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단문 배경
제리코 스웨인은 오로지 힘만을 숭상하는 확장주의 국가 녹서스를 탁월한 예지력으로 이끄는 지도자다. 아이오니아 전쟁에서 부상을 당해 절름발이가 되고 왼팔을 잃었지만, 가차 없는 결단력으로 제국을 통치하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악마에게 새로이 받은 왼팔과, 그 못지않게 악마 같은 수를 써서… 이제 스웨인은 최전선에서 군을 지휘하며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어둠, 주변에 흩어진 시체에 몰려든 새까만 까마귀들에서 얼핏얼핏 목격한 광경이 다가오는 것에 대비하고 있다. 희생과 비밀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가장 큰 비밀은,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 |
2. 장문 배경
‘‘모든 인간은 결국 혐오스러운 존재. 숭상할 만한 대상은 국가뿐이다.’’ 제리코 스웨인은 녹서스의 귀족 집안, 그것도 녹서스 국경 벽이 처음 세워졌을 무렵부터 존재했던 유서 깊은 귀족들 중 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특권층으로서의 생활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 귀족들은 보람 다크윌이 집권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에, 이들이 자랑하는 가문의 역사가 녹서스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들 다수는 제국에 더 큰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했고, 그래서 다크윌에 반대하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이 귀족들은 비밀리에 조직을 만들어 검은 장미를 상징으로 삼았다. 스웨인은 이들의 음모를 밝혀내고 가장 눈에 띄는 자들을 직접 처리했다. 그 중에는 스웨인의 친부모도 있었다. 부부가 귓속말로 주고받던 대화에 나오는 ‘‘ 창백한 어느 여인’’이라는 표현이 스웨인으로 하여금 녹서스에 위협이 되는 음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 깨닫게 했던 것이었다. 녹서스야말로 스웨인이 가문이나 혈육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였다. 이 조직이 추구했던 것은 힘, 녹서스 제국의 수도인 불멸의 요새의 어둠 속에서 들릴 듯 말 듯 지직거리는 형태 모를 목소리였다. 마치 까마귀가 까악까악거리는 소리와도 비슷한… 스웨인은 이 조직을 찾아낸 공로로 녹서스 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하지만 군대는 그에게 너무나 낯선 환경이었다. 스웨인은 군에서 지내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녹서스 제국이 강한 것은 그가 생각했던 바와는 달리 녹서스 인들 덕분이 아니라는 것을. 녹서스 제국이 강한 이유는 출신에 관계 없이 모든 사람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녹서스만의 방식이라는 것을. 녹서스의 최전선에서는 외국 출신의 노예라도 능력이 있으면 지체 높은 귀족 자제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스웨인은 전투가 끝날 때마다 그 뒤를 엄습하는 암흑의 존재도 느낄 수 있었다.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는 까마귀 떼와도 같은… 서쪽 국경 지대를 평정한 후 스웨인의 명성은 슈리마 전체에 퍼져나갔고, 그가 이끄는 군대는 슈리마의 사막 위에 녹스토라를 수도 없이 세웠다. 하지만 차츰차츰, 녹서스 제국이 오로지 황제의 탐욕으로 좌지우지된다는 사실이 명명백백해졌다. 전선마다 전투가 벌어지지 않는 곳이 없었고, 목적은 마법 유물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보람 다크윌 황제는 나이가 들수록 정신 이상 증세가 뚜렷해졌다. 녹서스가 아이오니아를 침공했을 때, 다크윌은 아예 노골적으로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아이오니아를 샅샅이 뒤져서 수명을 연장시킨다고 알려진 것은 무엇이든 긁어모아 오라는 지시였다. 스웨인이 이끄는 군대는 차츰 지쳐갔고, 마침내 무기를 들기도 버거울 정도가 되어버렸다. 결국 스웨인의 군은 플레시디엄 전투에서 현지 민병대를 속여 함정에 빠뜨리려다가 오히려 습격을 받았다. 녹서스 정예병들은 궤멸당했고, 스웨인은 중상을 입었다. 한쪽 무릎뼈가 산산조각났고, 아이오니아 인의 검은 그의 왼팔을 가져갔다. 땅바닥에 쓰러져 죽음만을 기다리던 스웨인의 눈에, 시체를 뜯어먹으려 까마귀 한 마리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스웨인은 오래 전부터 익숙한, 암흑의 존재가 또다시 엄습해 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스웨인은 그 암흑에 굴복하지 않으려 했다. 