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소사하 훈련소는 중국 안도현에 세워진 무관학교이다.2. 상세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1919년 3월 간도(間島) 안도현(安圖縣)에서 조직된 독립군 단체. 3ㆍ1운동 후 국내로부터 망명하여 오는 의병과 구한국군인들로 조직된 군대로, 이규(李圭)를 총재로 화여 각지에 분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군정사는 9백여 명의 군대를 중국 보위단(保衛團)에 백여 명, 소사하(小沙河) 훈련소에 240여 명, 화전현(樺甸縣)에 100여 명, 그외 포수(砲手) 수백 명을 산양에 종사케 하는 등 병력을 분산하는 한편, 세밀한 조직을 갖추어 일본 헌병대ㆍ경찰서를 습격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여 교육과 민족정신 앙양(昻揚)에 힘썼다.
그 후 1920년 8월 일본군대의 대규모 습>격에 타격을 받고 12월 김좌진(金佐鎭)부대와 합류하여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을 조직하였다.
이홍직 : 국사대사전(1975)
독립군을 양성할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로 추정되어지며, 약 24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월 간도(間島) 안도현(安圖縣)에서 조직된 독립군 단체. 3ㆍ1운동 후 국내로부터 망명하여 오는 의병과 구한국군인들로 조직된 군대로, 이규(李圭)를 총재로 화여 각지에 분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군정사는 9백여 명의 군대를 중국 보위단(保衛團)에 백여 명, 소사하(小沙河) 훈련소에 240여 명, 화전현(樺甸縣)에 100여 명, 그외 포수(砲手) 수백 명을 산양에 종사케 하는 등 병력을 분산하는 한편, 세밀한 조직을 갖추어 일본 헌병대ㆍ경찰서를 습격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여 교육과 민족정신 앙양(昻揚)에 힘썼다.
그 후 1920년 8월 일본군대의 대규모 습>격에 타격을 받고 12월 김좌진(金佐鎭)부대와 합류하여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을 조직하였다.
이홍직 : 국사대사전(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