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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58:03

새벽에 기도하다 사건

1. 개요2. 경과

1. 개요

1949년에 알려진 소련군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던 일본군 포로 린치 사건이다. 그런데 소련군이 일본군 패잔병에게 가한 린치가 아니라 포로가 된 일본군이 다른 포로 일본군에 가한 린치 사건이다.

2. 경과

문제의 사건은 몽골 울란바토르에 소련군이 설치한 포로수용소에서 소련군측이 일본인 포로대장으로 임명한 이케다 시게요시(池田重善[1]) 중사가 다른 일본군 포로들을 수용소 내 노동과업량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지독하게 린치를 가해 몇 사람을 죽게 만들었다는 것이었다. 그의 린치 방법은 발가벗긴 후 나무에 묶어 두고 아무것도 못 먹게 해서 굶겨죽이는 식이었고 그렇게 죽어간 사람들이 고개를 떨군 모습이 새벽에 보면 꼭 기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위의 군가의 제목을 따서 붙여졌다.

이 사건은 송환된 포로들이 "요시무라 중사"라는 자가 일본인을 학대하고 있다고 증언한 것을 아사히 신문이 1949년 3월 특종보도하면서 알려졌으며 증언자 2명은 같이 일본으로 송환되어 온 문제의 이케다 중사를 고발조치했다. 결국 판결 끝에 그 해 7월 이케다는 징역 3년에 처해졌는데 1988년에 죽을 때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한때 변호사와 저널리스트들이 주축이 되어 재조사가 추진되었으나 재심청구를 하기 전에 이케다가 죽었기 때문에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현재 이 사건은 가해자로 지목된 문제의 인물이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검증은 사실상 불가능하지만 일본군의 가혹행위는 그들이 포로 신세로 전락해서도 여전히 심각했다는 것만은 여러 정황증거로 볼 때 개연성이 높다. 특히 소련군에게 무장해제당한 뒤에 이전부터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던 병사들이 소련군에 적극 협력하여 다른 일본군들을 앞장서서 학대했다는 증언이 많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그 문제의 요시무라 중사가 아니더라도 일본인 가해자는 충분히 존재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사히 신문의 특종보도는 오보라는 주장이 많다. 이케다가 소련군의 지시로 가혹행위를 한 것은 있으나 나무에 묶어두고 굶겨죽이는 린치는 없었다고 하며 이는 이케다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한 재판부도 그런식의 린치 방식이 있다는 증거가 없다라고 판결문에 명시했기 때문. 일각에서는 이케다가 가혹행위를 한 것이 다른 린치 사례와 결합되어서 요시무라 중사가 이케다로 오인된 게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한 가지 기묘한 점은 이케다는 자신의 무죄를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정작 아사히 신문을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한 바는 없다는 점이다. 다만 한 책에서 자신이 언론의 오보에 의한 피해자라고 주장하기는 했다. 소련군 포로 경험을 가진 한 소설가가 자신의 포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에서 자신을 요시무라 중사와 동일 한 서술에 대해서 소설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일은 있다.


[1] 수용소에서는 본명 대신 요시무라 히사요시(吉村久佳)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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