 검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면서 시비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검이 날아오는 속도가 느려지더니, 도중에 또 다른 남자를 쓰러뜨리고는 각도가 변해버렸다. 검은 이제 샘 한가운데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원거리에서 적들을 저격해 조용히 해치우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십자날 검이 물에 빠지기 전에 낚아채기만 하면, 공중제비를 넘으며 검을 휘둘러서 나머지 남자 셋을 단칼에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시비르는 샘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었다. 그런데 달리다 보니 발이 무거워졌다. 폐에 공기가 충분히 들어가질 않는 느낌이었다. 서른 걸음만 더... 둔덕에서 추락하고 있는 두 번째 보초의 시체가 땅에 부닥치기 전에 샘에 닿아야만 한다. 스무 걸음... 다리 근육이 저려오면서 말을 듣질 않았다. 그리고 열다섯 걸음이 남은 시점, 발이 미끄러지면서 몸이 휘청거렸다.

‘안 돼!’
그 순간 두 번째 보초의 주검이 땅에 부닥치고 말았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랐다. 털푸덕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퍼졌다.

사막에서는 단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사막을 터전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더욱. 시비르가 한 발짝 더 내딛기도 전에, 크타온족의 나머지 보초들이 전부 무기를 뽑아들었다.

시비르의 십자날 검이 샘물에 첨벙 떨어졌다. 샘은 보초들과 시비르 사이에 가로놓여 있었다. 그들에게서는 다섯 걸음, 시비르에게서는 열 걸음 위치였다. 지금이라도 무기를 회수할 수 있을 것이다. 온몸의 근육이 앞으로 뛰어나가려 꿈틀거렸다. 그런데 시비르는 다리를 내뻗다 말고 우뚝 멈춰섰다.

물을 충분히 가져오지도 않았고, 습격을 개시하기까지 너무 오래 꾸물거렸고, 거리를 잘못 가늠하기까지 했다. 평소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는 실수들이었다. 왜 이런 실수를 했지? 시비르는 자연히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카시오페아의 단검에 등을 찔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칼날 자체는 느껴지지 않았고, 별안간 엄청난 무게에 폐가 짓눌려 숨이 막히는 것 같던 그 느낌이 지금도 생생했다.

“나는 너희가 내 기척을 듣기도 전에 세 명이나 죽였다.”

시비르가 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러자 크타온족 보초들 중 덩치가 가장 큰 자가 입을 열었다.
“무기도 없는 주제에 위세만 대단하군.”

“마실 물을 더럽히고 싶지 않아 공격을 그만뒀을 뿐이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그래도 그 말이 그럴싸하게 들렸는지, 남자 셋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시비르가 누구인지 알아본 모양이었다.

“작년에는 너희 부족에서 가장 뛰어난 전사 스무 명과 족장까지 모두 죽였지. 금 한 자루를 위해서. 그들의 목숨 값으로는 너무 싼 금액이었어.”

시비르는 세 남자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그들은 물가에서 걸어나와 시비르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금으로 뭘 했게? 하룻밤 만에 도박으로 날려버렸지!”
“혀를 잘못 놀린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우리 친척들의 원한도 유감없이 갚아주지.” 덩치 큰 남자가 을러댔다.

“그래, 죽인 게 후회되긴 해. 겨우 금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죽이기에는 아까운 목숨들이었으니까. 지금도 나는 너희를 죽이고 싶지는 않다. 겨우 물 몇 모금 때문에 이러기는 싫다고.”

덩치 큰 남자가 초조하게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나는 지금 경고를 하는 것이다. 너희가 움직이기도 전에 나는 저 검을 주울 수 있어. 그렇게 되면 너흰 모두 죽는다.”
시비르는 누런 흙탕물이 일렁이는 샘을 흘끔 눈짓하고 말을 이었다.
“너희 목숨은 저것보다야 가치 있지 않나?”

“명예를 위해서라면 죽음은 두렵지 않다!”
덩치 큰 남자가 엄포를 놓았지만, 나머지 두 명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네가 원한을 갚아주겠다고 하는 그 스무 명을 내가 어떻게 죽였는지 알기나 하나? 그때는 저 무기가 굳이 필요하지도 않았어. 그런데 너희는 고작 세 명뿐이잖아?”

세 사람이 머뭇거렸다. 시비르의 위협을 무시하기에는 그녀의 명성이 너무 대단했다. 결국 보초 둘이 덩치 큰 남자를 끌어당기면서 눈치를 줬다. 시비르는 샘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

“우리 전사들을 더 데려와서 복수하겠다!”

