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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스타니스와프 1세 Stanisław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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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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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스타니스와프 보구스와프 레슈친스키 (Stanisław Bogusław Leszczyński) |
||
출생 | 1677년 10월 20일 | ||
폴란드-리투아니아 르부프 | |||
사망 | 1766년 2월 23일 (향년 88세) | ||
프랑스 왕국 뤼네빌 | |||
재위기간 |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 ||
1704년 7월 12일 ~ 1709년 7월 8일 | |||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복위) | |||
1733년 9월 12일 ~ 1736년 1월 26일 | |||
로트링겐 공국 공작 | |||
1737년 7월 9일 ~ 1766년 2월 23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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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0000><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라파우 레슈친스키 어머니 안나 레슈친스카 |
|
배우자 | 카타지나 오팔린스카 (1698년 결혼 / 1747년 사망) | ||
자녀 | 안나 레슈친스카, 마리아 레슈친스카 | ||
형제자매 | 없음 | ||
가문 | 레슈친스키 가문 | ||
종교 | 로마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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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왕(1704년 ~ 1709년, 1733년 ~ 1736년), 로렌 공작(1737년 ~ 1766년).2. 생애
2.1. 초년기
1677년 10월 20일 폴란드-리투아니아 르부프에서 폴란드 왕실 재무관 라파우 안제이 레슈친스키와 야전 원수 스타니스와프 얀 야브워노프스키의 딸인 안나 레슈친스카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는 해외에서 온 교사들로부터 우수한 교육을 받았고, 레즈노의 체육관에서 신체를 단련했다. 1695~1696년에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견식을 쌓기도 했다. 이후 포즈난 및 칼리슈 주의회 의원이 되었고, 1696년 9월 28일에 열린 세임에 출석했다.1697년 국왕 선거에서 아버지와 함께 전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아들 야쿠프 루드비크 소비에스키를 지지했지만, 나중에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를 지지했다.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2세로 즉위한 뒤에 왕실 술잔 관리인으로 선임되었고, 1699년 포즈난 주지사로 발탁되었다.
2.2.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1기
대북방전쟁 시기인 1704년 스웨덴군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수도 바르샤바를 함락시키자, 아우구스트 2세에 반대하는 폴란드 귀족들이 바르샤바에서 무장 연합을 결성하고 세임을 개최한 뒤 아우구스트 2세의 폐위를 선언했다. 그 역시 아우구스트 2세는 가망이 없다고 여기고 스웨덴 국왕 칼 12세를 찾아갔다. 칼 12세는 그가 비엘코폴스카(대폴란드) 지방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점을 높이 평가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내세웠다. 그는 처음에 야쿠프 루드비크 소비에스키가 돌아올 때까지 왕위를 임시로 받아들이겠다고 밝혔지만, 야쿠프가 칼 12세와 합류하러 가던 중 작센군에 사로잡히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에 정식으로 취임하기로 마음먹었다.1704년 7월 12일, 폴란드 귀족들은 바르샤바 인근에서 경비를 명목삼아 선거장을 포위한 스웨덴군의 압력을 받으며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의 왕위 등극에 찬성표를 던졌다. 그 해 10월 4일, 포즈난 주교 미코와이 시비엥치키의 주관하에 스타니스와프 1세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그는 칼 12세의 원정에 동행해 아우구스트 2세와 대적했다. 그동안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주둔한 작센군은 스타니스와프의 영지를 파괴했는데, 특히 그가 태어난 르부프는 이 시기에 심한 파괴와 방화를 겪었다.
1706년 2월 3일 프라우슈타트 전투에서 작센-루스 연합군 20,000명이 스웨덴군 9,400명을 상대로 맞붙었다가 적병 1,500명을 사상시키는 동안 15,000명이 죽거나 사로잡히는 처참한 패배를 당한 뒤 칼 12세가 여세를 이어가 작센으로 진격해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을 위협하자, 아우구스트 2세는 어쩔 수 없이 1706년 9월 알트란슈타트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포기하겠다는 협약을 맺었다. 그 후 스타니스와프는 작센 미텔자흐센 주의 라이스니히에 스웨덴군과 함께 머물렀다. 1707년 칼 12세가 루스군을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몰아내기 위해 동방으로 진군할 때 동행했다. 1708년 초까지 쿠와이에 머물렀다가 겨울에 칼 12세를 따라 흐로드나, 지에라노니, 빌뉴스에 이르렀다.
