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00080><colcolor=#fff> 여남위왕(汝南威王) 司馬祐 | 사마우 |
|
시호 | 위(威) |
작위 | 여남왕(汝南王) |
성씨 | 사마(司馬) |
휘 | 우(祐) |
자 | 영유(永猷) |
부친 | 사마구(司馬矩) |
생몰기간 | ? ~ 32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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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나라(晉)의 황족으로 자는 영유(永猷).2. 생애
여남회왕(汝南懷王) 사마구의 아들로 선제 사마의의 증손이자 여남문성왕(汝南文成王) 사마량의 손자이다.영안(永安) 연간, 혜제 사마충의 북정에 종군했으며, 혜제가 장안으로 돌아갈 때 사마우는 여남국으로 돌아왔다. 혜제가 낙양으로 돌아갈 때 사마우는 정남부의 군대 800명을 받았고 특별히 사부아문(四部牙門)을 설치하였다.
영흥(永興) 연간, 동해왕 사마월을 의탁했고 유교(劉喬)를 토벌할 때 전공을 세워 양무장군(揚武將軍)으로 임명되었으며, 식읍은 25,000호로 늘어났다. 사마월이 급상을 토벌할 때 사마우는 3,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허창에 남았으며, 사마월이 돌아온 뒤 사마우는 여남국으로 돌아갔다.
영가(永嘉) 연간, 오호의 침공으로 중원이 혼란에 빠진 가운데 사마우는 장강을 건넜고 낭야왕 사마예를 보좌하여 군자좨주(軍諮祭酒)로 임명되었다. 건무(建武) 원년(317년),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임명되었다. 태흥(太興) 연간 말, 좌군장군(左軍將軍)을 겸임하였다. 태령(太寧) 연간, 위장군(衛將軍)으로 진호되고 산기상시(散騎常侍)가 더해졌다. 사마우는 함화(咸和) 원년(326년)에 훙서하여 시중(侍中), 특진(特進)으로 추증되고 위(威)라는 시호를 받았다.
뒤에 사마통(司馬統)이 작위를 이었으나 남돈왕(南頓王) 사마종(司馬宗)에 연루되어 폐서인되었다. 하지만 성제 사마연이 사마량의 후사가 없다는 것을 불쌍히 여겨 사마통에게 다시 작위를 잇도록 명했다. 사마통은 비서감(秘書監), 시중을 역임하다가 영화(永和) 11년(355년)에 훙서하여 광록훈(光祿勳)으로 추증되고 공(恭)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뒤에 사마통의 아들 사마희(司馬羲)가 작위를 이었고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했다. 태원(太元) 14년(389년) 사마희가 훙서한 뒤 사마희의 아들 사마준지(司馬遵之)가 여남왕에 봉해졌다. 사마준지는 의희(義熙) 3년(407년)에 양주자사(梁州刺史) 유치(劉稚)가 모반할 때 유치에 의해 추대되었으나 유치의 모반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처형되었다. 이후 사마준지의 조카인 사마연부(司馬蓮扶)[1]가 작위를 이었으나 유송이 들어서면서 여남국은 폐지되었다.
[1]
사마준지의 동생 사마해지(司馬楷之)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