크타온족 남자들이 자기네가 탈 말 쪽으로 슬금슬금 내빼면서 소리쳤다.
“그런 짓을 시도한 사람들은 예전에도 많았어.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지만.”

시비르는 부어오른 혀로 입 천장을 핥았다. 지금 당장 무릎을 꿇고 샘물을 마시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저들이 모래 언덕을 넘어가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시비르는 남자들이 말에 올라타고 도망치는 뒷모습을 끈질기게 지켜보았다.

그런데 아까 들었던 그 이상한 소음이 또 들려왔다. 우르릉 하는 소리가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이건 말발굽 소리도, 모래가 움직이는 소리도 아니었다. 시비르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다.

말라붙은 강바닥에 푸른 물줄기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그 고대의 도시에서 나오는 물이 분명했다. 폭포수처럼 흘러 들어오는 물이 시비르의 다리를 적신 순간, 공기중에 확 피어오르는 시원한 습기가 살갗에 와 닿았다. 뜻밖의 키스처럼 놀라운 감각이었다. 무릎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차가워서 피부가 아려왔지만, 곧 허리까지 물이 차오르자 상쾌하게만 느껴졌다.
시비르는 물속에 드러누웠다. 따가운 모래 알갱이들이 씻겨 내려가고, 머리카락이 가뿐하게 떠올라 물결에 일렁거렸다. 그녀는 자신을 뒤덮고 흘러가는 물살을 느끼며 생각했다.

‘나는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렇다면 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해.'

4. 사막의 후예

5. 불의 축제 세계관

리그 오브 레전드/스킨 세계관 불의 축제 참고 바람.

5.1. 가면의 시험

세상이 거울이라고 상상해 봐.

시비르는 장미 꽃잎으로 우려낸 차를 홀짝이며 창밖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봤다. 차가 입안에서 혀를 부드럽게 감쌌다. 분홍빛의 장미 꽃잎은 부드럽고 섬세했다. 잿빛 하늘에는 바람 한 점 없었고, 짚으로 엮은 바닥 아래의 단단한 토양은 시비르를 단 하나의 거부할 수 없는 현실에 묶어두고 있었다.

시비르는 일생 대부분을 수기루라는 작은 마을에서 보냈다. 자그마한 주방이 딸린 오두막집에 살면서 시비르는 흙과 풀, 그리고 집과 마을 사람들에 익숙해졌다. 시비르에게 세상은 거울일 수 없었다. 세상은 딱딱하고 실체가 있었다.

시비르의 세상은 거울이 아니었다.

시비르는 방구석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곳엔 어떤 물건이 있었다. 전부터 거기 있었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다음 날에도 계속 있을지 모른다. 그 물건은 티 하나 없이 깨끗한 황금 고리였다. 난해하게 생겼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시무시하게 생겼다고 해야 할까. 고리는 살이 베일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것은 나침반이자, 별이었고 무기이자 열쇠였다. 한때 땅속에 묻혀 있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시비르와 황금 고리는 그 자리에 있었다. 시비르는 장미 꽃잎으로 우려낸 차를 마셨다. 찻잔이 시비르의 입술로 몇 번이고 오르내렸지만 찻잔은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다. 창밖으로는 해가 떠오르지 않았고, 나뭇잎은 끊임없이 떨어졌다. 몇 시간이 며칠이 되었고, 며칠은 몇 년이 되었다. 시비르는 바다 한가운데 작은 섬 위에 있는 작은 마을의 작은 주방이 딸린 작은 오두막에서 시선을 고정한 채 서 있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시비르는 방구석으로 시선을 슬쩍 돌렸다. 고리가 커지고 있었다.

온 신경이 얼어붙었다. 고리의 중심부로 투명한 밤의 바다가 펼쳐졌다. 아무것도 금빛 고리 안에 끝없이 펼쳐진 검은 수평선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안에는 늙은 어부가 있었다. 고리 속으로 펼쳐진 심연과 대비되어 두드러져 보였다. 어부는 시비르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렸다가 수백 개의 치아를 드러내며 활짝 웃어 보였다.

어부는 작살을 던지려고 몸을 돌려 묵직한 발걸음을 옮겼다. 작살은 호를 그리며 끝없이 위로 솟구쳤다가 새카맣게 반짝이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고리는 점점 커졌고 고리 안에선 끈적한 붉은 액체가 흘러나와 방안을 채웠다. 곧 집 안을 가득 채운 액체는 창문과 대문을 박살 내며 밖으로 터져나갔다. 고리는 지붕을 뚫고 나갔고, 오두막은 잘려 앞으로 떨어져 나갔다. 고리는 계속 커져서 시비르의 오두막이 있는 땅을 섬에서 잘라냈다. 바다에 빠진 시비르의 주위에는 공허만이 존재했다. 시비르는 바다 밑에서 뭔가를 건져 올리는 어부의 모습을 바라봤다.