2.3. 망명기
1709년 7월 8일, 스웨덴군은 폴타바 전투에서 루스군에게 참패하고 칼 12세가 오스만 제국에 망명했다. 이후 아우구스트 2세가 작센군을 동원해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들어오고 귀족들이 대거 아우구스트 2세 편으로 돌아서자, 그는 그해 8월에 슈테틴을 거쳐 스웨덴령 포메른의 슈트랄준트로 피신했다. 코스탄티니예에 있던 칼 12세는 그를 스웨덴군 지휘관으로 선임했지만, 실질적인 지휘는 닐스 윌렌셰르나가 맡았다. 하지만 전세가 갈수록 악화되자, 1712년 12월 5일 슈트랄준트 인근 리브니츠-담가르텐에서 작센군 사령관 야쿠프 하인리히 플레밍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를 반환하지만 계승권은 유지되며, 그의 지지자들은 사면되며 잃어버린 재산의 배상과 연금 제공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칼 12세는 이 협약을 유효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했다.1712년 12월, 스타니스와프 1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찾아가 칼 12세를 만나려 했으나 실패하자 크림 칸국으로 가서 폴란드-리투아니아로 쳐들어가서 아우구스트 2세를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했다. 또한 1713년 6월에 사절에게 막대한 돈을 주고 브레슬라우로 가서 추종자들이 봉기를 일으키도록 유도하게 했다. 크림 칸 카플란 1세 기레이는 장고 끝에 그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타타르인, 튀르크인, 폴란드인, 스웨덴 용기병으로 구성된 군대를 일으켜 프루트강을 건너 호틴 인근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신성 로마 제국과 루스 차르국이 공동으로 크림 칸국에 압력을 행사하자, 카플란 1세 기레이는 원정을 중단하고 귀환했다.
1714년 7월 4일, 스타니스와프 1세는 스웨덴 왕실이 보유한 독일 봉토인 팔츠-츠바이브뤼켄 공국으로 이동했다.[1] 칼 12세는 그를 팔츠-츠바이브뤼켄 공작으로 선임해 그곳의 통치를 맡겼다. 스타니스와프 1세는 츠바이브뤼켄의 교외 지역에 치플리크 별궁을 지었고, 첫째 딸 안나 레슈친스카가 1717년에 사망한 후 묻힌 만델바흐탈에 그레핀탈 수도원을 세웠다. 1719년 1월 루스 차르국,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손잡고 스웨덴에 선전포고한 프로이센 왕국이 압박을 가해오자 츠바이브뤼켄을 떠나 프랑스의 비상부르에 망명했다.
1725년, 스타니스와프 1세의 딸 마리아 레슈친스카가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와 결혼했다. 망명자였던 그의 딸이 서유럽의 강대국 프랑스의 국왕과 결혼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프랑스의 실권자인 앙드레 에르퀼 드 플뢰리 추기경이 폴란드 왕실이 대대로 자손이 많아서 루이 15세의 자식을 빨리 낳을 수 있을 것으로 보였고, 기반이 없는 그의 딸을 왕비로 세운다면 외척이 날뛸 여지가 없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샹보르 성에 1733년까지 거주했다.
2.4.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2기
1733년 2월 1일,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했다. 이보다 앞선 1732년 9월 13일, 러시아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아우구스트 2세의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문제로 양국간의 갈등이 촉발될 가능성을 회피하기 위해 아우구스트 2세 사후에 베틴 가문과 스타니스와프 1세를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에서 배제하고 포르투갈 왕자 마누엘[2]을 세우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1733년 4월 27일에서 5월 23일까지 진행된 세임에서, 오직 폴란드인이자 가톨릭 신자인 사람만이 왕이 될 수 있다는 결의문이 체택되면서, 양국의 계획이 틀어졌다.스타니스와프 1세는 이때를 틈타 폴란드로 귀환하기로 마음먹고, 사위 루이 15세로부터 상당한 자금을 지원받은 뒤 변장한 채 신성 로마 제국 경내를 거쳐 폴란드에 잠입했다. 이후 바르샤바에서 열린 국왕 선거장에 모습을 드러낸 뒤 귀족들을 열심히 설득하고 뇌물을 건넸다. 1733년 9월 12일, 그는 11,697명에 달하는 귀족들과 폴란드 추기경 테오도르 안제이 포토츠키의 지지를 받고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주변 국가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러시아 제국은 친 스웨덴 성향인 스타니스와프 1세가 폴란드 국왕이 된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고, 합스부르크 제국 역시 루이 15세에게 자기 딸을 바치는 등 명백한 친 프랑스 인사인 그가 폴란드 국왕이 된다면 프랑스의 세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아우구스트 2세 사후 작센 선제후가 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는 발트해 연안의 영토인 리보니아를 완전히 장악하길 희망하는 러시아의 안나 이바노브나에게 리보니아의 쿠를란트 공국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했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에겐 당시 그가 각국에게 승인을 요청하던 ' 국사조칙'이 승인되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러시아와 합스부르크 제국은 아우구스트 3세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러시아군 75,000~90,000명이 3개 군단으로 나뉘어 리보니아, 스몰렌스크, 키예프로 이동한 뒤, 리보니아에 주둔했던 표트르 라시의 군대가 리보니아- 그로드노 선을 따라 리투아니아 대공국 영토를 거쳐 바르샤바로 진격했다. 이때 리투아니아 대귀족들은 베틴 가문을 지지했기에, 러시아군에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다.