아니, 굴복할 수 없었다. 그는 까마귀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그 눈망울은 녹서스의 심장을 조이고 있는 악마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검은 장미 한 송이. 창백한 어느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이 마음대로 부리는 꼭두각시 같은 황제. 스웨인은 오래 전 자신이 그 비밀 조직을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못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다크윌 황제를 유혹해서 손아귀에 넣었고, 자신들이 스웨인을 직접 타도하지 못하자 그를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던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한 순간에 스쳐지나갔다. 까마귀 한 마리의 머릿속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존재에 의해… 스웨인의 부모가 갈구했던 힘, 그 힘은 어둠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악마의 눈에 담겨 있었다. 아이오니아 원정은 ‘‘실패’’로 간주되었고, 스웨인은 그 책임을 지고 군에서 쫓겨났다. 무력한 패배자로 전락한 스웨인은 불멸의 요새 안에 남몰래 도사리고 있는 암흑이 무엇인지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먼 옛날부터 존재했으며, 죽어가는 자를 먹어치우고 그들의 비밀을 집어삼키면서 자신의 비밀도 삼켜버리려 했다. 스웨인은 그 암흑을 정면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암흑의 존재조차도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다. 바로 그 암흑의 힘을 마음대로 다루는 방법이었다. 스웨인은 그때까지 자신을 지지하던 세력과 더불어 오랜 시간에 걸쳐 주의 깊고 철저하게 준비를 한 끝에, 드디어 하룻밤만에 녹서스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악마의 힘으로 신체 능력을 회복한 스웨인은 추종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크윌을 처치해 버렸고, 산산조각난 황제의 옥좌는 주인을 잃고 버려졌다. 스웨인이 원하는 녹서스의 미래는 단결과 통합에서 비롯되는 힘의 국가였다. 그는 다크윌이 마구잡이로 파견했던 군사를 거두어들였고, 트리파릭스(삼인체제)를 만들어 한 사람이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고 녹서스를 다스릴 수 없도록 정치 체제를 정비했다. 스웨인은 녹서스 제국에 충성을 맹세한 자는 누구든 받아들였다. 심지어 검은 장미단도 예외가 아니었다. 물론 스웨인은 그들이 비밀리에 자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악마가 자신의 눈앞에서 했던 대로, 스웨인은 차근차근 정보와 지식을 모으고 있으며, 더욱 큰 위험이 바로 저 너머까지 다가와 있음을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녹서스 인들은 입 밖에 내지는 않아도 궁금해하고 있다. 그들이 마주하게 될 암흑조차도 스웨인이 저질렀던 각종 음험한 일에 비하면 무색해 보이지 않을까… 녹서스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희생과 살육의 제전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1] |
3. 검은 화약
그는 전략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숙영지에 도착했다. 양 옆으로는 트리파르 군단에서 가려 뽑은 소규모 의장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군용 천막 안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의장대는 출입구에서 대기할 뿐 그를 따라 들어오지는 않았다. 어떤 사람은 겉보기보다 더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다닌다. 하지만 이 남자처럼 암흑을 두르고 다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하물며 너무나 크고 검어서 주변 사람들의 머리 위를 빙빙 돌며 굶주린 듯 까악까악 소리를 내는 암흑을 거느린 사람은 아마 이 남자 뿐이리라. 그를 따라와 숙영지 부근에 모여든 것 같은 까마귀 떼가, 모든 전사들의 암울한 운명을 상기시켜 주는 것만 같았다. 부리에 물고 있는 너덜너덜한 천조각은 우리 군 깃발의 상태와 딱 어울렸다. 