어부는 착실하게 작살을 끌어 올렸다.

시비르는 황금 고리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상처가 났지만 아프지 않았다. 시비르는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신의 피가 고리에 스며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진한 주홍빛의 핏줄기가 고리를 따라 흘렀다. 피는 고리 표면에 새겨진 미궁 같은 무늬를 따라 끝없는 공허가 퍼지고 있는 중앙을 향해 흘러갔다. 그 순간 고리가 다시 줄어들면서 함께 열렸던 관문도 닫혔고, 약하게 새어 나오던 어둠도 완전히 사라졌다.

시비르는 장미 꽃잎으로 우려낸 차를 마시며 창밖으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봤다. 낮이 되자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고, 바람에 흔들리던 나무들도 차분해졌다. 찻잔 옆으로 피가 묻어 있었고, 바닥에는 검은 액체가 흘러 있었다.

핏빛 달이 뜨기 사흘 전, 쌍둥이 자매가 해변에서 실종되었다. 그날 낮은 유난히 길었다. 시비르는 저녁 공기를 꿰뚫던 마을 어른들의 통곡 소리를 기억했다. 마을 사람들은 공을 들여 장례식을 치렀다. 그리고 종이 등불을 바다 위로 가득 띄워 보냈다. 길 잃은 영혼들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하는 전통 의식이었다. 소녀들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

시비르는 방구석에 있는 고리를 바라보았다.

고리는 고요했다. 당장은 배가 부른 듯 보였다.

육신은 불완전하다.

몇 시간 동안 숲속에서 고리를 파낸 시비르는 고리에 손이 잘려나갈 뻔한 뒤에야 땅을 파던 손을 멈췄다. 오래된 돌 옆으로 번쩍이는 고리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시비르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날이 저물어 있었다. 자신이 왜 그러고 있었는지, 어쩌다 그곳에 가게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시비르는 고리를 가지고 마을로 갔다.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치 투명한 호수 바닥에 있어 닿을 수 없는 무언가처럼 기억이 멀고 낯설게 느껴졌다. 시비르는 고리를 섬 반대편으로 가져가 모래 속에 묻었다가 다시 바다로 던져버렸다.

고리는 언제나 돌아와 먼지 쌓인 집 한구석에서 조용히 그녀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고리를 바라볼 때마다 몇 번이고 커졌다. 고리 안에선 늙은 어부가 시비르를 바라봤다. 고요하고 새까만 밤, 어부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이름 모를 공포를 낚아 올렸다.

가끔 시비르는 자신이 죽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시비르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조개껍데기로 정교하게 만든 작은 팔찌 한 쌍을 만지작거렸다. 흐릿하게 기억나는 악몽 속에서 시비르는 두 소녀를 발견했다. 소녀들은 서로 손을 잡은 채 달이 비치는 핏빛 바다 위를 떠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너와 함께 있다.

시비르의 집은 섬의 끝자락에 있었다. 섬은 조용했고 집 옆으로 이어지는 해안 길 아래로 자그마한 섬들이 모여있었다. 수기루 마을과의 거리도 적절했다. 마을 내 소란에 휘말리지 않을 만큼 떨어져 있었지만, 마을 공동체에서 배척당할 정도로 멀진 않았다. 시비르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볼 때마다 추락한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해변에는 또 다른 시비르가 서 있었다. 또 다른 시비르는 수백 명의 피를 손에 묻힌 채 시비르를 올려다봤다.

핏빛 달이 떠오르기 이틀 전, 시비르는 솜과 짚으로 만든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비르는 복도 끝에 서 있는 또 다른 시비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에 황금 고리를 쥐고 있었다. 너무 꽉 쥔 나머지 손가락이 베일 것 같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뿔이 난 악마 형상을 한 나무 반가면을 들고 있었다. 그러더니 가면을 든 손을 얼굴에 가져갔다. 시비르는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뜨자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시비르의 기억은 가끔 포개졌다. 긴 시간이 시비르의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요즘은 영문도 모른 채 바깥에서 텅 빈 하늘을 올려다보다 정신을 차리곤 했다. 시비르는 마을을 거닐며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숲속을 걸을 때는 그 고요함을 즐겼다. 발아래를 내려다보자 한 남자의 두개골이 놓여있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만났던 남자였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자 그 남자와 항구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남자는 시비르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시비르는 머릿속으로 그 남자의 목을 조르는 상상을 했다.

