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의 종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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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어 | צְדוּקִים | |
영어 | Sadducees | |
한국어 | 공동번역 성서 | 사두가이파 |
가톨릭 | ||
개신교 | 사두개파 |
1. 개요
사두가이파 또는 사두개파는 유대교 제사장 중심으로 한 사상 세력으로서 유대교의 유파다.2. 어원
사두가이파는 다윗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에서 파생된 말로 여겨진다. 의롭다는 의미의 차디크(tsaddiq)이라는 형용사에서 유래한다는 종래의 설은, 차디크의 "i"가 차두크(tsadduq)의 "u"로 변한 까닭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 다윗과 솔로몬대에 제사장을 수행한 사독이 사두가이인의 선조라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3. 역사
사독의 후손들은 마카베오(마카비) 시대까지 사제직을 수행했다. 유대의 종교 및 정치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을 지지한 당파. 전 2세기에서 예루살렘멸망(기원후 70년)에 이르는 기간에 세력을 가졌던 유파로, 귀족계급에 속하고, 대제사장 및 예루살렘의 유력자들로 이뤄졌다. 바리사이인과 대립했는데, 바리사이인이 종교적인데 반하여, 그들은 아주 정치적 색채가 강했다. 수는 비교적 소수였으나, 교양도 있었고, 특히 제사장 계급을 독점하여 세력을 폈다.종교적으로는 보수적, 현세적으로는 그리스 문화에 대하여 개방적이고 세속적이었다. 그 때문에 마카비 전쟁시대의 종교적, 민족적 개혁기에는 냉대되었는데, 하스몬 왕조(그 초기의 지도자들은 유다 마카베오라 전해진다)가 세속화됨에 따라 세력을 펴고, 이에 비판적이었던 바리사이인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 경향은 뒤의 헤로데 왕조의 친로마 정책과도 영합하여,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지도자로서 제사장 계급이 강화되었고, 공회 의원도 많았다. 따라서 민중으로부터 떠나 대중적 인기는 없었다. 그 신앙, 사상은 일면 보수적임과 함께 한편 극히 합리적, 현세적이었다. 그들은 바리사이인이 부가하고 존중한 민간 전설을 인정하지 않고, 성문화된 모세의 율법만을 인정했다. 그 결과로, 부활도, 천사도, 영도, 일체의 존재를 인정치 않았다(막 12:18,눅 20:27,행 23:8). 또한 내세에 있어서의 보응도 부정하고, 영혼은 육체와 함께 죽음을 말하고, 의지의 자유를 주장하여, 신의 섭리를 믿는 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말해진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들은 예수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이러한 그들을 세례 요한은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했다(마 3:7). 그들은 예수에게 와서, 때로는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이기를 청하고(마 16:1-4), 부활에 대해 난문(難問)을 제출하여 시험하려고도 했다(마 22:23-33). 이들을 예수는 바리사이인과 동일하게 비난했다(마 16:6,11).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바리사이인 만큼 비난의 대상으로 되지는 않는데, 그것은 그들이 바리사이인 보다 옳기 때문이 아니라, 민중을 떠난 사두가이인의 신앙은 영향력이 적어 예수의 시야에 들어오는 일이 적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예루살렘 교회 및 바울로도 박해했다(행 4:1-22,23:1-10). 이후 70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그들의 세력을 뿌리채로 뒤엎어, 그후 그들에 대한 언급은 별로 없다. 다만 바리사이인의 가르침과 계속 대립되고 있었던 것이, 탈무드에 언급되는데 그치고 있다.
4. 정치와 신학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정치적, 종교적, 경제적인 기득권을 누린 친로마파였다. 당연히 이들은 사상적,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사두가이는 모세오경으로만 국한된 모세율법에 배타적으로 집착하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받아들인 온갖 주석과 전승들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그들과 구별된다. 그들은 특히 천사나 악마의 존재뿐만 아니라 부활 사상과 내세에서의 보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5. 종교
그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함께 산헤드린 의회에서 법관의 역할도 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에 사도 바울로가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행 23:1-9).6. 사두가이파: 모세 오경의 수호자들
마카비 가문이 시리아인들을 팔레스타인에서 축출해 낸 후 헬라주의적 유대인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유대 학자들이 헬라 사상들을 주장하고 찬성하는 것은 더이상 안전한 일이 못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유대 학자들은 계속해서 당시의 문제들에 그들의 논리를 적용했고, “사두가이파”라고 하는 새로운 유대 종파를 형성했다.우리는 “사두가이”라고 하는 이름이 원래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명칭이 히브리어 “사딕”(Saddig, 의로운)에서 비롯되었거나 혹은 사두가이파는 성전 제사장직과 관련되었기 때문에 제사장의 이름인 “사독”(Zadok)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사두가이파는 랍비들의 구전을 거부했다 . 그들은 오직 기록된 모세의 율법(Torah)만을 인정했으며,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어떠한 가르침도 배척했다. 그들은 바리사이파들의 가르침에 끼친 너무나 많은 페르시아의 영향과 앗시리아의 영향을 보았으며, 바리사이파는 유대 전통의 반역자들이라고 느꼈다. 그들은 천사들, 귀신들, 죽음 후의 부활에 관한 바리사이파의 신념들을 거부했다(마 22:23-32, 행 23:8).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가 바리사이파의 사상과 일치했을 경우 그를 반대하고 대적했다.
사두가이파는 헬라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신념들을 받아들였는데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 더불어 죽는다고 주장했다. 사두가이파는 개인은 각자 그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라고 가르쳤다.
사두가이파들은 그들의 헬라적 관심들의 또 다른 해결의 실마리로서 신학과 철학의 문제들을 논쟁하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들의 궤변적 사상은 대중들에게 인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들은 정치적으로 바리사이파들과 손을 잡아야 했다. 사실상 유대 정치계에 사건들의 뒤엉킴이 없었다면 사두가이파는 신약성서 시대 이전의 무대에서 사라졌을는지도 모른다.
바리사이파는 “힐가노”의 어머니가 안티오쿠스 4세의 폭정 때에 강간당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이유로, 대제사장이 되고자 하는 힐가노를 제지하였다. 힐가노는 그 소문이 거짓이었음을 증명했으나 바리사이 법정은 힐가노에게 몇 번의 채찍질의 형벌을 내렸으며, 힐가노는 이에 분을 품고 사두가이파를 배척했다.
힐가노의 아들 알렉산더 얀네우스 (기원전 104~78년)는 로마에서 헬라인 가정교사 아래서 학문을 배웠다. 그는 헬라 사상에 호감을 가졌으며, 지적인 사두가이파들에게 비밀리에 협력하고 호의를 베풀었다.
요세푸스는 얀네우스가 초막절 축제 1년에 술이 취해서 제단에 물을 붓는 대신에 그 자신의 발에 물을 부었다고 기록했다. 아마 이것은 비가 필요함을 상징하기 위해서 제단 위에 물을 붓는 바리사이파들에 대한 그의 경멸을 보여 주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폭동이 발생하고 얀네우스 군대가 질서를 회복했으나 6,000명이 살해되었다.
바리사이파는 얀네우스에 대항해서 내란을 일으켰는데 (기원전 94~88년) 하스몬 왕이 바리사이파 지도자들과 그의 추종자들 중 800명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임으로써 그 내란은 종식되었다.
힐가노의 아내 살로메는 그녀의 통치기간 동안 (기원전 78~69년) 바리사이파들에 대하여 보다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는 예전에 있었던 내란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