하지만 그가 다 해진 군용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그 모든 위압감이 사라져 버려서 나는 순간 멍해졌다. 이 남자도 결국은 필멸자에 지나지 않는 것을. 그의 머리칼에서 희끗희끗한 부분이 재가 부옇게 떠다니는 주홍색 하늘을 배경으로 한층 두드러져 보였다. 오랫동안 전장을 누비며 닳아버린 갑옷 위에는 실용적인 외투를 걸쳤고, 양팔은 그 주름 안으로 단단히 감추고 있었다. 그의 혈통 중 한 가닥도 그렇게 철저히 숨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직 귀족 기질은 버리지 못한 것 같군. 나는 싱긋 웃었다. 그는 계급을 드러내는 것은 아무 것도 걸치거나 두르지 않았지만, 지난 전쟁 때 입은 부상의 후유증은 누가 보아도 뚜렷했다. 지금 전략 회의를 위해 이 천막 안에 모여든 장군들은 하나같이 공포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전장에서 막강한 힘을 과시하여 부하들을 좌지우지한다. 그 중 한 명만 나선다 해도 우리 앞에 선 이 남자를 가뿐히 물리치고도 남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금 우리 모두를 지휘하는 자는 바로 이 남자였다. 녹서스의 대장군. 그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어떤 기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정말로 알 수 없는 존재를 대하는 느낌? 어쩌면 이 남자 주변에 무언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몰려들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제리코 스웨인은 지금 내 앞에 서 있다. 그러니 돌이키기에는 너무나 늦었다. 다섯 부대가 로크런드 평원으로 진격했지만, 불과 몇 주도 되지 않아 궁지에 몰렸다. 현지 주민들이 척박하기 이를 데 없는 언덕 광산에서 캐낸 폭발성 가루를 써서 우리가 허둥지둥 구축해 놓은 둔턱을 모조리 날려 버렸다. 재앙 위에 또 재앙이 겹쳤고, 결국 오늘처럼 스웨인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했다. 나는 오늘 같은 날이 오리라 확신했다. 나는 몇 달 동안 공들여 만반의 준비를 했다. 전투석공들을 언덕 광산으로 파견했고, 아주 사소한 굽이까지 빠뜨리지 않고 세세한 지도를 만들었다. 이제 녹서스의 운명을 좌우할 시간이 다가오자, 이 한 순간 한 순간을 만든 속삭임이 다시 귓전에 맴돌았다. 그 안색이 창백한 여인의 말을 떠올리면 귀가 근질거렸다. 그 여자가 처음으로 내게 내렸던 명령, 오늘의 계획을 알려주던 그 목소리…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무대도 빈틈없이 마련되었다. 오늘 바로 이곳에서 대지가 입을 벌리고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깊은 미로 같은 협곡을 만들 것이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바로 이 손으로 이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다. 어차피 스웨인이 이 회의를 소집한 것도 제국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내 믿음직스러운 장군들이여.” 스웨인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힘이 마치 칼을 뽑을 때 나는 ‘스릉’ 소리처럼 공기를 울렸다. 그리고 마치 그 예리한 칼날을 느껴볼 시간을 주기라도 하는 듯, 스웨인은 잠시 말을 끊었다 이었다. “녹서스가 승리할 방법을 말해 보시오.” “이곳 언덕 지형에 전차 열두 대가 있습니다.” 레토가 나서서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어찌나 여러 번 짚었는지 그 부분이 하얗게 벗겨져 있었다. “바실리스크가 끄는 전차들이지요. 이 전차들을 먼저 내보내서 적을 깔아뭉개 버리면 됩니다. 그럼 우리가 할 일은 적의 시체를 밟고 진격하는 것뿐입니다. 바실리스크는 그 어떤 장벽도 거뜬히 돌파할 수 있으니까요.” 레토는 자신의 간계에 스스로 만족하며 미소를 지었으나, 정작 스웨인은 유리잔에 따라지는 포도주에 더 정신을 쏟고 있었다. 저기에 독이 들었을까? 탁자를 응시하는 그의 눈은 그렇게 묻고 있는 듯했다. 그의 갑옷에 내 모습이 비치는 게 보였다. 내 의도를 들키지 않으려면 조심해야겠어. “문제는 우리조차도 바실리스크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거요.” 스웨인은 고급 아이오니아 포도주를 신중하게 음미하느라 한참 후에야 웅얼거리듯 말했다. “적의 폭탄 중 단 한 개라도 바실리스크 옆에 떨어진다고 가정해 보시오. 그 녀석들이 놀라서 날뛰면 어떻게 되겠소? 상상해 보시오. 그런 상황에서 겁을 집어먹은 바실리스크가 빠를지, 그대들의 병사가 빠를지?” “화공을 쓰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레토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마엘라가 황급히 끼어들었다. “저들이 우리가 진격할 곳에 놓아둔 역청에 불을 지르는 거죠. 