시비르의 손가락이 길어지고 휘어졌다.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얼룩진 피부가 꿈틀거렸다. 머리에선 거대한 뿔이 솟아났다. 필멸의 육체가 고치처럼 갈라졌고 안에 숨겨져 있던 진정한 육체가 드러났다. 그녀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울부짖자 작고 가엾은 생명들은 살기 위해 도망쳤다. 시비르는 세상과 반대로 움직였다. 날카로운 발톱으로 먹잇감을 짓누르듯 두 발로 시간을 거슬러 걸어갔다. 시비르는 집을 허물고 겁에 질린 채 숨어있는 자들을 습격하며 그들의 비명에 귀 기울였다. 피는 강이 되어 시비르의 거대한 그림자를 지나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

순간 시비르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해변에 서서 죽은 소녀들의 조개 팔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밤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시간이 갈수록 햇빛은 차가운 별들의 장막 아래로 자취를 감췄다. 시비르는 잔잔하고 어두컴컴한 바다 앞에 서 있었다. 빛을 잃은 파도가 반사되지 않는 시비르의 거울 세계로 밀려들었다.

너의 진정한 얼굴.

광활한 공허에서 어부의 작살은 노래를 불렀다. 어부가 작살을 던질 때마다 빛과 소리가 힘을 잃었다. 작살은 어부의 발밑에 끝없이 펼쳐진 틈 속으로 떨어졌다. 노인의 바다는 끝이 없었으며, 무한의 허무가 이중으로 반사되는, 길 잃고 이름 없는 시대의 무덤이었다. 어부는 고대의 상어를 갈망하며 미소지었다.

작살이 단단히 고정되자 어부는 깊은 바다에서 거대한 형체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어부의 검은 수평선 끝자락에서 거대한 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 형체는 탑이자 요새, 그리고 태양이었다. 안에서는 끈적한 액체가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칠흑 같은 어둠의 벽이 잊힌 먼바다의 심연에서 튀어나왔다. 형체의 표면에서 작살이 빠져나왔다. 작살 끝에는 나무 가면이 꽂혀 있었다.

핏빛 달이 뜨기 하루 전, 시비르는 가면을 썼다.

내려온다.

시비르는 시비르였지만, 시비르가 아니었다.

시비르는 핏빛 달의 붉은 빛을 받으며 황량한 수기루 마을을 거닐었다. 한 손에는 황금 고리를, 다른 한 손에는 가면을 들고 있었다. 작은 소리에도 시비르의 근육은 움찔거렸다. 뱃속은 뒤틀렸고 조약돌은 끝없이 밀려드는 생명의 파도에 부드럽게 씻겨져 나왔다.

사방에 시체가 가득했다. 수천 개의 망가진 인형들이 추악한 황홀경에 빠져 팔을 뻗고 있었다. 오래전에 떠난 구원자들을 갈망하며 얼어붙어 있었다. 그곳은 아름다운 정원이었고 이들의 뒤틀린 손바닥은 꽃이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존재들에게 바칠 어둡고 사치스러운 수확물이었다. 몇몇은 아직 숨이 붙어있었는지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핏빛 달이 내려왔다.

핏빛 달은 생각보다 컸다. 거대하고 붉은 구체는 길을 잃고 어쩔 줄 모르는 시비르와 섬 위로 드리웠다. 하지만 바다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핏빛 달에 맞먹는 존재는 없기 때문이었다. 핏빛 달은 원래의 달을 통째로 삼켰지만, 그 끝없는 굶주림은 채워지지 않았다.

시비르는 나무 가면과 황금 고리를 떨어트렸다. 그리고 핏빛 달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핏빛 달의 중심에는 날개가 퍼덕였고 끓어오르는 피가 물결쳤다. 핏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쌍둥이 영혼이 낳은 악마의 자식, 인간의 형태를 한 거대한 악마였다. 핏빛 달이 쪼개지자 악마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다로 떨어진 거대한 악마의 손에는 해괴망측한 칼이 들려 있었다. 악마가 날갯짓하자 빙하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봉인되었던 악마가 다시 깨어났다.

그 순간 시비르는 창밖으로 떨어지는 나뭇잎과 장미 꽃잎으로 우려낸 차를 생각했다. 그리고 작은 섬에 있는 자신의 작은 오두막을 떠올렸다. 그 섬이 너무나도 작게 느껴졌다. 시비르의 의식은 바닷가에 있던 소녀들에게 흘러갔다. 창백하고 무능한 거짓말쟁이의 모습 옆으로 소녀들이 떠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시비르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존재를 생각했다. 형언할 수 없는 고대의 악마가 붉은 달빛 아래에 서서 사악한 말을 속삭였다.

