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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석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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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5px -10px -15px"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315288>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사적
<colbgcolor=#315288> 강화 석릉
江華 碩陵
Seongneung Royal Tomb, Ganghwa
소재지 <colbgcolor=#fff,#1f2023>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길정리 산182번지
분류 유적건조물 / 무덤 / 왕실무덤 / 고려시대
수량/면적 793㎡
지정일 1992년 3월 10일
시대 고려 고종 24년( 1237)
소유단체 산림청
관리단체 강화군 }}}
파일:고려희종석릉.jpg
파일:희종석릉석물.jpg
일제강점기 촬영된 석릉의 전경과 석물.[1]
파일:강화 석릉 전경.jpg
2015년 촬영된 석릉의 전경[2]


1. 개요2. 상세3. 구조4. 정말 희종의 능이 맞는가?

1. 개요

고려 제21대 국왕 희종이 안장된 왕릉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에 위치해 있다.

2. 상세

수창궁 사변으로 폐위된 뒤 교동도에 유배되어 있던 희종은 1237년(고종 24년) 8월 10일 근처의 절인 법천정사에서 승하하였다. 이후 1237년(고종 24년) 10월 19일에 석릉(碩陵)에 장사를 지냈다.[3]

이후 시간이 흐르고 왕조가 바뀌며 두 번의 이 온 국토를 휩쓰는 동안 존재가 잊혀졌다가, 현종 5년(1664년) 강화유수로 재직하던 조복양(趙復陽)[4] 현종의 명을 받아 보수하였다.[5] 이후 관원들이 해마다 순찰을 돌며 능역을 관리하였고, 고종 4년(1867년) 위치가 확인된 고려왕릉 전체를 일시에 정비하면서 '고려희종석릉(高麗熙宗碩陵)'이라 적힌 표석이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거치며 왕릉이 도굴당하고 봉분이 무너지는 수모를 겪었으나, 1974년에 이를 보수, 정비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때 본래의 모습을 많이 잃었으나 2000년 2001년에 발굴 조사를 통해 석실과 능역의 자세한 구조를 확인하였고,[6] 그 결과를 토대로 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전해오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7]

3. 구조

파일:강화 석릉_후경.jpg
파일:석릉상하분리문인석.jpg
<colbgcolor=#fedc89> 석릉의 곡장과 목이 분리된 문인상[8][9]
석릉은 고려왕릉의 일반적인 석축구조인 3단 구조나 4단 구조가 아닌 5단 구조를 띠고 있다. 최상단인 1단에는 봉분을 중심으로 할석[10]을 쌓아올려 만든 곡장이 '⊓'모양으로 둘러져 있고, 곡장의 서쪽 전면에는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문인상 1기가 세워져 있다. 봉분과 곡장 사이에는 부정형(不整形) 판석이 깔려있다.

석실은 길이 3.3m, 너비 2.2m, 높이 2.3m의 횡구식 석실구조[11]로 지하에 조성되었다. 벽면은 할석과 장대석[12]을 이용해 쌓아올렸으며 천장은 3매의 커다란 판석을 덮어 마무리하였다.[13] 천장 상부에는 8각으로 병풍석을 두르고 봉분을 조성하였는데, 이 8각 병풍석은 현재까지 석릉과 가릉에서만 확인되고 있는 특이한 양식이다.[14] 또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병풍석 외곽에 묻혀있던 난간석이 발견되어 조성 당시 석릉에 난간이 둘러져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석실 가운데에는 4매의 석재로 테두리 두른 다음 그 안을 돌이나 흙으로 채운 길이 2.2m, 너비 0.8m의 조립식 관대가 놓여져있다. 입구는 문지방석과 문기둥돌을 세워 축조한 다음 바깥에 커다란 판석 1매를 세워 폐쇄하였고, 판석의 전면에 보강석을 세워놓았다.

파일:표석.jpg
파일:석릉문인석 (2).jpg
<colbgcolor=#fedc89> 석릉의 표석과 문인상[15]
2단에는 석인상 1기가 자리하고 있다. 석인상은 복두와 관복을 착용하고 손에 홀(笏)을 쥔 전형적인 문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해당 석인상을 포함한 석릉의 모든 석인상은 문관이다.[16] 단의 가운데에는 고종 4년(1867년)에 제작된 '고려희종석릉(高麗熙宗碩陵)' 표석 1개가 세워져 있다.

3단에는 현재 별다른 시설이 있지는 않으나, 발굴조사 당시 다량의 기와편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했을때 제사를 위한 정자각이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4단과 5단은 별도의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지 않았다.

4. 정말 희종의 능이 맞는가?

최근 연구에 의하면 현재 희종의 석릉이 비정이 잘못됐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성평왕후 임씨도 강화 천도 시기에 사망했기에 그녀의 능인 '소릉'(紹陵)도 희종의 '석릉'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능묘의 석수, 부장품, 무덤 구조로 보아 정순왕후의 능인 '가릉'이 성평왕후의 소릉이고, 위쪽의 능내리 석실 고분군을 가릉으로 비정한 결과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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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처: 조선고적도보 七, # [2]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3] 고려사 기록 [4] 형조판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조선 후기의 문신. 이 사람은 강화도 내에 잔존한 나머지 고려왕릉들의 보수 및 관리를 총괄하기도 했다. [5] 현재까지 전해지는 고려왕릉들의 능주(陵主) 대부분이 이때 비정되었다. [6] 이때 석실 내부에서 도굴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머와 패트병 소주(...) 1병이 발견되기도 했다. [7] 당시에는 사적 제369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번호를 매기는 것이 문화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 [8]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9] 해당 문인상이 원래 석릉에 설치되었던 석물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10] 주변의 자연석을 적당한 크기로 깬 석재를 뜻하는 말. [11] 3면의 벽과 천장을 먼저 완성한 다음 개방된 한 쪽 벽으로 시신을 넣고 그 벽을 막아서 만든 무덤. 앞트기식 고분이라고도 한다. [12] 섬돌 층계나 축대에 쓸 수 있도록 길게 다듬은 돌. [13] 이때 벽면과 천장 전체에 회칠을 하고 그 위에 벽화를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는 회칠의 흔적 일부만이 남아있다. [14] 일반적인 고려왕릉은 12각으로 병풍석을 둘렀다. 대표적으로 고려 고종의 능인 홍릉이 12각으로 병풍석을 둘러놓았다. [15]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 [16] 고려왕릉은 현정릉과 같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능역에 문인상만 설치하고 무인상을 설치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