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송순(宋純) |
자 | 수초(守初, 遂初), 성지(誠之) |
호 | 기촌(企村), 면앙정(俛仰亭), 졸재(拙齋) |
본관 | 신평 송씨(新平 宋氏) |
출생 | 1493년( 성종 24) |
전라도
담양도호부 기곡면 상덕리 (현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기곡리 상덕마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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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83년( 선조 16) (향년 90세) |
시호 | 숙정(肅定)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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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 면앙정가를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2. 생애
1493년(성종 24) 전라도 담양도호부 기곡면 상덕리(현 전라남도 담양군 봉산면 기곡리 상덕마을)에서 아버지 송태(宋泰, 1475. 8 ~ 1523. 8)와 어머니 순창 조씨(? ~ 1544. 12. 24)[2]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21세 되던 1513년( 중종 8) 식년 진사시에 3등 18위로 입격하고 1519년(중종 14) 별시 문과에 을과 1위로 급제하였다. 같은 해 말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일파가 숙청당했는데, 대신들은 1519년 별시 문과가 조광조 일파에 의해 농단된 시험이라며 시험 자체를 취소할 것을 요청했었다. 그럼에도 송순의 답안지 만큼은 주제와 내용이 맞았다며 칭찬 아닌 칭찬을 받은 바 있다.
1527년에는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나 1533년 김안로가 권력을 독차지하자 귀향하여 면앙정을 지었다. 이때 지은 시가 바로 면앙정가이다. 이후 1537년 김안로가 사사되자 다시 정계로 복귀하여 홍문관 부응교, 홍문관 부제학, 승정원 우부승지, 경상도 관찰사 등을 거쳐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으나 윤원형, 황헌 등에 의해 탄핵받아 다시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명종이 즉위한 후 다시 경직으로 복귀하여 동지중추부사로 중종실록을 찬수하였다. 이후 개성부유수, 대사헌, 이조참판을 지냈으나 진복창과 이기 등에 의해 모함 받아 서천으로 귀양가게 되었다. 다음해에 사면되어 선산 도호부사를 지내고 면앙정을 증축했다. 이 면앙정은 기대승, 김인후, 임억령, 박순, 이황, 윤두수, 고경명 등이 찾아 호남 제일의 가단으로 인정 받았다. 이후 송순은 전주부윤, 나주목사, 한성부 판윤을 지냈고 의정부 우참찬을 끝으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1583년(선조 16) 9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