시비르는 고개를 들어 세상이 거울이라고 상상했다.

달은 시비르의 두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리곤 감싸 안았다.

6. 구 설정

6.1. 구 단문 배경

특유의 무자비함으로 명성을 떨친 용병 시비르. 모두들 그녀를 전장의 여제라는 호칭으로 부른다. 꺾이지 않는 용기와 끝없는 야망으로 똘똘 뭉친 시비르는 엄청난 유명세와 부를 모두 거머쥐었다. 이런 그녀의 앞에 조상 대대로 내려온 비밀이 그 정체를 드러냈다. 시비르는 이제 자신이 택한 길을 걸을 것인지, 숙명을 따를 것인지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6.2. 구 장문 배경 1

시비르라고 알려진 아름답고 치명적인 영웅은 지난 10년간 리그의 소환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영웅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정의의 전장으로 오기 전 용병으로 생활했다. 그녀는 현재의 룬테라에서 많은 성공을 거둔 용병의 전형이었다. 시비르는 리그의 대결 성적을 기록하는 '점수판'에는 별 관심이 없다. 대신 그녀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물질적인 부와 재물이다. 그리고 그녀는 두둑한 대가를 받지 않는 한 일을 의뢰받지 않는다. 시비르는 발로란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다. 시비르는 여러 국가에 집 여러 채를 보유하고 있으며 발로란 전역에 사업채 여러 개 또한 운영하고 있다. 그녀의 성공을 부러워하거나 아니면 그녀의 유연한 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이들은 시비르를 예로 들어 리그의 잘못된 점을 비판한다. 그들은 리그의 본질 자체가 용병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꼬집는다. 그러나 시비르는 그런 비평에 개의치 않는다. 그녀는 자신의 개인적인 윤리 규범이 그녀의 경쟁자들보다 더 관용적이라고 주장하며 "누구나 대가를 바란다."라고 말한다.

시비르는 그녀의 걸출한 경력 기간에 많은 칭호와 포상을 받았지만, 최근까지 그녀를 따라다녔던 칭호는 '녹서스의 전장의 여제'이었다. 녹서스 사령부와 계약을 파기한 후 그녀는 이제 그냥 "전장의 여제"로 불린다. 녹서스가 평화로운 섬 국가 아이오니아를 침략했을 때 시비르는 용기 있게 이의를 제기했다. 물론 그녀가 꿍꿍이속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가 예고한 데로 이오니아가 끝없이 공격해 들어오는 녹서스의 군대를 저지하고 나서자 양국은 피비린내 나는 교착 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녀는 녹서스 사령부가 감을 잊어버렸다고 주장한 후 녹서스를 떠나버렸다. 그 후 그녀는 전쟁 학회에 합류한다. 녹서스 사령부는 그녀를 처단하기 위해 암살자들을 고용한 뒤 그녀에게 보냈지만 아무도 그녀를 처단하지 못했고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시비르는 몇 번이고 계속해서 자신이 '최고의 용병'이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 잭스

6.3. 구 장문 배경 2

'전장의 여제'라는 말을 들으면 제일 먼저 누가 떠오르는가? 각자 생각나는 인물이 하나씩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발로란 사람들은 딱 한 사람만을 떠올린다. 그녀의 이름은 시비르, 무한한 야심과 불굴의 용맹함을 겸비한 보물 사냥꾼이다. 그녀는 훌륭한 전투 기술로 높은 명성과 막대한 재산을 일구어냈다. 그러나 조상 대대로 내려온 비밀이 드러나면서, 시비르는 이제 자신이 택한 길을 걷느냐 숙명을 받아들이느냐를 두고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시비르는 슈리마 사막지대의 유목민 부족으로 태어나 성장했다. 맘 가는 대로 이리저리 떠도는 삶을 살았고 자연스럽게 유적을 도굴하는 기술을 익혔다. 게다가 시비르는 아주 뛰어난 용병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으며 손쉽게 부와 추종자들을 끌어 모았다. 그녀의 이름은 곧 사막 바깥까지 알려졌고 발로란 전역에 살고 있는 부유한 후원자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그 중 가장 강력한 후원자는 녹서스 최고 사령부였다. 잔혹한 국민성으로 유명한 녹서스가 시비르에게 떠맡기는 임무는 제멋대로일 때가 많았지만, 누구보다 월등한 능력을 지닌 시비르는 군말 없이 모든 임무를 완수했고 녹서스의 훌륭한 협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 밀접한 결속은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아이오니아와의 전쟁이 견고했던 관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시비르는 녹서스가 벌이는 아이오니아 침략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고, 곧 녹서스와의 연을 끊어버렸다.

