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도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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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34><colcolor=#ffffff> 프랑스의 도팽 루이 Louis, Dauphin de Fran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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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이 페르디낭 드 프랑스 (Louis Ferdinand de France) |
출생 | 1729년 9월 4일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 |
사망 | 1765년 12월 20일 (향년 36세) |
프랑스 왕국 퐁텐블로 성 | |
배우자 |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공주 (1744년 결혼 / 1746년 사망) |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여공작 (1747년 결혼) | |
자녀 | 마리 테레즈, 마리 제피린, 루이, 자비에,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마리 클로틸드, 엘리자베트 |
아버지 | 루이 15세 |
어머니 | 마리아 레슈친스카 |
형제 | 엘리자베트, 앙리에트, 마리 루이즈, 필리프, 아델라이드, 빅투아르, 소피, 테레즈, 루이즈 |
종교 | 가톨릭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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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팽 루이 페르디낭은 프랑스 왕국의 왕세자로 루이 15세와 마리 레슈친스카의 장남이자 훗날 왕이 되는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의 아버지다.본래대로라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루이 16세로 즉위했을 인물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결핵으로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지 못했다.
2. 생애
1729년 9월 4일 프랑스 왕국 국왕 루이 15세와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2남 8녀 중 넷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래 마리 레슈친스카의 아버지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가 통치 왕가 출신이 아니라 폴란드 귀족 가문으로 선출[1]된 국왕이어서 격이 낮았던지라 1725년 결혼 당시에도 대신들의 많은 반대에 직면해야 했고 이후에도 내리 딸만 셋을 낳아 왕비에서 폐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다가 1729년 아들인 도팽 루이 페르디낭이 태어나자 그런 의견은 사라지고 마리 레슈친스카의 왕비 자리는 견고해졌다. 이듬해인 1730년 남동생인 앙주 공작 필리프가 태어났으나 후손 없이 유아기 때인 1733년 사망함으로써 루이 15세의 유일한 적자가 되었다.외할아버지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스타니스와프 1세의 비대한 체구를 물려받아 몸집이 매우 비대했고 이는 그의 아들들인 루이 16세, 루이 18세도 마찬가지였다.
1744년 5촌 고모이기도 한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2]와 결혼하였으나, 1746년에 딸 마리 테레즈를 출산하던 중 사망했고 마리 테레즈 역시 1748년에 요절했다.
1747년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3]와 재혼하였고, 사산된 자녀들을 포함해서 무려 9남 4녀를 낳았다. 자녀들 중 훗날 왕이 되는 세 아들 루이 16세, 루이 18세, 샤를 10세 모두 원래는 처음에는 왕이 될 일 없이 평범한 왕자로서 살다가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큰형 부르고뉴 공작 루이 조제프가 1761년 10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둘째형 아키텐 공작 자비에는 자신이 태어나기 반년 전인 1754년에 고작 1살의 나이로 죽고 아버지인 루이 페르디낭마저 결핵으로 먼저 사망하면서, 결국 아버지와 형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역시 평범한 왕자로 남을 뻔 했으나 (왕실 입장에선)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혁명으로 형인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조카인 루이 17세가 탕플 탑에서 고문과 가혹행위로 인해 옥사하면서 어부지리로 왕이 된 것이다.
아버지 루이 15세의 정부인 퐁파두르 부인을 경멸했고, 그녀가 주도한 동맹의 역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보였다.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에 회의감을 보였으며, 정부 내에서 반 오스트리아 여론을 대변하였다. 부인인 마리아 요제파 역시 요제프 1세의 외손녀로서[4]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제위를 빼았겼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도팽 부처의 반 오스트리아 입장은 나중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로 오스트리아의 여대공이자 며느리가 될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과 입장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1765년 왕이 되기도 전에 결핵으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후처 마리아 요제파 역시 1767년에 35세로 요절했다.[5]
생전 명석했던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면 고조부 루이 14세, 아버지 루이 15세의 막대한 부채와 실책을 어느정도 만회했을 것이고 그의 뒤를 이을 아들 루이 16세에게도 조상들의 실책에 대한 부담을 어느 정도 덜어줬을 것이다. 허나 결핵은 그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도 치료하기 힘든 병이다. 천연두를 치료하겠답시고 어처구니없는 사혈치료로 목숨을 잃은 증조부 그랑 도팽 루이와 할아버지 프티 도팽 루이, 큰아버지 부르타뉴 공작 루이는 살릴 수 있었겠지만.
