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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1:27:00

시몬 레케

파일:Simón Lecue.jpg
이름 시몬 레쿠에
Simón Lecue
본명 시몬 레쿠에 안드라데
Simón Lecue Andrade
출생 1912년 2월 11일
스페인 왕국 바스크 아리고리아가
사망 1984년 2월 27일 (향년 72세)
스페인 마드리드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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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바스크 아리고리아가
포지션 인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레프트 윙 하프
신체조건 175cm / 73kg
등번호 -[1]
소속팀 데포르티보 알라베스 (1930~1932)
레알 베티스 (1932~1935)
레알 마드리드 CF (1935~1942)
발렌시아 CF (1942~1946)
에르쿨레스 CF (1947)
참베리 (1947~1948)
레알 사라고사 (1948~1949)
국가대표 7경기 1골 ( 스페인 / 1934~1936)

1. 생애
1.1. 축구 선수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3. 수상
3.1.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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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2]

1.1. 축구 선수

1.1.1. 클럽

레케는 데포르티보 아리고리아가(Deportivo Arrigorriaga), CD 바스코니아(CD Baskonia)를 거쳐 1930-31 시즌부터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에서 뛰게 되었다. 당시 데포르티보 알라베스에는 하신토 킨코세스가 있었고 레케가 합류하던 시점엔 프리메라 디비시온에 승격했었다.

알라베스에서 2시즌을 보낸 레케는 레알 베티스로 이적했고 1934-35 시즌에는 베티스의 첫 리그 우승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1부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이 우승으로 인해 레케는 레알 마드리드에 6만 페세타를 베티스에 안겨주며 팀을 옮겼다.[3]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한 레케는 1936년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2대0으로 달아나는 추가골을 넣어 레알 마드리드 커리어에서 유일한 우승 트로피를 들었다. 하지만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지면서 3년간 모든 축구 선수들의 커리어는 개점휴업 상태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이 끝난 후 레케는 1939-40 시즌에 리그에서 12골을 넣는 등 분전했지만 레알 마드리드는 레케가 있는 동안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고 결국 1942년 레케는 발렌시아 소속으로 다시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발렌시아에서 레케는 기예르모 고로스티사 등과 함께 발렌시아를 1943-44 시즌 우승으로 이끌었고 1944년부터의 코파 델 레이 3연속 준우승에도 기여했다.

1946년, 발렌시아를 떠난 레케는 참베리(Chamberi)를 거쳐 1948-49 시즌에 세군다 디비시온 소속의 레알 사라고사에서 커리어를 마무리지었다.

1.1.2. 국가대표

레케의 A매치 데뷔전은 1934년 월드컵 1라운드 경기 브라질전이었다. 레케는 인사이드 레프트 포워드로 출전했고 이 경기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 스페인의 3대1 승리를 이끌었다.

레케는 8강전 재경기에서 레프트 윙 하프로 출전했지만 스페인은 대회 우승팀이 될 이탈리아에 0대1로 패했다.

그 이후 레케는 1935년부터 1936년까지 5경기에 더 출전했고 총 7경기에 출전, 1골을 기록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강력한 중거리 슈팅과 프리킥이 강점이었다.

3. 수상

3.1. 클럽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3] 6만 페세타의 이적료는 당시 스페인 축구계 최고 이적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