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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12:40:50

하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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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판본
3.1. 하디스 판본3.2. 사힛 알 부하리

1. 개요

파일:external/api.ning.com/hadithbooks.png.jpg

حديث (hadith)

보는 사이트는 순나 닷컴, 튀르키예어가 가능하면 튀르키예 종무청 하디스 참조.

이슬람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을 담은 전승록. 무함마드의 제자들이 무함마드에게 궁금한 점을 묻고 답하는 문답집 형식으로 되어있다.

쿠란의 내용이 대체로 함축적이고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쿠란의 해설이 주 내용을 이루고, 그 외에 생활 속에서 실천해야 하는 지침 등이 포함된다. 무슬림들뿐만 아니라 무함마드의 생애를 연구하는 학자도 좋든 싫든 참고해야 할 중요한 1차 사료이다.

2. 역사

무함마드가 살아있을 때는 이런 것을 작성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하디스는 전부 무함마드가 죽은 뒤에 기록된 것이다. 무함마드 생전과 사후에는 쿠란과 하디스의 내용이 구전으로 전해져내려왔고, 일부만 기록으로 옮겨졌는데, 이 때문에 신도들 사이에서도 쿠란과 하디스의 내용이 엉뚱하게 전해지는 문제점이 발생하자 우스만 때부터 기존의 암송된 내용을 파피루스 양피지로 옮겨지기 시작했고, 우마미야 왕조 때 하디스 정리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무슬림이라면 쿠란에 적힌 교리뿐만 아니라 하디스의 가르침(순나, Sunnah)을 준수할 것이 권장된다. 이를테면 쿠란은 정기적으로 예배를 해야 한다고 명시했지만, 하루에 몇 번을 해야 하고 또 매번 몇 차례나 부복해야 하는지 같은 세부사항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부분을 명확히 해주는 것이 곧 예언자 순나이다. 다만 하디스와 쿠란이 차이가 있다면 쿠란이 우선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하디스는 무함마드 시대의 사람이 아닌 후대인들이 정리하였기 때문에 판본마다 하디스가 다 다르고 심지어 특정 집단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한 판본까지 나돌았다. 심지어는 유대교, 기독교, 그리스 철학의 경구들이 예언자의 언행으로 전래되기도 했다. 순니파 쉬아파는 예배방식 등에서 약간씩은 차이가 나는데 이는 양자가 따르는 하디스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9~10세기 하디스에 대한 검증을 시작하였다.[1] 이슬람 학자들은 하디스를 사이흐(건전한 것), 핫산(양호한 것), 돠이프(약한 것)의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수많은 하디스 중 이슬람학에서 최고로 치는 것은 무함마드 알 부카리와 무슬림 이븐 알 하자지가 편집한 판본이고, 실제로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하디스의 문구들이 바로 여기에 실려 있다.

이렇게 하디스의 등급을 나누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구전의 과정이 모두 기록되었느냐 여부이다. 가령 무함마드가 말한 내용을 A가 들었고, A가 B에게, B가 C에게, C가 D에게 말하여 하디스에 기록되었다고 해보자. A가 말한 최초의 구전부터 D가 증언하여 하디스에 수록되기까지 어떤 사람을 거쳤는지 모두 기록되었다면 가장 등급이 높은 하디스가 된다. 그래서 하디스를 읽어보면 첫 시작이 거의 저런 식이다. 등급이 낮은 하디스는 저기서 중간에 C가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는 식으로 중간에 끊긴다.

그런데 하디스에는 '신성한 하디스[2]' 라는 것이 있는데, 일반 하디스가 무함마드의 일반적인 언행을 기록한 것이라면 이 '신성한 하디스'는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가 신의 말씀이라고 전하여 쓰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성한 하디스가 쿠란과 동급이 되어야 할 듯하지만, 이슬람 율법은 신성한 하디스조차도 일반 하디스와 동급이라고 규정하였다. 하지만 무슬림들은 이 신성한 하디스를 더 각별하게 생각한다.

한편 서구 학자들은 이러한 하디스 비평에 몇몇 결점이 있음을 지적했는데 그중의 뚜렷한 하나는 위조자들이 텍스트를 변조해낼 수 있던 만큼 이스나트도 위조해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전통 학자들 사이에선 이스나트로 분쟁이 비롯됐고 결국 그 과정에 인공적인 조정을 거쳤다. 기독교 저술의 방식을 감안하면 무결한 이성을 상정하는 예언가의 의도를 전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기술에 대한 개입은 인조적이라는 관점도 가능하지만 난맥상을 바로잡을 다른 방도가 없었다.