저 빌어먹을 광산에서 놈들을 끌어내는 겁니다.” 스웨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이 전투를 시작한 건 그대가 태워버리자는 바로 그 땅을 얻기 위해서요. 그대가 초석의 쓰임새를 알고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 지나쳤나 보군.” 스웨인은 손목으로 잔을 빙빙 돌려 안에 담긴 포도주가 소용돌이치게 만들었다. 그 동작에서 감출 수 없는 실망감이 드러났다. “그대들이 지금까지 한 일이라곤 우리 병사들을 그 땅에 파묻어버린 것밖에 없지 않나.” “제가 지휘하는 붉은 칼날은 아직 사기가 충천합니다.” 촛불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조나트가 성마른 어조로 소리쳤다. 슈리마인 특유의 검은 피부 때문에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땅거미가 지자마자 광산으로 들어가 놈들의 지도자들을 처치하면 됩니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죠.” “감탄할 만한 전략이오.” 스웨인이 껄껄 웃었다. “하지만 저들의 지도자는 군인이 아니요. 아직까지는. 우리의 적은 그저 제일 목소리 크게 외치는 사람을 덮어놓고 따르는 집단에 불과하오. 한 명을 죽여도 다음 날 아침이면 우렁차게 고함치는 자가 세 명쯤 나타날 거요.” 붉은 칼날 지휘관 조나트는 얼굴을 찌푸렸다. 나는 소리내어 웃으며 조나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야, 조나트. 하마터면 자네가 우리를 승리로 이끌 방법을 생각해낸 줄 알았지 뭔가.” 탁자 주변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도 옆에 세워 놓은 양초들은 이제 반 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제 내가 나설 차례다. 창백한 여인은 기뻐하겠지. 우리 녹서스의 대장군을 망각 속으로 보내버리면서 그 여인의 이름을 말해 보리라. “당신들은 이 전투에서 이길 수가 없어.” 나는 말을 계속했다. “그 누구도 죽음과 싸워 이길 수는 없으니까. 녹서스의 지배자라도 마찬가지지. 그건 다크윌이 이미 보여주었잖아?” 스웨인과 다른 장군들이 나를 지켜보는 가운데, 나는 튜닉 자락에서 조심스럽게 발화장치를 꺼내들었다. 도화선은 이미 다른 쪽 손에 쥐고 있었다. 오래 전 펜라스 공성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던 옛 영웅 레토가 발끈했다. “그란스, 대체 뭐 하는 거냐?” 그의 시선이 탁자 아래쪽을 향했다. 내가 한 시간쯤 전에 폭약을 설치해 놓은 곳이었다. “감히 녹서스의 대장군을 협박하려 들다니? 이건 반역이다.” 하지만 아무도 내게 다가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나는 발화장치를 도화선에 갖다댔다. 이것으로 끝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쿡쿡거리며 웃고 있었다. 나는 잠시 후에야 그게 누가 내는 소리인지를 알아차렸다. “그래, 그란스 장군은 이럴 만도 해.” 스웨인은 싱글싱글 웃으면서 외투 주름을 반듯하게 폈다. “그 혼자만이 이해했으니까. 그란스를 제외한 다른 장군들, 그대들은 전투에 임하면 어떻게 해야 패배를 피할 수 있을까를 궁리하지. 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는 전투가 있다네. 가끔은 모두 불태워 버리는 게 유일한 전략일 때가 있지. 목숨을 잃을 것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거야. 2만 명이 내 뒤를 따르는 상황에서 말이지. 그러면 그들 뒤에서, 더욱 강력한 힘이 나타나는 법.” 스웨인은 외투를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 안에서 나온 것은… 그것은… “그란스와 나는…” 스웨인은 잔혹한 미소를 띠었다. “…승리를 위해서는 무엇을 희생시켜야 할지 늘 찾고 있었지.” 마엘라가 벌벌 떨고 있는 내 손을 낚아채려 달려들었다. 레토 역시 내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내 목을 틀어쥔 것은 스웨인의 손이었다. 그 손은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힘으로 내 몸뚱이를 공중으로 들어올렸다. 불을 붙이지 못한 도화선은 내 손에서 떨어져 어디론가 사라졌다. “네놈이 직접 그 여자한테 이 작전이 실패했다고 알려야 할 텐데, 아쉽군.” 대장군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그 음성은 영겁의 분노가 서려 천둥 소리처럼 우렁우렁거렸다. “그 여자도 아쉬운 건 마찬가지야. 죽은 자의 지혜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할 텐데 말이야.”