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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5 13:04:09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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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곤팔로니에레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Girolamo Savonarola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GirolamoSavonarola.jpg
출생 1452년 9월 21일
페라라 공국 페라라
사망 1498년 5월 23일 (향년 45세)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재임 정의의 곤팔로니에레
1494년 11월 ~ 1498년 5월 23일
아버지 니콜로 디 미켈레 달라 사보나롤라
어머니 엘레나 보나콜시
서명
파일: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서명.svg
1. 개요 2. 생애3. 매체에서
3.1.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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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피렌체의 종교 개혁자이자 지배자. 이탈리아 도미니코회 수도자이다.

2. 생애

페라라에서 궁정 주치의 미켈레의 손자로 태어났다. 도덕과 신앙원칙을 지켰던 조부로부터 중세 시대의 영향을 받아 르네상스를 부정적으로 보았고 1475년 의학공부도 포기한 채 도미니코회에 입회했으며, 4년 뒤 페라라로 돌아와 안젤라 수녀원에서 성서를 가르쳤다.

1482년 피렌체로 파견되어 산 마르코 수도원의 강사로 높은 학식과 금욕 생활로 커다란 명성을 얻었으나 강의 자체는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평을 들었고 1487년 블로냐의 일반학교 교장으로 지내다가 3년 뒤 다시 피렌체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메디치 가문과 교황 알렉산데르 6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491년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으로 옮긴 후 공화주의 사상과 정치적 자유주의를 기조로 한 설교로 당시의 피렌체 공화국[1] 참주(僭主) 로렌초 데 메디치를 공격하고 교회와 속세의 도덕적 부패를 맹렬히 비난하여 민중의 인심을 사로잡아가기 시작했고 로렌초의 사후 그 아들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대에 이르려 더욱 메디치 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1494년 이탈리아 전쟁 때 프랑스의 왕 샤를 8세의 군대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예견했고 결국 프랑스군이 피렌체를 포위한 끝에 피렌체가 무기력하게 함락당하면서 그의 예견이 현실이 되었던 때로, 하느님의 예언자라는 그의 권위가 한층 강화된 계기가 되었고 나아가 사를 8세와 협상해 프랑스군이 피렌체에 무혈입성하는 것에 합의하고 위기를 잘 대처하였으며 이로써 피에로 데 메디치의 망명 후에는 중산 계급을 주체로 정치적 지도자가 되어 정권을 잡았다.

그는 귀족 정치를 배격하고 신정 정치적 민주제를 실시했으며 알렉산데르 6세를 정점으로 하는 로마 교회의 부패와 타락에 맞서 종교 개혁을 실현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권위에 반항하다가 1497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파문당했으며 이어 대(對) 피사 전쟁의 실패, 메디치 파(派)의 모략, 그리고 사보나롤라 자신이 펼친 과도한 신정 정치로 인해 인심을 잃게 되었다. 자신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면서[2] 세속의 그림, 음악, 문학 등은 모두 인간을 하느님과 반대되는 길로 인도하는 사악한 쾌락이라고 하여 자신을 따르는 광신도들을 조직하여 피렌체의 많은 예술품들을 몰수하여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허영의 불꽃이라는 행사를 가졌는데 예술가를 우대하고 예술품으로 먹고 살던 피렌체 시민들의 마음 속에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싹트게 되었다. 다만 시민들이 처음부터 이런 행보에 반대하지는 않았고 허영의 불꽃 행사 초반에는 산드로 보티첼리가 자신의 선정적인 그림들을 알아서 갖다 태워 버릴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점차 시민들의 지지가 줄어드는 데에 결정타를 꽂은 것이 교황의 사주를 받은 프란치스코회 수도자[3]이 "네가 정말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는 예언자라면 불 속을 걸어도 멀쩡할 테지?" 하고 걸어온 도발에 그의 수제자가 넘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가 극구 만류하였지만 제자들의 태도가 강경하여 결국 수제자를 보내 '불의 심판'을 하기로 했는데 막상 '불의 심판' 시행 당일 그가 "역시 이런 무지한 짓은 안되겠다"는 나름 합리적인 태도를 보여 결국 '불의 심판'이 무산되었다.[4][5][6]