의심스러운 하디스의 검증을 기치로 두고 시작한 작업이 하디스 비평이니만큼 하디스 편찬이 거듭되고 비평학이 점점 엄격해질수록 하디스 언설은 교조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비평학이 발달할수록 되려 무슬림 신학자 일반의 비평은 누그러진 것. 출처가 확립되고 나면 무슬림은 하디스 언설의 내용 자체를 비평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슬림에게 법학 신학과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을 주지하면 좋다. 하디스의 진위를 의심하는 것[3]이 아닌 내용을 의심하는 건 무슬림 입장에선 실생활의 위협이며, 법치를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슬람 법학사와 연결성의 차원에서 하디스는 매우 중대한 입지다. 인간 이성의 불완전성으로 인해 자립적인 법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관점에서, 완전한 법을 세우려면 신성한 계시를 받은 예언자의 가르침으로부터 생각의 질료를 얻어야 한다. 이를 얻기 위해 역사상 예언가들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 하디스이다. 또한 이들의 가르침은 인간의 발달 단계에 맞춰 수정, 교정되어 달라지므로 마지막 가르침인 쿠란은 현생 인간의 발달에 맞는 완벽한 해결책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다만 쿠란과 하디스는 대개는 추상적인 언구만이 담겨 있어 발상의 출처로 쓰일 뿐이다. 한국 사람에게는 북한에서 김일성의 교시를 들며 정책이나 행위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김일성 교시가 그렇듯 하디스는 원천일 뿐 만사에 구체적이진 못하다. 그러므로 이슬람 법제 시스템의 실제적 설립에는 해석의 학문이 관여되어 있다.

하디스의 지시와 권고를 바탕으로 법제를 구성하되 하디스의 진위는 비평학에, 명확한 한계가 불분명하면 문헌학에 의존했다. 대개는 좁고 직역주의적인 방식으로 이뤄졌지만 하디스에서 법의 특정 부분을 포함하지 않았다면 판사 다수의 유추(Qiyas)가 적용되었다. 합의(Ijma)라는 원칙은 본문을 적용하는 세세한 방향성을 심화적으로 제시하며 공적인 합의가 이뤄진 적이 없는 분야는 개인적 해석(Ijtihad)이 합의(Ijma)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4] 의례 교리도 같은 원칙의 적용을 받는다.

하디스, 순나, 샤리아를 거부하는 이슬람 종파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알레비파 쿠란주의. 하지만 주류 교계에서는 이단 취급 받는다.

3. 판본

3.1. 하디스 판본

순니파 기준으로는 사힛 알 부하리, 사힛 무슬림, 수난 아부 다우드, 수난 앗 티르미디, 수난 안 나사이, 수난 이븐 마자 이렇게 여섯 가지 대표적 하디스 모음집이 있다. 순니파 6대 하디스 편집본 이전에는 말리키파의 말리크 빈 아나스, 한발리파의 이븐 한발이 초기 형태의 하디스 판본을 편찬하기도 했다. 시아파는 5대 이맘이라고 불렸던 무함마드 알 바키르와 6대 자파르 앗 사디크가 하디스 편집과 수집을 주도하였으며 부와이흐 왕조 시대부터 하디스 판본이 책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 무함마드 투시의 하디스 모음집이 유명하다. 순니파와 시아파 모두 동일한 쿠란을 읽지만 하디스에서 나오는 내용이 다르고, 이는 쿠란 해석의 차이로 이어진다.

하디스 국문판으로는 최영길 교수가 부카리 본을 번역한 것이 있으며, 번역 수준은 시망이다. 영문판은 무함마드 무흐신 칸(Muhammad Muhsin Khan) 박사가 번역하고 요약한 하디스가 가장 유명하다. 요약본이라 읽어보면 잘 이해가 안가는 것들도 많다. 결국 모든 의미를 알려면 아랍어를 공부해야 하지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렵고... "리야둣 살리힌"이라는 하디스 모음집의 영문판을 추천한다. 책 두 권 분량인데 번역이 쉬운 영어로 깔끔하게 잘 되어 있어서[5] 독해하기 편하다. 하디스 주해에 이슬람 근본주의적 내용이 많으므로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다.(Darusalam 출판사 판 기준)

하디스는 단편적인 무함마드의 언행이나 일화를 수록했으며, 서로 충돌하는 내용도 많으며, 시대에 뒤쳐지는 구절도 여러개 있기도 한데, 이를 구분하고 비평하는 전문가들을 무핫디순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셰이크 알 알바니가 있다.