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모든 것을 자백하고 싶었다. 어떻게든 용서와 자비를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내 목구멍에서는 가냘프게 중얼거리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는다. 나는 내 비밀을 털어놓고 있다. 바로 당신의 귀에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당신에게는 멀리서 까마귀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 까마귀 떼가 썩은 고기에 달려들며 내는 까악까악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
4. 트리파릭스 선언문
해당 문서 참조.5. 구 배경
교대를 요청할 힘이 남아 있다면 아직은 싸울 힘도 남은 것이다. ~ 스웨인 스웨인은 녹서스의 사령관으로, 오로지 힘만을 숭상하는 확장주의 국가의 앞을 내다보는 통치자이다. 스웨인은 아이오니아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고 무너졌지만[2], 무자비한 결단력으로 녹서스 제국의 통치권을 거머쥐었다. 이제 스웨인은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다가오는 어둠에 맞서 전투지휘관들을 전선에 내보낸다. 희생과 비밀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큰 비밀은 진정한 적이 내부에 있다는 것이다.[3] 스웨인의 출신에 대한 정보는 녹서스의 의사가 남긴 진료 기록이 전부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오른쪽 다리는 이미 완전히 부러져 뼈가 살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스웨인은 울지도 않고 불평 한마디 없이 절뚝이며 병동으로 걸어 들어왔는데, 그의 어깨에는 우거지상을 한 작은 새 한 마리가 고정된 듯 붙어 있었다. 사춘기밖에 안 된 소년이 그 정도의 부상에도 차분하게 몸 상태와 나이 등을 정확하게 대답하고, 무서울 정도로 빤히 쳐다보는 통에 오히려 의사 본인이 얼이 빠질 지경이었던 것 같다. 스웨인은 무거운 견인추로 정강이뼈를 맞추는 고통에도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았고, 마침내 뚝 하고 종아리뼈가 맞춰질 때조차도 전혀 움찔하는 기색이 없었다. 의사는 이런 골절상은 수술도 불가능하니 마법 치료를 해보자고 제안했지만, 스웨인은 단호히 거절하고 그냥 남는 목발이나 하나 달라고 해서 받고는 다친 다리를 질질 끌며 가 버렸다. 그의 다음 행적은 녹서스의 군사 서류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어딘가 좀 불완전한 기록처럼 보인다. 보통의 경우라면 자부심 높은 녹서스군이 장애를 가진 소년을 받아들였을 리가 만무하지만, 서류에 따르면 입대 후 첫 보직부터 장교로 입대했다고 되어있기 때문이다. 스웨인의 휘하에서 복무했던 이들 중 아직도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그에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충성심을 유지하고 있다. 그는 사령부의 계급 체계를 건너뛰어 빠르게 진급했으며, 오히려 상관들이 그가 지휘하는 부대로 전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강등을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교활한 전략가였던 스웨인은 출전하는 전투마다 훈장을 받았는데, 불편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최전방을 거닐던 그의 모습은 아직도 많은 병사의 뇌리에 똑똑히 각인되어 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가 막상 아이오니아 침공을 앞두고서 갑자기 실전에서 배제된 것은 관료주의적인 병폐에서 비롯된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한 번쯤은 크게 분노할 만도 하지만 그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엄청난 인내심을 이해할 수 없었고 뒤에서 열심히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너무나도 무표정한 그의 얼굴이 실은 내면의 추악함이나 지독한 비인간성을 감추고 있는 '가면'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어깨를 한시도 떠나지 않는 정체 모를 새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았다. |
5.1. 리그의 심판
원문 링크후보: 스웨인
날짜: CLE 20년 10월 4일
관찰
스웨인이 목을 한껏 뒤로 젖히고 웅장한 문 위에 새겨진 글귀를 읽는다. "진정한 적은 그대 안에 있나니."
