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49년에 알려진 소련군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본군 포로 린치 사건이다. 그런데 소련군이 일본군 패잔병에게 가한 린치가 아니라 포로가 된 일본군이 다른 포로 일본군에 가한 린치 사건이다.2. 경과
문제의 사건은 몽골의 울란바토르에 소련군이 설치한 포로수용소에서 소련군측이 일본인 포로대장으로 임명한 이케다 시게요시(池田重善[1]) 중사가 다른 일본군 포로들을 수용소 내 노동과업량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독하게 린치를 가해 몇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린치 방법은 발가벗긴 후 나무에 묶어 두고 아무것도 못 먹게 해서 굶겨죽이는 식이었고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고개를 떨군 모습이 새벽에 보면 꼭 기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위의 군가의 제목을 따서 붙여졌다.이 사건은 송환된 포로들이 "요시무라 중사"라는 자가 일본인을 학대하고 있다고 증언한 것을 아사히 신문이 1949년 3월 특종보도하면서 알려졌으며 증언자 2명은 같이 일본으로 송환되어 온 문제의 이케다 중사를 고발조치했다. 결국 판결 끝에 그 해 7월 이케다는 징역 3년에 처해졌는데 1988년에 죽을 때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한때 변호사와 저널리스트들이 주축이 되어 재조사가 추진되었으나 재심청구를 하기 전에 이케다가 죽었기 때문에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현재 이 사건은 가해자로 지목된 문제의 인물이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검증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일본군의 가혹행위는 그들이 포로 신세로 전락해서도 여전히 심각했다는 것만은 여러 정황증거로 볼 때 개연성이 높다. 특히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당한 뒤에 이전부터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던 병사들이 소련군에 적극 협력하여 다른 일본군들을 앞장서서 학대했다는 증언이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의 요시무라 중사가 아니더라도 일본인 가해자는 충분히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사히 신문의 특종보도는 오보라는 주장이 많다. 이케다가 소련군의 지시로 가혹행위를 한 것은 있으나 나무에 묶어두고 굶겨죽이는 린치는 없었다고 하며 이는 이케다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한 재판부도 그런식의 린치 방식이 있다는 증거가 없다라고 판결문에 명시했기 때문. 일각에서는 이케다가 가혹행위를 한 것이 다른 린치 사례와 결합되어서 요시무라 중사가 이케다로 오인된 게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한 가지 기묘한 점은 이케다는 자신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정작 아사히 신문을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한 바는 없다는 점이다. 다만 한 책에서 자신이 언론의 오보에 의한 피해자라고 주장하기는 했다. 소련군 포로 경험을 가진 한 소설가가 자신의 포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에서 자신을 요시무라 중사와 동일 한 서술에 대해서 소설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일은 있다.
[1]
수용소에서는 본명 대신 요시무라 히사요시(吉村久佳)라는 이름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