그런데 이 기회를 노린 교황파 성직자들과 메디치 파 시민들이 "꽁무니를 빼는 걸 보니 저 자는 역시 거짓 예언자, 이단자다!"라고 분위기에 휩쓸리기 쉬운 민중들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켜 피렌체 공화국 행정부가 전복되었고 반 사보나롤라 파에 의해 새로 구성된 행정부에 의해 교황에게 파문된 이단자라는 명목으로 체포되어 형식적인 종교 재판을 받은 후 1498년 5월 23일에 사형에 처해졌다. 그나마 교회측이 재판을 주관했기 때문에 바로 화형에 처해지지 않고 교수형을 받고 죽은 뒤에 화형에 처해지는 최소한의 자비가 베풀어졌다.[7]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부 역사서들에는 이 날 피렌체 시민들이 '불의 심판'의 시행 과정에 대해서 토론하다가 결국 아무 것도 못하고 패한 후 쫓겨났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근거가 없는 내용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88px-Hanging_and_burning_of_Girolamo_Savonarola_in_Florence.jpg
피아차 델라 시뇨리아에서 벌어진 사보나롤라의 화형을 묘사한 그림

그러나 교황 추기경들의 부패와 타락에 맞서 성서대로 살자고 주장한 그의 가르침은 알프스 북쪽으로 퍼져나가 마르틴 루터 종교개혁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어찌됐건 본인이 기존 성직자들처럼 부패하지 않고 끝까지 성서의 가르침대로 살다 가는 인생을 산 것도 사실인지라 극단적인 행보와는 별개로 좋게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비너스의 탄생으로 유명한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추종자였던 걸로 알려져 있다. 전기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화사함이 사라지고 후기 작품들에 깔리는 불안함과 긴장감들이 그 영향이다. 물론 이건 자신의 화풍뿐만이 아니라 그림을 의뢰한 피렌체 사람들의 변화도 반영되는 거겠지만.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제 6장,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지배하게 된 신생 군주국에서 사보나롤라를 언급하면서 "무기를 갖지 않은 예언자는 자멸한다"라고 평했다. 민중이란 본래 성격이 변덕스러워서 어떤 일을 설득하기는 쉽지만 설득된 채로 붙잡아두기는 어려운 법이니 말로써 되지 않으면 힘으로써 믿게 할 수단을 갖추어야 하는데 모세, 키루스, 테세우스, 로물루스 등의 예언자/군주들은 이러한 힘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에게 자신의 법을 오랫동안 지키게 할 수 있었지만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시민들이 그의 말을 믿지 않게 되자 자신이 만들었던 법과 함께 망해 버렸다는 것이다.

3. 매체에서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 등장한다. 트레비소에서 안드레아스가 주관한 공의회가 열리자 이를 부패 척결의 기회로 보고 참석했으며 그를 이용해 교회에 혼란을 일으키고자 하는 주인공에게 지원을 받아 구휼 사업을 벌이며 대중들의 지지를 착실히 쌓아 나갔고[8] 공의회의 토론장에서도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좋은 인상을 쌓았고 안드레아스 황제에 의해 궁정 사제로 임명되어 가톨릭에 맞선 개혁교회를 창건한다. 다만 대놓고 개혁교회라 쓴다면 이단의 철퇴를 맞을수 있어 동방 교회를 표방하고 있으며 실제 사보나롤라의 신분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다.

시오노 나나미가 "신의 대리인"이라는 책에서 다루었다. 교황 네 명의 전기를 모은 것인데 이 중에 알렉산데르 6세 파트가 알렉산데르와 지롤라모의 대결에 관한 것. 로마인 이야기로 악명 높은 사람이 쓴 것 치고는 심하게 일그러진 부분도 없고 읽어 볼 만 하다. 다만 실제 사료들 몇 건을 살짝 가공해서 소개하는 것 같은 형태를 취한 주제에 맨 마지막에 가서 "그런데 이 가운데 하나는 내가 적당히 지어낸 것임.ㅋㅋ" 한다는 데 유의.

