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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5 17:58:38

삿사 나리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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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사 나리마사의 군기와 우마지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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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사 나리마사의 가몬(家紋) 隅立て四つ目

佐々成政

1536-1588

1. 개요2. 생애3. 일화
3.1. 검은 백합 전설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삿사 나리마사는 센고쿠 시대 다이묘이다.

2. 생애

오와리에서 삿사 나리무네(佐々成宗)의 3남으로 태어났다. 형들이 연달아 오케하자마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전사하여, 1560년에 가독을 승계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시종으로 들어간 나리마사는 여러 군공을 세워 마침내 성주가 되었다.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마에다 토시이에 등과 철포 부대를 이끌며 활약했고, 에치젠 정벌 이후에는 시바타 카츠이에가 에치젠 영지를 받자 그곳의 한 군을 받아, 그의 휘하에 소속되어 카가의 잇코잇키와 전투를 벌였다.

이 때 삿사 나리마사는 마에다 토시이에와 함께 에치젠 후추 10만 석을 같이 받았지만, 함께 영지를 받는 사람이 나리마사를 포함해 3명이였기에 3만 3000석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우에스기 겐신의 사망 이후 오다군이 엣추를 점령하면서, 엣추국의 다이묘가 되었다. 엣추에서는 치수 사업에 힘쓰고 성을 개수하는 등 선정을 펼쳤다.

혼노지의 변이 일어난 후 시바타 카츠이에 하시바 히데요시 간 시즈가타케 전투가 일어나자 나리마사는 엣추 우오즈 성을 빼앗은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가신들을 공격해 도로 내쫓는 등 우에스기를 막느라 시즈가타케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고 숙부를 지원군으로 보냈다. 그러나 시바타 카츠이에는 히데요시에게 패하여 할복하였고, 거기에 이웃 다이묘들인 마에다 토시이에의 배반과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압박으로 어쩔 수 없이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 히데요시는 엣츄 1국을 그대로 안도시켜 주었다.

1584년 코마키 나가쿠테 전투가 일어나자 방관하다가 여름 무렵이 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카츠 연합군에 가담하였다. 그렇게 되어, 히데요시 측 마에다 토시이에와의 전투가 일어났고, 이 때 우에스기 카게카츠와도 관계가 나빴기 때문에 양쪽으로 공격을 당했다. 두 성을 공격하며 양 쪽에 다른 한 성이 이미 항복했다 속여 두 성을 모두 취하는 등 활약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화친하려하자 나리마사는 이에야스에게 항전을 촉구하기 위해 북알프스라고도 불리우는 험난한 히다 산맥을 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났지만,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1585년, 히데요시가 10만 대군으로 나리마사의 도야마성을 포위하였다(토야마의 역). 삿사 나리마사는 오다 노부카츠의 중재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항복하였다.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도야마 성은 파각당했고 일가는 오사카에 옮겨져 살게 되었다.

이후, 규슈의 시마즈 정벌에 참여하여 히고를 받았다. 히데요시는 히고를 지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면서 3년간은 토지조사를 행하지 말 것, 각종 토목공사를 일으켜 히고의 영민들을 힘들게 하지 말 것, 거기에 농민 반란을 일으키게 하지 말 것 등 5개조의 주의서를 나리마사에게 주었다.

엣츄에서는 선정을 펼친 나리마사였지만 토착 세력이 강한 히고는 달랐다. 거기에 나리마사에게는 히고로 왔을 때 영지 목록조차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곧바로 제출하라고 명령을 하자, 일부 토착 영주가 들고 일어났고, 진압을 서두른 나리마사가 3천의 병력을 보내자 반란은 들불처럼 번졌다. 이는 곧 히데요시에 의해 진압되었으나 이로 인해 분노를 사 가이에키 할복에 처해졌다. 이후 히고는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각각 주어졌다. 그리고 히고는 세키가하라 전투로 인해 고니시 유키나가가 참수형에 쳐해져 가토 기요마사가 독식했다.

아무 연고도 없는 히고로 보낸 것 자체가 히데요시의 함정에 가까운 조치였다는 해석도 있으나 진지하게 논의되는 수준은 아니다. 히데요시는 얼마든지 나리마사를 죽일 기회가 있었으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어떻게든 써 보려는 시도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히고를 받은 두 사람이 이후 임진왜란의 선봉이 되었다는 점을 볼 때 나리마사를 조선 침공에 쓸 생각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자세하게는 알 수 없다.

3. 일화

3.1. 검은 백합 전설

예전 나리마사가 토야마 성주로 있을 때 죄가 없는데도 딴 남자와 놀아났다는 누명으로 죽인 애첩 사유리의 저주로 비극적 최후를 맞았다는 전설이 있다. 삿사 나리마사가 산을 넘어 이에야스를 만나러 갈 때, 토야마성을 비웠을 당시, 나리마사의 애첩인 사유리(早百合)가 가신의 한 명과 바람이 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성으로 돌아와 이 이야기를 들은 나리마사는 분노했다. 둘 다 이를 부정하지만 이미 성내의 소문이 되어 버린 이상 나리마사는 둘을 벌했다.

죽기 전 마지막에 사유리는 나리마사를 원망하며 3년 후 타치산에 검은 백합이 피었을 때, 삿사 가문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고 저주했다.

이후 히고의 반란으로 히데요시의 분노를 산 나리마사는 처분을 기다리고 있던 중 하쿠산산에서만 핀다는 귀한 검은 백합을 받아서, 이를 좋게 말해 달라며 히데요시의 정실 부인 코다이인에게 보냈다. 이 검은 백합이 맘에 든 코다이인은 곧바로 다회를 열어 요도도노를 비롯한 측실들에게 이 신기한 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꽃이 난 곳을 알아낸 요도도노는 대량의 검은 백합을 가져와 아무 곳에나 심은 뒤 자신의 다회에 초대한 코다이인에게 그렇게 진귀한 것도 아니라는 듯이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주었다. 그리하여 코다이인은 나리마사가 자신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생각해 냉담해져 히데요시에게 나리마사의 목숨을 구해 달라는 탄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

4.1.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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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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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대지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철포 특기를 가진 무력형 무사로 나온다. 천하창세의 고마키 나가쿠테 전투 시나리오에선 다이묘로 등장하는데, 옛 엣추의 지배자인 진보(神保) 가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은 세력이라 플레이하기 상당히 어렵다.

4.2. 바사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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ぐがはは! 踏みにじってくれるぅ!!
Gugahaha! I trample you under my foot!!
크하하하! 짓밟아 주마!!

시바타 카츠이에 스테이지에서 등장. 중전차를 몰고 나오는데, 좌우에서 잡몹들이 몰려나오기 때문에 나리마사에게 정신이 팔려 있다가는 잡몹의 눈먼 총알에 맞을 수 있으니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