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1] |
설러이 언털 (Szalay Antal) |
생년월일 | 1912년 3월 12일 |
사망년월일 | 1960년 4월 4일 (향년 48세) |
국적 | 헝가리 |
출신지 | 불명 |
포지션 | 라이트 하프백 |
신체조건 | 170cm / 72kg |
등번호 | -[2] |
소속팀[3] | 우이페슈트 FC (1929-1940) |
감독 |
ITA 아라드 (1945-?) FC 크라이오바 (?-?) US 카라레세 (?-?) 프로 파트리아 칼초 (?-?) 세인트 조지 부다페스트 (?-?) |
국가대표 | 29경기 1골 (1933-19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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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헝가리의 전 축구 선수.2. 생애[4]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설러이는 1930년에 우이페슈트 FC에서 데뷔했다. 데뷔전을 치른 해에 설러이는 단 4게임밖에 뛰지 못했지만 우이페슈트는 헝가리 챔피언이 되었다. 하지만 1933년까지는 보르사니 페렌츠에 밀려 후보 선수에 머물렀고 1933년이 되어서야 주전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쉬츠 죄르지와 함께 튼튼한 하프백 라인을 구성한 우이페슈트는 어버르 이슈트반, 슈테른베르크 라슬로 등 스타플레이어들을 앞세워 30년대 헝가리 리그를 페렌츠바로시 TC와 양분했다. 설러이는 동료들과 1935년 우이페슈트의 우승을 이끌면서 헝가리 올해의 선수에도 선정되는 기쁨을 누렸다.1939년에 우이페슈트는 헝가리 리그와 미트로파 컵을 동시에 우승했는데 라이벌 페렌츠바로시를 결승에서 6대3으로 꺾은 기쁨 2배의 우승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0년 설러이는 28살의 젊은 나이에 선수 생활을 끝냈다.
2.1.2. 국가대표팀
1933년 설러이는 처음으로 국가대표팀 유니폼을 입었고 라자르 줄러와 좋은 활약을 선보이며 헝가리가 스위스에 3대0으로 승리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1934년 월드컵을 앞두고 잉글랜드와의 시합에서 2대1로 이기고 대회에 참가한 헝가리 역시 우승 후보 중 하나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설러이의 주 포지션인 라이트 하프백은 펄로타슈 이슈트반의 차지였고 설러이는 8강전에서야 레프트 하프백으로 출전할 수 있었다. 팀은 분더팀 오스트리아에 1대2로 패했고 헝가리의 월드컵 여정도 끝났다.
월드컵 이후로 헝가리 대표팀에서는 하프백 자리에서 실험을 계속하였고 설러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설러이는 라이트와 레프트 하프백을 오갔고 월드컵 본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첫 경기였던 네덜란드령 동인도전에서 라이트 하프백으로 뛴 것을 제외하면 남은 3경기에서 레프트 하프백으로 뛰었고 헝가리는 준우승을 차지했다.
월드컵 이후에 설러이는 2경기의 A매치 기록을 추가했고 총 24경기의 출장 기록을 남겼다.
2.2. 이후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설러이는 루마니아의 ITA 아라드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 외에도 FC 크라이오바, 프로 파트리아 등에서 감독 생활을 했지만 감독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위치 선정, 패스, 테크닉에 강점을 가진 하프백.4. 수상
4.1. 클럽
- 넴제티 바이녹사그 I 우승 4회: 1930–31, 1932–33, 1934–35, 1938–39( 우이페슈트 FC)
- 미트로파 컵 우승 1회: 1939(우이페슈트 FC)
- 쿠프 드 나시옹 우승 1회: 1930(우이페슈트 FC)
- 넴제티 바이녹사그 I 준우승 4회: 1931–32, 1933–34, 1935–36, 1937–38(우이페슈트 FC)
- 마자르 쿠파 준우승 1회: 1932–33(우이페슈트 FC)
4.2. 국가대표
4.3. 개인
- 헝가리 올해의 선수 1회: 1935(우이페슈트 FC)
[1]
헝가리 출신 인물은 성+이름의 조합으로 이름을 표기하고 항목명도 그에 따랐다. 다만 인터넷 검색을 하려면 서양식으로 이름+성의 순으로 검색하는 게 더 찾기 쉽다.
[2]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3]
트랜스퍼마크트 기준. 위키피디아에서는 우이페슈트 이후에 잠시 간즈라는 클럽에서 뛰었다고 한다.
[4]
출처: 위키피디아, 11v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