이 때문에 대체역사물에서는 루이 14세, 루이 15세, 루이 16세 사이의 이 왕세자들을 전부 이어 루이 14세 - 루이 15세(왕세자) - 루이 16세(왕세손) - 루이 17세(15) - 루이 18세(도팽 루이 페르디낭) - 루이 19세(16) - 루이 20세(17)로 이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잘 묻어나 있다.[6]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라파엘라 공주 (Infanta Maria Teresa Rafaela of Spain) |
||||
1녀 |
마리 테레즈 공주 (Princess Marie Thérèse) |
1746년 7월 19일 | 1748년 4월 27일 | |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 여공작 (Duchess Maria Josepha of Saxony) |
||||
2녀 |
마리 제피린 공주 (Princess Marie Zéphyrine) |
1750년 8월 26일 | 1755년 9월 1일 | |
1남 |
부르고뉴 공작 루이 (Prince Louis, Duke of Burgundy) |
1751년 9월 13일 | 1761년 3월 22일 | |
2남 |
아키텐 공작 자비에 (Xavier, Duke of Aquitaine) |
1753년 9월 8일 | 1754년 2월 22일 | |
3남 |
루이 16세 (Louis XVI) |
1754년 8월 23일 | 1793년 1월 21일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슬하 2남 2녀[7] |
4남 |
루이 18세 (Louis XVIII) |
1755년 11월 17일 | 1824년 9월 16일 | 사보이아의 마리아 주세피나 공주[8] |
5남 |
샤를 10세 (Charles X) |
1757년 10월 9일 | 1836년 11월 6일 |
사보이아의 마리아 테레사[9] 슬하 2남 2녀[10] |
3녀 |
사르데냐의 왕비 마리아 클로틸데 (Marie Clothilde, Queen of Sardinia) |
1759년 9월 23일 | 1802년 3월 7일 | 카를로 에마누엘레 4세 |
4녀 |
엘리자베트 공주 (Princess Élisabeth) |
1764년 5월 3일 | 1794년 5월 10일 |
사산한 자녀들을 포함해서 전부 9남 5녀를 낳았지만 그중 4남 1녀는 사산되었고, 2남 2녀는 유아기 및 아동기에 사망하여 성년기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3남 2녀뿐이다.
그 중에서도 막내딸 엘리자베트는 결혼 적령기였지만 결혼하지 않고 프랑스에 남았다가 프랑스 혁명으로 처형되었고 루이 18세와 마리 클로틸드는 결혼했지만 자녀는 남기지 못했다.
도팽 루이 페르디낭의 자녀들 중 오로지 루이 16세와 샤를 10세만이 자녀를 남겼지만 루이 16세의 자녀들은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했고, 샤를 10세는 큰아들 루이 19세가 자녀없이 사망하고 작은아들 샤를 페르디낭의 외아들 샹보르 백작 앙리도 자손없이 사망해서 남계는 완전히 끊겼다. 하지만 샤를 페르디낭의 딸이자 샹보르 백작 앙리의 누나로 루이 페르디낭의 증손녀 루이즈 마리 테레즈의 후손들만이 현재까지 남아있다.
즉, 9남 5녀의 자녀들 중 유일하게 후손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자녀는 샤를 10세 한명뿐이다.
공교롭게도 요절하지 않고 성인기까지 살아남아 결혼한 4명의 자녀들 중 3명이 사르데냐 왕국의 사보이아 왕가와 결혼했고 심지어 모두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자녀들이다! 즉, 겹사돈 중의 겹사돈. 나머지 1명은 사보이아 왕가가 아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결혼한 루이 16세.
[1]
이것도 본인 능력이 아니라
대북방전쟁 중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침공한
스웨덴 국왕
칼 12세의 압력으로 이루어진 선출이었다.
[2]
펠리페 5세의 딸로 아버지
루이 15세의 사촌.
[3]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인
아우구스트 3세의 4녀.
[4]
어머니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가
요제프 1세의 장녀다.
[5]
자녀들의 숫자와 출생연도를 보면 알다시피 1748년부터 1757년까지 10년 연속 매년 출산했는데 당연히 건강이 좋을 리가 없다. 더더욱이 그 당시 의료기술로는 더더욱. 자녀 문단에 있는 자녀들 뿐만 아니라 1748년, 1749년, 1756년, 1762년 사산된 아들이 있었고 1752년 사산된 딸이 있었다.
[6]
현실의 사례로는 대대로
마르그레테 2세 때까지는 크리스티안과 프레데리크라는 이름을 번갈아며 아들에 아들로 즉위한
올덴부르크 왕조(크리스티안 3세 ~ 프레데리크 6세)
덴마크계 글뤽스부르크 왕조(크리스티안 9세 ~ 프레데리크 9세)와
효종(17대) ~
경종(20대)까지 4대 연속 장자의 장자로만 이어진 조선 왕조가 있다. 거기다 적장자 뿐만 아니라 적자 전체로 보자면 인조부터 경종까지 5대 연속으로 부자승계에 성공했다.
[7]
프랑스의 왕비 마리 테레즈,
루이 17세 등
[8]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차녀.
[9]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3녀.
[10]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