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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9 16:27:33

수벽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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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벽치기의 타격기술 시범 영상
1. 개요2. 특징3. 역사4. 기천문과의 관계5. 한계6. 관련 인물7. 같이보기8. 여담

1. 개요

택견꾼 신한승이 발굴해낸 한국의 전통 무술. 안대도, 김영희, 신한승, 육태안 순으로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줄여서 수벽이라고도 부른다.

2. 특징

수벽치기는 맨손을 주로 쓰는 전통 무예로, 부드럽고 유연한 수련을 강조하면서 '제압력'에 중점을 두고있다. 초기에는 중앙문화센터에서 <택견과 수벽>이라는 명칭으로 택견의 발질도 함께 전파했다. 현 전승자인 육태안은 "손은 수벽치기이고 발은 택견이라고 신한승 선생으로 부터 배웠다"고 제자들에게 알렸으며, 나중에는 2대 전승자인 김영희 선생으로부터도 직접 배웠다.

과거 무형문화재 등재의 심사를 맡았던 문화재위원들을 비롯한 전통무예의 전문가들은 '수벽치기'의 기술들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부드럽기 때문에 우리 무예의 본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고, 고대의 수박에서 발전한 한 유형일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신한승의 유언대로 육태안은 수벽치기를 전파하고 있으며, 단순한 무예가 아니라 100세가 돼서도 수련할 수 있는 생활 체조로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1]

수벽치기에서는 팔을 날개로 보고, 팔을 통해 펼치는 기술들을 날개짓이라고 부른다. 육태안에 따르면 검술은 맨손무예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맨손을 수련한 후 목검으로 검술을 수련한다. 이것은 상대를 해치고자 하는 살기를 빼고 몸을 활용하는 활법으로 무예를 수련하는 한 방법이다. 이러한 수벽치기의 이론은 《수벽치기 맨손검술》이라는 책에 정리되어 있으며, 육태안의 석사논문을 참고하면 보다 깊게 수벽치기를 이해할 수 있다.

전통무예 중에서 검술수련의 기본을 맨손으로 명시적으로 체계적으로 수련하고 있는 무예는 수벽치기가 유일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수벽치기는 맨손으로 수련한 검을 목검을 들고 수련하고, 목검으로 완성된 검술을 다시 맨손으로 수련한다. 수벽은 손, 발, 머리, 무릎, 팔굽 등을 사용한 타격을 기본적으로 수련하고 있다.

3. 역사

舊俗有手術 古自劍技而來 對坐相打兩手去來 如有一手失法則更打倒 名之曰수벽치기

옛 풍속에 손기술이 있는데 옛날의 검을 쓰는 기예로부터 왔다. 마주 앉아 서로 양 손을 오가며 치는데, 만약 한 손이 법칙을 잃으면 곧 맞아 쓰러진다. 이름은 수벽치기라고 한다.
『해동죽지』 「수벽타(手擗打)」

일제강점기에 출간된 『해동죽지(海東竹枝)』[2]에서 씨름, 택견과 함께 한반도 민속 무예로 소개되었다.[3]

기록에 따르면 수벽치기의 유래는 검기(劍技)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조선군의 훈련 방식 중 하나인 대타(對打)[4]에서 분화되었다는 설과 조선시대 무반들이 향유하던 '중앙집권적 무술 체계' 중에서 근현대에 따로 분화된 것으로 보는 설이 있다.[5]

수벽치기는 현대에 이르러서 레슬링 선수였던 신한승에게 전승되었다. 신한승은 택견을 국가무형문화재로 선정될 정도로 수련했음에도 택견 이외의 전통무예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가지고 추적하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안대도의 제자인 '일동 김영희' 선생을 만나게 되는데, 일동선생은 해동죽지라는 고서에 적혀있는 전통 무예 수벽치기의 전승자였다. 무예의 연구 정리 기량이 뛰어났던 신한승은 일동선생에게 배운 수벽치기를 정리하던 중 대장암이 악화되어 전승에 무리가 생기게 되었다. 이때 신한승은 기천, 합기도, 만주권법[6], 검술 등 다양한 무예를 수련해온 육태안을 만나게 되었고, 6개월 동안 육태안에게 수벽을 사사하다 사망한다. 육태안은 신한승 선생의 유지를 이어 수벽을 완전히 배우기 위해 김영희 선생을 찾아가게 되었는데, 약 5년의 기간 동안 김영희 선생에게 수벽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육태안은 신한승이 자신을 계승자로 삼은 것에 크게 놀랐다고 한다. 신한승이 육태안을 선택한 이유는 육태안이 본인처럼 여러 무예를 수련하였고 그중에서도 특히 검술에 능했기 때문이라고 알려져있다. 육태안의 논문이나 저서, 그를 다룬 신문기사들에 따르면 신한승은 병상에서도 고드기, 박치기 등 수벽치기의 마지막 수까지 육태안에게 전수하기 위해 힘썼다. 현재는 육태안과 그의 제자들이 서울, 지리산, 전라도 광주, 전주, 원주, 부산 등지에서 수벽을 수련, 전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4. 기천문과의 관계

육태안은 기천문의 전파 초기에 수석사범을 한 기천의 고수다. 그래서 <기천과 수벽>이라는 이름으로 전통무예를 전달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육태안의 아들 육장근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오랜 수련 끝에 수벽치기를 알리고 있다. 수벽치기의 전승자들이 초기 형태의 기천 수련을 동시에 했기 때문인지 인터넷 상에서는 수벽치기와 기천문을 혼동하는 이들도 많다.