"별나기도 하군."
일견 연약해 보이는 겉모습에 비해 스웨인의 목소리는 놀랄 만큼 정력적이다. 깃이 빳빳하고 자로 잰 듯 몸에 딱 들어맞게 재단된 제복은 군복이라기보단 오히려 로브 같아 보인다. 지팡이를 짚고 삐딱하게 서 있지만, 그렇다고 온 체중을 지팡이에 의지하고 있진 않다. 제집인 양 어깨 위에 앉아있는 이상하게 생긴 까마귀조차 마치 그와 한몸인 듯 어색한 데가 없다. 어쩌면 방금 그 말도 까마귀를 향하는 것인 듯도 싶다.
"그럼 리그는 내 진정한 적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어디 알아볼까?"
까마귀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스웨인이 능숙한 동작으로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을 들어 앞에 놓인 문을 똑똑 두드린다. 그러자 문이 열리며 그 틈으로 칠흑같이 어두운 실내가 드러난다. 문의 양옆에 조각된 표범들이 안쪽으로 들어가도록 안내한다.
문 안으로 들어서는 스웨인의 얼굴에 능글맞은 웃음기가 감돈다.
회고
녹서스와 데마시아 사이에 처음 ‘사건’이 터진 것은 강력한 두 도시국가가 휴전 협정서에 서명한 지 채 몇 년도 흐르기 전이었다. 실패로 돌아간 작전 도중 적을 처형하려던 바로 그 순간으로 스웨인은 돌아와 있었다. 어린 왕세자가 다가올 시련은 짐작도 못 한 채 이쪽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연단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스웨인의 손에 들린 독화살을 재운 마법공학 활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인상적이군. 이렇게 사실 같을 줄은 몰랐어."
스웨인은 데마시아 왕족들이 내려다보이는 어둑어둑한 발코니를 차분히 훑어봤다. 차가운 밤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졌다. 그는 숨을 고르며 깊이 심호흡을 했다. "게다가 정확하기도 하고 말이야. 이거 환상적일 정돈데."
"뭐가 말이냐, 벌레 같은 녀석?" 위엄 어린 음성이 그를 조롱했다. 다름 아닌 데마시아의 귀감, 왕세자 자르반 4세가 발코니에 서 있었다. 존재감만으로도 스웨인을 위압하는 듯했다. 자르반은 더 이상 스웨인이 잡으려고 출동했던 그때의 열세 살 어린 왕자가 아니었다. "다리는 어떠냐?"
"그것까지 알고 있나. 대단하군." 스웨인이 지팡이를 턱밑으로 들어 올리며 평했다. "안타깝지만 나한텐 통하지 않는다, 소환사여. 이 정도면 충분해."
자르반이 놀라서 멍한 표정을 지으며 약간 어리둥절해했다.
"난 게임을 하는 자가 아니다.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사람이지. 지금 내 눈앞에 재현시킨 이 작전 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진 우리 둘 다 잘 알고 있다. 내 신체적 약점을 진심으로 어떻게 여기는지도 잘 알 테고. 내 기억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파헤친 걸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분명 잘 알고 있을 텐데." 스웨인이 즐거워하며 자르반에게 웃어 보였다.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면, 이 정도로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 챔피언이 갖춰야 할 전제조건 중 적어도 반은 충족시켰을 테지."
"그런가?" 자르반이 아까보다 위엄을 뺀 음성으로 물었다. 표정조차 데마시아인다운 느낌이 상당히 사라져 있었다. 그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당신의 힘은 인정합니다. 녹서스의 스웨인."
데마시아 왕세자는 이제 스웨인 앞에 없었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보라색 소환사 로브를 걸친 빼어난 미모의 원숙한 여인이 있었다. 로브는 스웨인이 평생 보았던 그 어떤 로브보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치장돼 있었다. 여성 소환사가 가볍게 절했다. "하지만 리그에게도 그에 합당한 정중한 예우를 부탁하고 싶군요."
