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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9 02:21:19

순교자 유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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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성
유스티누스
Justinus
파일:Saint_Justin_Martyr_by_Theophanes_the_Cretan.jpg
출생 100년
로마 제국 플라비아 네아폴리스
사망 165년 (향년 65세?)
로마 제국 로마
국적 파일:로마 제국 깃발.svg 로마 제국
종교 그리스도교
사인 참수형
축일 6월 1일
1. 개요2. 생애3. 업적4. 저서
4.1. 위-유스티누스의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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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순교자 유스티누스(그리스어: Ἰουστῖνος ὁ μάρτυς, 유스티노스 호 마르튀스; 라틴어: Justinus Martyr; 약 100년 – 약 165년)는 그리스도교의 변증가, 순교자, 신학자, 겸 철학자였다. 가톨릭 정교회에선 성인으로 공경한다.

2. 생애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100~110년경 사마리아의 플라비아 네아폴리스, 현재의 나블루스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스스로 사마리아인들을 자신의 동족이라고 말하지만 사마리아 유대인의 특징이 그의 저서들에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는 유대교 신자도 아니었고 할례를 받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이름은 프리스쿠스로 로마식 이름이고, 할아버지의 이름은 바키우스로 그리스식 이름이어서, 그는 로마 또는 그리스 계통 출신으로 보인다.

유스티누스의 저서인 《유대인 트리폰과의 대화》를 통해 그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게 된 경로를 대강 이해할 수 있다.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말하는 유스티누스는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렬한 갈망을 품고 있었고, 철학이 신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참된 진리는 오직 하나라고 믿었던 그는, 그 진리를 알기 위해 스토아학파, 소요학파, 피타고라스학파에서 가르침을 얻고자 했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철학 학파들 가운데에서는 특히 플라톤학파를 만남으로써 스스로 크게 진보했다고 느꼈다. 그러나 철학자들은 하느님을 보지도 못했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도 못했던 것에 비하여 예언자들은 그들이 보고 들은 진리를 선포했음을 깨닫고, 예언자들이 예고한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 한편, 박해로 고통과 죽음을 당하면서도 흔들림이 없던 그리스도인들의 영웅적인 모습도 유스티누스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계기에 영향을 미쳤다.

유스티누스는 130년경 에페소에서 세례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그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옹호하고 전파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가운데 《유대인 트리폰과의 대화》는 132년~136년의 제3차 유대-로마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서술되어 있다.

세례를 받은 뒤에도 유스티누스는 계속 철학자의 옷을 입고 다녔으며, 사제품을 받지는 않았지만 여러 곳을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때에는 로마에 정착하여 철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열었는데, 타티아누스가 그의 제자였다. 두 편의 호교론은 이 시기에 저술되었다. 《첫째 호교론》, 《둘째 호교론》, 《유대인 트리폰과의 대화》 외에도 에우세비우스가 전하는 유스티누스의 저서 목록이 있으나, 이 세 저서 외에는 모두 후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유스티누스는 루스티쿠스 총독 때인 165년에 동료 6명과 함께 참수되어 순교했다. 《유스티누스와 여섯 동료 순교자들 행전》에 그의 순교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3. 업적

2세기에 활동한 대표적인 호교 교부로, 이교에 대항하여 철학적 언어로 그리스도교 변증을(《첫째 호교론》, 《둘째 호교론》), 유다교에 대항하여 유다교와 구분되는 그리스도교의 독자적 구약 해석을(《유대인 트리폰과의 대화》) 펼친 교부이다. 비록 유스티누스는 후배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2세기 중엽 - 3세기 초)처럼 본격적인 '그리스도교 철학자'는 아니었고[1] 그의 구약 해석이 현대 성서학과 차이가 있는 게 사실이지만[2] 2세기 교부로서 앞으로 그리스도교 신학이 나아갈 방향(철학적 세련됨, 신약의 문맥에서의 구약 읽기)을 증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호교 교부이다.

4. 저서

4.1. 위-유스티누스의 저서



[1] '그리스도교 철학'은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를 비롯한 알렉산드리아 교부들에 의해 시작했다. [2] 가령 이사야서 7장의 임마누엘 예언에 관하여, 현대 그리스도교 성서학은 본문 그 자체는 (《유대인 트리폰과의 대화》에서 트리폰이 주장하듯이) '동정녀'가 아닌 '젊은 여인'을 가리키고 있으며 아기는 예수가 아닌 히즈키야를 가리킨다는 것을 인정한다. 물론 신약에 근거하여 이 본문이 궁극적으로는 예수를 가리킨다는 것을 그리스도교에선 당연히 믿지만, 이사야서 저자/편집자가 동시대 유다인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1차적인 의미는 히즈키야를 겨냥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현대 그리스도교 성서학은 유스티누스와 트리폰의 중간에 위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