종종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하디스를 필요한 내용만 짜깁기해서 극단주의 선교 테러리즘을 정당화하는 식으로 쓰기도 한다. 또한 하디스 내용을 이슬람 학자들이 비평하여 신뢰도를 검증했다고 하나, 셰이크 알 알바니 등에 의해서 현대적으로 다시 비판 분석되기 시작했으며, 중세 이븐 카시르 등이 저술한 역사서와 비교대조해보면 하디스에 기록되지 않고 날아간 내용이 꽤 된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6][7] 주요 하디스들의 출처인 아부 후라이라나 아이샤가 한 증언들은 정치적 의도로 지어낸 내용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는다. 쿠란주의라고 아예 하디스를 무시하는 파벌도 있는데 주로 이슬람 진보파나 쉬아파 내 소수 종파가 많다.

3.2. 사힛 알 부하리

서기 9세기 무렵까지 예언자의 언행록은 주로 구술와 암송에 의해 전승되었고 이 때문에 어떤 전승이 진짜이고 어떤 전승이 조작인가 관련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하라 출신의 무함마드는 하디스들을 수집하고 편집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무함마드 알 부카리(부하라의 무함마드)는 고아였지만 그의 아버지가 넉넉한 유산을 남기고 죽었고 생계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7~8살 때 쿠란 전권을 통째로 암송했다고 하며 16살이 되던 해 어머니와 형과 함께 메카 메디나로 성지순례를 하고 고향으로 바로 돌아가는 대신에 아라비아 반도 각지를 여행하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언행록을 수집하였다 한다.

당시 종이도 비쌌고 메모장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는 사람들이 전해준 예언자의 언행록 전승을 통째로 암기하였고, 이후 자신이 암송했던 하디스들을 책으로 편찬하고 해당 하디스들을 누구한테 어떻게 들었으며 얼마나 신뢰성이 높은지를 주석으로 남겼는데 이 책을 사힛 알 부카리라고 한다. 사힛 알 부카리가 편찬된 이후 부카리는 니샤푸르와 부하라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여생을 보냈다 한다.


[1] 정수일에 따르면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검증 방법으로 해당 발언이 누가 언제 쓴 기록의 어디서 인용된 것인지 '최초의 출처'를 짚고 올라가는 '이스나트'와 무함마드 당대의 사회상에 비추어 들어맞는지의 여부를 따지는 '마튼'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한다.(출처: 정수일 <이슬람 문명> 창작과 비평, 2002년) [2] 아랍어로는 하디스 쿠드시라고 한다. [3] 물론, 이조차도 비평학이 발달한 현대에 와선 감히 그런 생각을 할 평신도도 없다. [4] 다만 오늘날에는 이즈티하드가 닫혔다곤 말한다. [5] 무흐신 칸 버전은 독해가 좀 어려운 편이다. [6] 하디스 모음집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중세 이슬람 사서와 타프시르(쿠란 주해서)에 나오는 이야기 중 대표적인 사례로는 안 나디르 이븐 알 하리스(An Nadhir Ibn Al Harith)의 이야기가 있다. 나디르는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이슬람을 포교할 때 잠자코 듣고 있다가, 무함마드의 설교가 끝나면 그 자리에 있던 아랍인 청중들에게 카야니아 왕조(페르시아 신화에 나오는 전설상의 왕조) 연대기에 나오는 에스판디야르 왕이나 루스탐 신화를 들려준 후 “여러분, 무함마드와 나 중에서 누가 더 재밌는 우화를 말했다 생각하십니까?”라고 말하며 공개적으로 무함마드의 포교를 방해했다 한다. 공교롭게도 나디르는 바드르 전투 때 패배하며 포로로 잡혔는데, 다른 쿠라이쉬 포로들의 경우는 좋게좋게 넘어갔던 것과 반대로 나디르는 무함마드 앞에서 바로 참수당했다는 내용이다. [7] 이븐 카시르가 참고했던 사료는 아마도 몽골 제국의 바그다드 초토화 당시 실전되었던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