스웨인이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상임의원 베사리아 콜민예님, 영광입니다. 의원님처럼 높은 지위의 소환사가 직접 심사를 하실 줄은 몰랐군요. 의원님께서 친히 절 전장으로 소환해 주실 기회가 혹 있을까요?" 스웨인은 상임 의원과의 이 대화를 즐기고 있는 티가 역력했다.
"익히 알고 있지만 참 매력적이시군요. 전략의 대가여." 상임 의원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다시 한 번, 예의를 지켜주시길 부탁하겠습니다."
스웨인이 과장스런 동작으로 지팡이를 차내며 깊숙이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물론입니다, 제 진심을 담지요."
녹서스인이 지팡이를 꽉 쥐며 몸을 똑바로 폈다. "소환사와 마음을 나눈다는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으시겠죠. 아시겠지만 그런 관계를 다루는 건 제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절 불러내는 소환사에게 제 비밀이 낱낱이 드러나게 되겠지만, 리그에서 그걸 이용해 절 공격하는 일은 없으리란 것도 잘 압니다. 신의를 어긴다는 건 리그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 될 테니까요… 특히 리그에 고객 도시국가들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한 근래와 같은 긴장의 시기에는 특히 더 그렇지 않겠습니까."
상임의원 콜민예가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하군요, 맞는 말씀이시구요. 소환이란 끈으로부터 얻게 된 지식은 챔피언과 소환사 사이에서만 지켜져야 할 사적인 영역입니다. 아무것도 두려워할 건 없습니다."
"의원님도 마찬가집니다." 스웨인이 콜민예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다시 고개 숙여 절했다. 둘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깨며 상임의원이 입을 열었다. "리그에 들어오려는 이유가 뭔가요, 제리코 스웨인?"
이 질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스웨인의 얼굴에서 심판 내내 짓고 있던 가벼운 웃음기가 드디어 사라졌다. 그는 상임의원 콜민예의 눈을 정통으로 응시하며 답했다. "물론 녹서스의 다음 통치자가 되기 위해서지요." 스웨인이 지팡이의 손잡이 부분을 들어 상임의원을 가리켰다. "그러기 위해 리그는 내게 협조해야 할 거요."
"리그는 발로란 도시국가들의 일에 대해서는 사사로이 편을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스웨인이 집게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않습니까… 아닌가요, 베사리아?"
상임의원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요, 압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스스로 노력하여 영향력을 얻어야 할 겁니다. 쉽게 얻어지진 않을 거에요." 상임의원이 아주 희미하게 코웃음 같은 것을 쳤다. "특히 당신은 더하겠지요." 그녀의 두 눈은 마치 시뻘겋게 달궈진 숯불처럼 빨갛게 빛났다. "그게 다는 아니잖습니까, 그렇지요, 전략의 대가여?"
스웨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습니다. 이 심판이라는 거… 일종의 의식 같은 거로군요.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그가 상임의원의 왼쪽 귀 쪽으로 슬쩍 몸을 기울여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갔다.
스웨인의 목소리는 나긋나긋했지만,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또렷이 울렸다. "난 자르반 4세를 죽이고 싶소. 그 데마시아의 귀감 말이지." 그가 상임위원의 귓가에서 싱긋 미소 지었다. "반드시 죽여버릴 거요, 베사리아."
상임의원 콜민예의 두 눈이 마지막으로 스웨인의 시선과 얽혔다. 그녀가 오른손을 뺨으로 들어 올렸다. "어디 두고 봅시다, 제리코."
둘에게로 빛줄기가 쏟아져 내리더니, 스웨인은 방 안에 홀로 남겨져 있었다. 그의 앞에는 아까와는 다른 한 쌍의 문이 이미 열려 있었다. 리그는 이제 막 새로운 챔피언을 찾아냈다.
[1]
오역이다. 원문은 "The sacrifices are only beginning, for the good of Noxus."으로 제전이라는 단어는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의문. "(스웨인이 주도하는) 녹서스를 위한 희생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가 적절한 번역이다.
[2]
처음 나왔을 때는 오역으로 인해서 넘어져서 다리를 잃었다고 했었으나 곧 수정되었다.
[3]
리메이크 직전 유니버스에서 추가된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