3.1.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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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목상으로는 공화국이었으나 동시대의 베네치아 공화국과는 달리 의회는 존재하지만 실세 집안에 의해 권력이 장악되어 소수의 의지로 국가가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영주국들과 다른 점이라면 저쪽은 작위가 있는 귀족들의 땅이었고, 이쪽의 메디치 가는 카테리나 데 메디치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토스카나 대공이 되기 전까진 귀족 집안이 아니라 그냥 돈 많은 집안이었다. 실체야 어쨌든 형식적으로는 당시 피렌체는 여전히 공화정이었기 때문에 메디치 가 또한 표면적인 이념적 선전은 공화주의를 표방했다. [2] 간질 발작이나 정신질환으로 인한 환청이라는 가설이 있다. [3]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도 묘사되듯 사보나롤라가 속한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는 오랜 대립관계의 역사가 있었다. <장미의 이름>의 배경인 14세기와는 뭔가 양쪽의 구도가 정반대로 바뀌었지만. [4] 불 위를 걷기나 작두타기 같은 행동을 신통력의 증거로 내세우는 신비주의자나 종교인들의 수가 적지 않지만... 사실 이런 행동들은 대부분 신비한 힘의 결과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근거가 있는 일종의 트릭이다. 예를 들어 벌겋게 달아오른 숯불은 보기에도 뜨거워보이고 다가만 가도 열기가 훅훅 전해져 오지만 숯 자체의 열 전도율은 그리 높지 않기 때문에 불 붙은 숯이 피부에 닿더라도 바로 화상을 입지는 않는다. 이를 잘 아는 사람이 균형을 잃거나 한 자리를 너무 오래 밟지 않도록 당황하지 않고 고른 걸음걸이로 침착하게 걸어가면 달군 숯불 위를 걷는 기적이 완성된다.(작두타기 같은 경우도 날카로운 칼날에 비스듬히 힘을 가하면 쉽게 베이지만 칼날과 수직 방향으로 힘이 가해지면 잘 베이지 않는 것을 이용한 트릭이다. 즉, 신통력보다는 칼날 위에서 중심을 잃지 않는 균형감각이 더 중요하다.) [5]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일단 사보나롤라의 제자는 자기 스승이 정말 신의 가호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교황파의 제안을 수락해버렸을 가능성이 높고, 사보나롤라 본인은 이 트릭을 알고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사실 알고 있었어도 별 소용이 없다. 트릭은 트릭인 이상 자기쪽에서 준비하지 못하면 사용이 극히 제한되어 버린다. 숯불 걷기 같은 경우에도 "숯불 위를 맨발로 걸을 수 있다는 사이비 교주들을 데려다가 같은 온도로 달군 철판 위를 걸어보라고 하면 다들 도망쳐 버릴 것이다" 라는 말이 있는것 처럼 자기네 쪽에서 준비한다면야 숯과 같이 그 위를 걷기 유리한 재료를 겉보기에 뜨거워 보이도록 잘 달궈서 고르게 걷기 편하도록 평평하게 잘 깔아 놓고 비쥬얼적으로 화려해 보이도록 심판을 받는 당사자가 걸어갈 길 주변에 활활 타오르는 불을 피우는 등 판을 깔아놓을 수 있지만... [6] 당연히 심판 준비를 상대방이 하는 이상 정말 뜨거운 불을 활활 피워놓고 "저 불을 뚫고 걸어가 보시지요? 예언자 사보나롤라?" 해버리면 트릭을 쓸 여지가 없이 "앗뜨거워! 앗뜨거워! 주님의 사랑!" 하고 심한 화상을 입거나 죽는 수 밖에 없다. 이를 피하려면 "시험장 준비는 우리가 직접 하겠다"고 해야겠지만... 애초에 마술 트릭 대결도 아니고 신의 가호를 증명하겠다고 하는 자리에서 "이런 종류의 불은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없으니 신의 가호를 받을 수 있는 종류의 불은 우리가 준비하겠다" 라거나 "신은 달군 숯불로부터 신자를 보호하시지만 달군 철판으로부터는 보호해 주지 않는다" 고 말할 수는 없으니... [7] 중근세 유럽에서 벌어진 잔혹한 사형은 교회가 주도한 게 아니라 교회측이 내린 지침을 군주가 자기 통치권 확립을 위해 악용해서 더 잔혹하게 집행한 것이 대부분이다. [8] 이때 내세운 모토가 원역사에서 루터가 내세운 오직 성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