얼마 후 녹서스인들이 찾아왔다. 그런데 시비르가 예상한 것과는 달리 찾아온 것은 암살자가 아니라 뜻밖의 인물이었다. 녹서스에서 가장 명망 높은 가문의 자녀인 카시오페아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녀는 고대 슈리마의 숨겨진 유산, 엄청난 보물이 숨겨진 장소를 발견했다고 전하며, 노련한 도굴 전문가 시비르와 함께 보물을 찾아 나서고자 했다.

시비르는 결국 카시오페아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상보다 엄청난 것이었다. 고대의 무덤에는 카시오페아가 장담했던 보물도, 그토록 탐냈던 무기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카시오페아가 시비르의 경고를 무시하고 봉인된 방의 문을 열어젖히면서 시비르의 삶뿐만 아니라 슈리마 전체를 영원히 바꾸어놓을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잃어버린 건 찾을 수 있지... 물론 팔 수도 있고 말이야." - 시비르

6.4. 구 장문 배경 3

##
"금화든 은화든 상관 없어. 보수만 짭짤하면 그만이지."

시비르는 슈리마 사막에서 활동하는 보물 사냥꾼이자 용병 대장이다. 몸값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비싸지만 전투를 벌이는 족족 이겨 몸값에 걸맞은 솜씨로 명성이 자자하다. 대담무쌍한 성격에 원대한 야심까지 겸비한 시비르. 그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슈리마의 묘역에서 진귀한 보물을 찾으며 남다른 자부심을 느낀다. 의뢰인에게서 두둑한 대가를 챙기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슈리마에 고대의 존재들이 귀환하면서 시비르도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사막에서의 삶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시비르가 뼈아프게 깨달았던 건 차마 입에 올리기조차 힘든 일을 겪고 난 후였다. 바로 크타온족, 슈리마 제국의 가장 악명 높은 침입자인 그들의 손에 온 가족이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이 참혹한 사건 이후, 시비르는 동네 좌판에서 먹을 것을 훔치고 슈리마의 묘역에서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찾아내 근근이 생활을 이어나갔다.

값나가는 물건들은 이미 도적떼들이 한 차례 휩쓸고 간 뒤였다. 하지만 시비르는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내는 데 탁월한 수완을 보였다. 예리한 관찰력과 단호한 의지를 바탕으로 그녀는 비밀 통로를 찾아냈고, 또 아주 오랜 수수께끼를 풀어 그 동안 드러나있지 않던 지하 묘지도 발굴해 냈다. 이 과정에서 눈앞에 닥친 위기를 재빠르게 모면했음은 물론이다.

때때로 시비르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보물 사냥꾼 일을 함께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하기도 했다. 혼자서는 힘에 부쳤기 때문이었다. 손에 쥔 것이라곤 고작 밧줄과 양초 몇 개뿐. 더구나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매번 비좁은 터널 아래로 내려가 돈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 헤매는 것은 여간 고달픈 일이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몇몇과 팀을 이루어 보물 사냥을 하던 시비르는 비밀 무덤 하나를 파헤치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필시 어마어마한 양의 값비싼 물건들이 묻혀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라는 기분 좋은 상상도 마음껏 했다. 무덤 아래로 내려가 몇 시간을 탐색한 끝에 드디어 숨겨진 출입구 하나를 발견해냈다. 하지만 그곳으로 이어진 건 티끌 하나도 없는 텅 빈 방이었다. 몇 시간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자 이에 격분한 시비르의 오랜 동료 마이라는 그녀에게 자격이 없다며 리더 자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시비르는 말 같지 않은 소리라며 단칼에 거절했고, 결국 피 튀기는 싸움이 오고 갔다. 시비르보다 훨씬 큰 체구에 힘도 센 마이라는 재빨리 그녀를 제압해버렸고, 결국 시비르는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몇 시간 뒤, 어둠 속에서 겨우 정신을 차린 시비르는 불빛을 찾아 더듬더듬 빠져 나왔다. 그렇게 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가 마주한 건 비통한 현실이었다. 자신을 배반한 마이라가 모든 재산을 챙겨 달아나버린 것이었다.