1733년 9월 중순, 표트르 라신은 티코신에 도착한 뒤 폴란드 왕국 경내로 진입했다. 그 해 10월 초 카미오네크에 진주한 러시아군은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를 추종하는 귀족 906명을 소집한 뒤 선거를 통해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를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아우구스트 3세로 선출하게 했다. 바르샤바 인근에 집중된 폴란드군을 지휘하는 유제프 포토츠키는 처음에는 비스툴라 강을 건너 수도를 방어하려 했지만, 러시아군의 군세가 너무 강하자 저항을 포기하고 라돔 인근에서 철수했다. 이에 스타니스와프 1세는 추종자 및 근위대와 함께 바르샤바를 떠나 그단스크로 퇴각했다. 표트르 라시는 이들을 추격했지만, 1733년 11월 15일 워비츠 인근에 이르렀을 때 한파가 도래하자 행군을 중단했다.
한편, 작센에서는 크라쿠프를 공략하고 아우구스트 3세의 대관식을 거행하려 했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은 러시아의 부당한 개입으로부터 선거의 자유를 수호하기로 마음먹고, 1733년 12월 3일 산도미에시에서 연맹을 결성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그들은 작센군에 맞서 남쪽의 크라쿠프를 방어하고, 동시에 러시아군에 맞서 북쪽의 토룬을 방어해, 러시아군이 그단스크에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크라쿠프를 방어하는 임무는 크라쿠프와 산도미에시에서 동원된 병력을 지휘하는 루블린 주지사 얀 탈로가 맡았으며, 토룬 수비는 프란시스제크 카지미에시 루드니키, 알렉산데르 멜진스키, 슐리벤 백작 빌헬름이 맡았다.
1734년 1월 7일, 얀 탈로는 타르노프스키 고리에서 작센군을 저지하려고 시도했지만, 폴란드 기병대가 크게 패하자 퇴각했다. 작센군은 여세를 이어가 크라쿠프에 입성했지만, 얀 탈로는 포기하지 않고 크라쿠프 주변 지역에서 유격전을 전개해 작센군을 괴롭혔다. 여기에 얀 탈로의 형제인 아담 탈로가 이끄는 폴란드군 1,500명이 미에호프 전투에서 대규모 작센군을 격파해, 그들이 그단스크로 진군하는 걸 막아냈다. 1734년 1월 15일, 표트르 라신이 이끄는 러시아군은 슬루제보에서 폴란드 귀족 연합군을 궤멸시켰다. 러시아군은 여세를 이어가 1월 16일 토룬에 입성했다.
그 후 러시아군은 그단스크에 접근했지만, 8,000명의 수비대가 배치된 그단스크 요새의 방어력이 매우 강력했기에 쉽사리 공략하지 못했다. 첫번째 공성전에서 큰 손실을 입자, 러시아 사령부는 작센군에 군대와 중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작센군은 마워폴스카 지역에서 얀 탈로가 이끄는 폴란드군의 유격전에 시달려서 러시아군의 요청을 쉽사리 따르지 못했다. 여기에 체르스크 영주 프란시스제크 카지미에시 루드니키와 슐리벤 백작 빌헬름이 포메른 일대에서 러시아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해, 러시아군이 보급에 곤경을 겪게 만들었다. 결국 러시아 당국은 표트르 라시가 그단스크와 포메른을 신속히 평정하지 못한 것을 이유로 1734년 3월 16일에 총사령관 직책에서 배제하고 부르크하르트 크리스토프 폰 뮈니히를 새 총사령관으로 선임했다.