막상 두 무예를 수련해 보면 차이를 이해할 수 있고, 가르칠 때도 수벽치기과 기천을 따로 분리해서 가르친다. 수벽치기가 기천문에 의해 원형이 훼손되었다는 오해를 받는 이유는, 기천의 수를 수벽치기의 결로 수련하기 때문이다. 또한 수벽치기의 수가 일부분 실전되었기 때문에 즉, 전승되지 못하고 누락된 수벽치기의 일부분을 기천문의 수로 채워넣은 것일 뿐, 근본적으로 기천문과는 아예 다른 무술이다. 참고로 현 전승자인 육태안은 기천은 빠르고 강하며 수벽치기는 느리고 부드럽기 때문에, 기천이 음의 무예라면 수벽치기는 양의 무예라고 비유했다.

지금의 '수벽치기 전승회'가 수벽치기와 기천을 동시에 가르치고 서로 보완하여 가르치고 있지만, 옛부터 계승되온 수벽팔세, 수벽팔법, 별법 등은 온전하게 전승되었다. 김영희 선생이 전하고 신한승 선생이 정리한 수벽치기의 원형 기술들 자체는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기천으로 추가된 부분을 덜어낸다면 전통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없다.

5. 한계

택견, 씨름, 등의 경우와 다르게 전통무술로서 무형문화재 등재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과거 택견꾼 신한승의 주도 하에 무형문화재 등재 신청도 했었고 심사도 받았지만 결국 통과하지는 못한 것이다.

일단 사유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전통무술로서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느정도 명맥을 유지했던 택견과는 다르게 신한승이 전승자를 찾아내기 이전의 수벽치기는 사실상 괴멸 상태였고 명맥이 그대로 끊길 위기에 처해있었다. 때문에 당대에 이미 여러 수가 실전되어버려 무술을 정립시키는데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생전의 신한승은 이를 파악하고 어떻게든 수벽치기의 온전성을 되살리기 위해 완전복원사업에 착수했었지만 결국 이를 끝마치지 못하고 사망하게 되었다. # #

신한승의 완전복원사업이 과연 성공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7], 결국 현재에 와선 별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기천문으로 수벽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넣으면서 수벽치기의 무형문화재 등재는 흐지부지되었다. 이후로도 계승자인 육태안은 포기하지 않고 '수벽치기의 역사와 기법'이라는 수원대 박사 논문까지 발표하며, 실전된 전통무술인 수박과 수벽을 연결지어 그 역사성을 증명하고자 하나 아직까지 학계에서 인정받지는 못하고 있다.

그 외의 이유를 들자면 역사적 고증의 부족이 있다. 일제시대의 해동죽지를 제외하면 수벽의 역사성이나 계보를 제대로 입증할만한 기록이 사실상 없으며, 관련자들의 증언과 신한승의 보증 정도로 이를 보충하기엔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과거 심사위원들이 직접 수벽치기의 시연을 보고 전통무술일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고는 하지만 결국 결정적으로 이를 입증할만한 증거는 부족했던 것이다.[8]

인터넷 상에서도 '수벽치기와 기천'을 따로 분리하지 않고 굳이 합쳐서 가르치는 것을 두고, 고증 문제로 비판을 듣고 있다.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전수받은 수벽치기만 가르치면 모르겠으나, 기천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수벽을 '전통무예가 아닌 현대 창작 무술'이라고 비판받게 만들었다.

6. 관련 인물

7. 같이보기

8. 여담


[1] 최근에는 지리산 인근에 거주하며 <기천과 수벽>이라는 이름으로 수벽치기와 함께 박대양 선생으로부터 배운 초기 형태의 '기천'을 동시에 전파하고 있다. [2] 1921년 저술, 1925년 출판. [3] 수벽치기는 한글로 적혀있고, 나머지 내용은 한문으로 적혀있다. [4] 일종의 라이트 스파링으로, 치명상을 주지 않도록 무기끼리만 타격하거나, 맨손이나 발 따위를 검처럼 이용하여 대련하는 방식이다. [5] 육태안 선생의 아들인 육장근 선생도 인터뷰에서 '조선시대의 보편적 무술에서 태껸은 태껸대로 분화되었고, 수벽치기는 수벽대로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라고 말한 바 있다. [6] 윤병인이 만주에서 몽골계 사범에게 배운 권법이 모태이다. 육태안은 이를 윤병인의 제자 박철희에게 사사하였다. [7] 택견계에서 도는 소문에 의하면, 신한승 선생이 전국을 돌며 찾았던 전통 무예의 파편 중에서 송덕기 옹에게 배운 택견 기술과 유사하지만 택견이라고 보기 어려운 기술들을 김영희 선생에게 전수받은 수벽과 합쳐서 등재하고자 했다는 설이 있다. [8] 반대로 말하면 적어도 20세기 초에는 존재했던 무술이니 21세기 기준으론 나름 100년이 넘는 역사성이 있는 무술이다. [9] 상기했듯 수벽의 기원을 수박에서 찾아보고자 하는 의견도 있지만 증명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