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십육국시대 후조의 장수에 대한 내용은 석총(후조)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개요
釋聰[1]851년( 문성왕 13) ~ 911년[2]( 수덕만세 원년)
신라 말기의 승려.
2. 생애
당대 미륵 신앙의 총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법상종(法相宗)[3]의 고승이었다. 미륵불을 자칭한 태봉국왕 궁예가 비구 200여 명에게 석가를 찬미하는 노래인 범패를 부르면서 자신의 뒤를 따르게 하고 스스로 경전 20권을 지었는데 궁예가 멋대로 쓴 이 경전이 꽤나 불쏘시개스런 것이어서 강설에서 궁예에게 그 경전들이 사악하고 괴이한 말로써 백성들에게 교훈이 될 수 없다고 간언을 올렸으나 분노한 궁예가 철퇴로 후려쳐서 처형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당대에 명망 높은 고승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6년 뒤 죽은 형미보다 위계가 높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륵을 자칭한 궁예에게 직언을 하여 죽었다는 사실 때문에 꽤 많이 알려져 있으며 드라마의 영향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되었다. 사실 드라마에는 후반부에 형미도 제법 중요한 비중으로 나오지만.
석총과 궁예의 의견 대립에 대해 당시 법상종의 분파 간 견해 차이로 이러한 대립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의견도 있다. #
3.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석총(태조 왕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옛날
동아시아
불교의 출가자들은
동진의 고승 석도안(釋道安)이 제안한 이래 본래의 성씨 대신
석가모니의 정신적 후손을 의미하는 '석'을 성씨로 쓰는 관행이 있었다.
베트남에는 지금도 이 관행이 남아 있어
틱낫한이나
틱꽝득 같은 승려들도 한국식으로 이름을 옮기면 석일행, 석광덕 등이 된다. 석총이 출가하기 전의 성씨는 전해지지 않아 알 수 없지만 당시에는 성이 없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석총도 본래 성이 없었을 수 있다.
[2]
동국통감 권 11권 신라기 참조.
[3]
유식론과 미륵신앙을 기반으로 성립된 종파. 유명한 고승으로 신라의 원측과
진표가 있다.
의상의 화엄종과 함께 교종의 양대산맥을 구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