한편, 얀 탈로는 그단스크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곳을 구하기 위해 이동했다. 이와 동시에, 포메른에서 활동하던 폴란드군은 프란시스제크 카지미에시 루드니키의 지휘하에 집결했다. 러시아 사령부는 탈로와 루드니키가 합류하는 것을 저지하기로 결정하고, 3,000명 가량의 병력을 루드니키 쪽으로 파견했다. 루드니키는 시비에시 인근에서 요격당해 큰 손실을 입었지만, 잔여 병력을 수습해 얀 탈로와 합세했다. 1734년 4월, 얀 탈로는 귀족 기병 133기, 2개의 폴란드군 연대, 400명의 용기병을 이끌고 이동하던 중 투콜라에서 표트르 라시의 군대와 맞닥뜨렸다. 당시 라시는 소규모 분견대만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 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지만, 러시아군의 강력한 전투력을 우려한 얀 탈로가 평화 협상을 벌이느라 시간을 끄는 바람에 이 기회를 놓쳤다. 표트르 라시는 협상하는 척하면서 그단스크로부터 새로운 군대를 불러들였다.
1734년 4월 20일, 표트르 라시는 2,9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비슈친에 주둔한 적군의 진영을 기습 공격했다. 탈로는 전투 대형을 형성한 뒤 유리한 지형에서 싸우는 이점을 살려 러시아군에 상당한 손실을 입혔지만, 훈련이 잘 되지 않은 폴란드군이 전투 도중 대거 이탈하자 결국 항전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이후 폴란드군은 전력을 수습한 뒤 그단스크로 이동했지만 푸츠크에서 브루크도르프 크리스토프 폰 뮈니히가 급파한 기동대에게 참패했다. 얀 탈로는 호이니체로 철수한 뒤 그곳에서 패잔병들을 규합했지만, 그단스크 공방전이 끝날 때까지 어떠한 군사 행동도 벌이지 못했다.
한편, 스타니스와프 1세는 그단스크에서 항전을 진두지휘하면서 프랑스 왕국에 구원군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실권자 플뢰리 추기경은 합스부르크 제국을 공격할 명분으로 그를 도왔을 뿐,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누가 되는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스타니스와프 1세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원군을 보내주지 않다가 1734년 5월 20일이 되어서야 2,400명 가량의 소규모 프랑스군이 그단스크 인근의 베스터플라테 반도에 상륙했다. 이들은 일주일 후 그단스크를 포위한 러시아군을 향해 용감히 공격했지만 간단하게 격파된 후 항복했다. 그단스크 수비대는 적병 8,000명을 사살하는 등 분전했지만 식량이 고갈되자 1734년 7월 7일 항복했고, 스타니스와프 1세는 농민으로 변장한 뒤 프로이센 왕국으로 도피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환영을 받았다.
1734년 8월 30일, 스타니스와프 1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폴란드 전역에 침략자들을 상대로 투쟁할 것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반포했다. 1734년 11월 5일, 스타니스와프 1세의 지지자들은 지쿠프 연맹을 결성했다. 연맹은 프로이센 왕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국경 지대인 쿠르피오브스카 숲에서 저항군을 결성한 뒤 작센군과 러시아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했다. 또한 프로이센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간의 국경 지대에서는 리투아니아 장군 파슈코프스키가 유격대를 이끌고 러시아군을 상대로 저항을 이어갔으며, 포돌리아에서도 카미에니에츠포돌스키 요새와 성 삼위일체 참호를 점거한 봉기군이 오스만 제국의 지원을 기대하며 침략자들에 저항했다. 그러나 러시아군과 작센군이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저항군을 하나둘씩 격파했고, 저항군 지휘관이었던 유제프 포토츠키가 1735년 2월 말에 저항군 중 그나마 잘 훈련받은 연대를 이끌고 자클리친에서 작센군에 귀순하면서 저항의 열기가 차츰 꺼져갔다.
지쿠프 연맹의 확고한 지도자였으며 5,000명의 기병대를 이끌던 아담 탈로는 작센을 침공해 교란시키기로 마음먹고 출진했지만, 크로스노 오드잔스키에 인근에서 오데르 강을 도하하던 중 적군의 급습을 받고 궤멸되었다. 급기야 1735년 10월 프랑스가 합스부르크 제국과 평화 협약을 맺고 봉기군을 더 이상 도와주지 않기로 하자, 지쿠프 연맹은 해산되었다. 결국 모든 희망을 잃은 스타니스와프 1세는 1736년 1월 26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퇴위를 선언하고 프랑스로 이동했고, 폴란드 귀족들은 1736년 4월 4일 ~ 7월 9일까지 이어진 바르샤바 세임에서 아우구스트 3세를 새 국왕으로 인정하겠다고 선언했다.
