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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7 12:58:38

시마다 모토타로



시마다 모토타로
[ruby(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 ruby=島田元太郎)]
주요 직책 니항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 조선 평양 위안소 경영자, 사할린섬 석유개발
출생 1870년 나가사키현
사망 1945년 조선 평양 (향년 75세)
파일:시마다 모토타로.jpg
1. 개요2. 생애3.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의 사할린섬과 연해주 진출을 이끈 사람중 한명4. 관련 인물5. 관련 자료 출처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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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이름은 Петр Николаевич Симада Мототаро이다.
1886년 7월 21일경 아무르강 하류 니콜라예프스크 나 아무레(니항 = Nikolaevsk-on-Amur)시로 이주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 러시아 정교회 신앙으로 개종하고 정교회 이름과 애칭인 '표트르 니콜라예비치'를 사용했다.
1800년대 말부터 1900년대 초반 일본인들의 시베리아, 사할린주 진출을 주도한 사람중 한명이었다.
그리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침략(출병) 시기, 사할린주 주도 니항일대의 일본인 거류민회 회장이었으며 일본 해군부의 지원을 받은 최고위급 밀정이었다.
밀정행위, 인신매매 성매매업(일명 : 가라유키상), 사할린섬 석유개발, 금광 광산업 등으로 일본 제국 성장에 크게 기여하여 천황에게서 수차례 훈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1870년 일본 나가사키현에서 출생 ~ 1945년경 조선 평양에서 사망.

1920년경 러시아 극동 사할린 주의 대표적인 일본인 기업가(Торговый дом Симада П. Н.), 성매매업 종사자(일명 : 위안소 운영, 가라유키상 Караюки-Сан 상인), 니항사건 관련 사진에 맨 먼저 등장하는 무역 회사 '시마다 상회'의 소유자였으며 조선인 노동자와 가라유키상을 활용하기도 했다.
파일:니항위안소인근.jpg
니콜라예프스크에 있었던 일본군 위안소 인근의 일본인 거주지 전경

3.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의 사할린섬과 연해주 진출을 이끈 사람중 한명

1918년 일본의 시베리아와 사할린섬 침략 시기 시베리아와 몽골 일대의 일본인 밀정 수는 대략 4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이것은 일본 군대내의 정보원과 일본인 민간인(상인) 밀정 등을 모두 합한 수로 볼 수 있다.

시마다는 일본 해군 고위층의 지원으로 동시베리아 사할린주 일대에서는 일본인중에서 최대 규모의 무역회사와 시베리아에 출정한 일본군들을 위한 성매매업소(일명 : 위안소)를 경영했다.
파일:시마다천황보고서.png
< 밀정 활동을 하던 시마다가 천황에게 보고한 사할린섬 석유관련 문서>

러시아 적백내전 무렵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맹활약한 배정자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정을 위해 엄청난 맹활약을 하였으며, 조선인 노예 노동자를 적극 활용했던 사람중 한명이다.

주로 일본, 사할린섬, 아무르강 하류의 사할린주, 연해주, 조선 평안도, 경남 진해,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시 등에서 상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에는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에서 화폐로 활용된 돈까지 발행했다.
파일:시마다의편지.jpg
시마다가 진해의 일본해군 장성 다나카 각하에게 보낸 엽서

1920년 초 발생한 니콜라예프스크 사건(일명 : 니항사건)에서 재산을 잃었고, 니콜라예프스크와 일본 본토에 일본군 충혼탑, 니항사건 순난자비( 尼港事件 殉難者碑) 건립과 일본, 조선, 시베리아에서 당시 일본육군상 다나카 기이치, 조선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 일본 황족, 해군 장성 다나카 고타로(해군) 등과 함께 니항사건 초혼제 행사를 주도하였고
니항사건에서 생환한 생환자들에 대한 보상 소송에도 앞장섰다.

1922년 일본군이 점령한 북위 50도 이상 북사할린섬에서 석유 개발업도 하였으나, 1925년 일본군의 북사할린섬 철수 후 조선총독부 관보 등에 따르면 조선 평안도 일대에서 광산업을 하였다.

조선 평안도에서의 광산업은 신통치 않았고,
평소 잘하던 가라유키상 성매매업 만주사변, 지나사변, 대동아전쟁 등 일본군의 잦은 전쟁으로 괜찮았다고 한다.

1945년 소련군이 평안도 평양에 들어올 무렵 소식이 끊어졌으며, 고령으로 인해 일본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4. 관련 인물

5. 관련 자료 출처

6.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