그 후, 시비르는 두 번 다시 배신 따위는 당하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자신을 스스로 지켜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아이하 지하로우가 이끄는 전설의 용병 부대에 가입했다. 그곳에서 전쟁 물자를 나르고 때로는 길을 찾는 역할도 하면서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그렇게 수년을 그 속에서 생활했지만 시비르는 담요 밑에 늘 단검을 숨겨 놓고 지냈다. 지하로우는 물론 그의 부하들까지 누구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돈만 주면 충성 따위는 쉽게 내던질 수 있는 족속이라는 것을 시비르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시비르는 그들과 함께 생활하며 할 수 있는 한 뭐든 배우고자 노력했다. 매일같이 어린 용병들과 대적하며 이를 악물고 싸움의 기술을 익혔다.

이런 결연한 의지를 바탕으로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것을 눈여겨 본 아이하 지하로우는 시비르를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 지하로우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대단히 명예로운 일로 아무나 누릴 수 있는 영광이 아니었다. 이후 몇 년의 시간이 흘러 시비르는 그 누구도 함부로 대적하지 못할 강한 전사로 성장했다. 그녀는 아이하가 이끄는 부대의 병사로서 수많은 적을 무찔렀다. 전쟁이 끝난 후, 시비르는 원정대를 결성하여 슈리마의 잃어버린 보물을 찾아 나섰다. 갈 곳 잃은 용병들이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시비르도 차츰 지하로우의 그늘에서 벗어나길 원하게 되었다. 사실 지하로우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은 슈리마 지하 무덤의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던 시비르 덕분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금은보화는 물론 모든 영광은 오롯이 지하로우의 몫이었다. 더욱이 명예를 중시하는 지하로우의 태도는 시비르와 좀처럼 맞지 않았다. 지하로우는 피도 눈물도 없는 잔혹한 지도자라는 말까지는 듣고 싶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비르는 달랐다. 돈이 될만한 것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손에 피를 묻히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도덕의 잣대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상당수의 용병이 시비르와 동조하여 지하로우를 축출하는 데 모의했다. 그런데 시행 전날, 이 음모는 발각되고 말았다. 모든 사실을 알아버린 지하로우는 시비르가 잠든 틈을 타 그녀를 제거해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시비르도 그 정도의 공격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결국 맹렬한 혈투가 벌어졌고 지하로우는 시비르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하지만 시비르는 한 때 자신을 자식처럼 돌봐주었던 지하로우의 목숨까지 앗아버릴 수는 없었다. 고아나 다름없던 처지에서 지금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지하로우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비르는 반쯤 채워진 물통 하나와 동전 한 닢만을 쥐여주고는 지하로우를 사막 한 가운데 홀로 남겨둔 채 떠나왔다.

시비르가 이끄는 부대의 명성은 순식간에 슈리마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갔다. 무시무시한 전력을 지녔음은 물론 전설 속의 유물 발굴에도 탁월한 수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막 내 각 거물, 부호, 유물 수집가들은 앞다투어 시비르에게 전쟁 지휘를 맡기거나 숨겨져 있는 각종 진귀한 보석들을 찾아 달라고 주문했다. 위험 지역을 탐험하며 고대 유물을 파헤치는 것은 꽤 높은 수준의 대가가 요구되는 일이었지만 비용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시비르만 영입할 수 있다면 얼마가 됐든 기꺼이 지불했다. 시비르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사항은 제각각이었다. 슈리마의 족장들은 녹서스 무리로부터 영토를 지켜줄 것을, 군 지도자들은 병력을 투입하여 적군을 초기에 제압해 줄 것을 요구했다.

일천 번의 폭풍이 몰아치던 해에, 슈리마 제국의 고대 도시 나시라미의 영주는 시비르에게 십자 모양의 칼날을 찾아줄 것을 부탁했다. 그것은 나시라미에서 대대로 내려오던 보물이었다. 영주는 감시 병력까지 보내는 등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몇 달에 걸쳐 이루어진 탐색 끝에 시비르는 마침내 칼날의 위치를 찾아냈다. 그것은 수십 톤에 달하는 돌무더기 속, 어느 옛 영웅의 석관 안에 감춰져 있었다. 이토록 깊은 곳에 있는 것을 감지해내다니! 가히 신기에 가까운 능력이 아닐 수 없었다. 칼날은 온통 금과 에메랄드 빛으로 반짝였다. 아주 오래 전의 물건이었지만 마치 근래에 만들어진 것인 양 그 칼날은 매섭게 빛났다.