2.5. 로렌 공작
173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이 종결되고 빈 조약이 체결되었다. 스타니스와프 1세는 폴란드 왕위 주장을 포기하고 아우구스트 3세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왕위 선출을 인정했다. 그 대신, 루이 15세가 로렌 공작 프랑수아 에티엔으로부터 받아낸 로렌 공국의 통치자로 선임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통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로렌 총리를 맡은 라 갈라지에르 후작 앙투안 마르탱 쇼몽이 맡았고, 그는 명목상 통치자로 남았다. 그렇지만 프랑스 정부로부터 상당한 연금을 받으며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스타니스와프 1세는 로렌 공국의 뤼네빌에 거주했고, 매년 가을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딸을 찾아갔다. 그는 상당한 수입을 토대로 화려한 궁정을 유지했고, 예술가와 문인을 후원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750년 낭시 공공 도서관을 창설하고 '스타니슬라스 아카데미'를 창설해 계몽주의 사상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했으며, 군사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그는 자유주의와 권력 분립 정신에 호의적인 입장을 표명했으며, 1760년 <단순한 상식으로 맞서 싸우는 불신>을 출간해 모든 광신적인 행위를 멀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그는 로렌에서 학교, 병원, 공공 도서관, 다방 운영을 지원했고, 빈민 구제에도 힘썼다. 1757년 화재로 부분적으로 소실된 생디에데보주 마을을 재건하기 위해 100,000프랑을 기부했다. 또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 베르사유 궁전 주재 대사 자크 윌랭 등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며, 철학자인 장 자크 루소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렇듯 로렌에서 나름대로 잘 살면서도 조국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749년에 '자유를 확보하기 위한 자유로운 목소리(Głos wolny wolność ubezpieczający)'라는 정치학 논문을 편찬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폴란드의 정치 체제, 경제 및 사회 개혁의 근본적인 개혁을 요구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선거법을 변경해 오직 피아스트 왕조의 후예, 즉 폴란드 토착 왕조 출신만 선거에 출마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왕실 영지를 매입해 왕실 재무부를 복원하고, 리베룸 베토를 제한하고, 토지 없는 귀족이 세임 및 지역 의회에 참여하는 관행을 금지하며, 빈곤에 시달리는 농노들의 신체적 자유를 부여하고 임대하며, 도시, 무역, 산업의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중앙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전문적인 장관 협의회를 신설하며, 잘 훈련받은 10만 정예병을 육성해 상비군으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1766년 2월 6일, 스타니스와프 1세는 난로 곁에서 자다가 옷에 불이 붙어 심한 화상을 입었다. 이후 오랫동안 고통에 시달리다가 2월 23일에 향년 88세로 사망했다. 그는 폴란드 왕국 역사상 가장 오래 산 국왕이었다. 사후 낭시의 노트르담 드 봉 세쿠르 성당에 안장되었고, 로렌 공국은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노트르담 드 봉 세쿠르 성당은 파괴되었고, 그의 유해는 두 차례 훼손되었다. 1814년 6월, 폴란드 출신 장군이자 정치인인 미하우 소콜니츠키가 그의 유해를 포즈난으로 가져갔다. 그는 이 유해를 바벨 대성당에 안장하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이후 그의 유해는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24년 성 베드로 성당 지하에서 발견되었다. 이후 1926년에 바벨 대성당으로 옮겨져 처음에는 스테판 바토리의 석관 옆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지그문트 3세 바사의 석관 옆에 이장되었다.
3. 가족관계
3.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안나 레슈친스카 (Anna Leszczyńska) |
1699년 5월 25일 | 1717년 6월 20일 | |
2녀 |
프랑스의 왕비 마리 (Marie, Queen of France) |
1703년 6월 23일 | 1768년 6월 24일 |
루이 15세 슬하 2남 8녀[3] |
4. 여담
- 마부로 변장해서 유럽 전역을 여행한 것과 '바브카 비엘카노츠나(Baba wielkanocna)'라는 케이크, 전통적인 프랑스 양파 수프를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하고, 생활력도 상당했다.
- 사망 당시 88살로 당시 기준으로 굉장히 장수한 편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는데도 건강관리를 잘했던 듯.
- 조개빵인 마들렌은 로렌 공국의 공작으로 프랑스에 망명한 스타니스와프 1세를 따라온 시종들이 생계를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조개빵이 루이 15세의 왕비이자 스타니스와프의 딸 마리아 레슈친스카에게 전해지면서 프랑스에도 전래되었다고 한다.
[1]
츠바이브뤼켄 공국은 1681년 이후 스웨덴 국왕이 팔츠-츠바이브뤼켄 왕가의 사유지로 통치하는 영토였다.
[2]
페드루 2세의 막내 아들.
[3]
파르마 공작부인 엘리사베타,
프랑스의 도팽 루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