순간 시비르는 섬뜩해졌다. 칼날이 마치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함께 온 나시라미 감시병의 우두머리가 칼날을 내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시비르는 이미 자신의 손에 넣기로 작정한 터였다. 그녀는 원을 그리며 십자 칼날을 휙 던졌다. 그러자 감시 군단의 우두머리를 포함, 그 뒤에 서 있던 세 명의 감시병까지 순식간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러고 나서 칼날은 다시 시비르의 손으로 돌아왔다. 범상치 않은 무기임에 틀림없었다.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은 너무나 자연스러웠지만 던질 때만큼은 아주 힘있게 뻗어 나갔다. 나시라미 감시병의 시체를 대동한 채, 시비르는 위풍당당하게 무덤을 빠져나갔다.

시비르의 위업과 극악무도한 전력은 슈리마 제국에서라면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미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어느덧 이웃 나라에서도 그녀는 꽤 유명인사가 되어 녹서스의 여성 귀족 카시오페아까지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카시오페아는 자신이 찾는 유물이 슈리마의 사막 한가운데 묻혀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반드시 찾고 말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돈은 얼마든지 지불하겠노라며 그녀는 시비르를 고용하여 유물 찾기 여정에 나섰다.

시비르는 본능적으로 카시오페아를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꽤 돈이 되는 이번 일을 놓칠 수는 없었다. 마치 미로 같이 구불구불한 지하 무덤으로 내려가면서 시비르 용병 중 상당수는 덫에 걸려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카시오페아는 되돌아 가려 하지 않았다.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어둠 속에서 얼마간 헤매고 난 후, 시비르와 카시오페아는 드디어 희미하게 새겨진 그림 조각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고대 황제와 초월체 전사들을 새긴 것으로 이들의 머리는 짐승처럼 묘사되어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대부분의 건축물은 분명 모래사막 아래에 수천년 동안 묻혀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 조각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조각물을 응시하던 찰나, 시비르는 오싹한 기운에 사로잡혔다. 그녀의 운명이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사막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카시오페아가 그녀의 등에 십자 칼날을 내리꽂은 것이다. 시비르는 고통 속에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붉은 피가 모래사막을 물들였다. 마치 꺼져 가는 등불처럼 시비르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지만 시비르의 운명은 결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녀가 흘린 피 속에서 선대 왕 아지르가 부활한 것이다. 아지르 왕은 시비르의 시체를 생명의 오아시스로 옮겼다. 이곳은 치유의 샘물이 흐르는 성스러운 물가였다. 수 천 년이 넘도록 바싹 말라 있던 오아시스는 이제 아지르의 부활과 함께 수정처럼 맑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변화되었다. 치유의 물이 시비르의 시체를 뒤덮자 깊이 팬 칼자국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헉헉거리며 숨을 뱉어낸 시비르는 힘겹게 눈을 떴다. 그러고는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다.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마치 꿈속을 헤매는 듯 보였다. 어딘가 익숙한, 온화한 표정의 얼굴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비르는 자신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분간되지 않았다. 그녀를 빙 둘러싼 채 희뿌연 먼지가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그러면서 마치 그림을 그리듯 순식간에 우뚝 솟은 궁전과 화려하게 장식된 사원, 드넓은 광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래 무덤 위에서 슈리마 제국의 옛 도시가 다시 한 번 탄생한 것이다. 아지르의 부활과 함께 이 고대 도시는 이전의 장엄한 영광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시비르는 어릴 적부터 전설의 초월체에 대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자랐지만 애당초 어린애들이나 믿는 한낱 소설 같은 이야기로 치부해 버렸었다. 그러나 허허벌판의 모래사막에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된 고대 도시가 지금 그녀의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또 옛이야기 속에서나 들어봤을 법한 아지르 왕과 마주한 채 그에게서 오랜 혈통과 왕국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시비르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지금까지 사실이라고 믿어온 것들이 전부 거짓인 것만 같았다.

아지르의 이야기들이 여전히 귓가에 울리는 듯했지만 시비르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잃어버린 옛 제국의 후계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모든 생각을 애써 지워내고자 했다. 아지르의 모든 말이 사실이라 해도 슈리마 제국의 여러 종족이 하나로 통일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만큼은 확실했다. 강력한 군 지도자가 나타나 돈과 병사를 등에 업고 몇몇 소수 종족을 다스릴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한때일 뿐, 결코 지속되기는 힘들어 보였다. 단일 군주 아래 단일 제국. 그것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지르가 부강했던 옛 제국의 명성을 되살리기 위해 본격적으로 노력하기 시작하자 시비르는 이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좋건 나쁘건, 운명의 그림자는 이미 드리워져 있었다. 그녀는 인생의 두 번째 기회와 마주한 것이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다. 주어진 길을 따라야 할 뿐. 이제 새로운 유산을 만들어가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