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후스 전쟁 시기인 1420년 7월 13일, 얀 지슈카가 이끄는 후스파 군대와 후스파 십자군이 프라하 인근의 비트코프 언덕에서 맞붙은 전투. 후스파는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프라하를 구원하고 보헤미아 전역에서 십자군을 몰아내는 발판으로 삼았다.2. 배경
1419년 독일과 헝가리의 왕 지기스문트는 형 벤첼이 죽으면서 보헤미아의 왕 자리도 얻게 되었다. 하지만 보헤미아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가하던 후스파는 지난날 지기스문트가 얀 후스의 신변을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여 콘스탄츠 공의회로 불려들인 뒤 화형에 처해지는 걸 방관한 것에 깊은 원한을 품고 있어서, 그가 보헤미아 왕위에 오르는 걸 절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얀 지슈카를 비롯한 강경파의 반발이 극렬했다.1419년 7월 30일, 후스 강경파는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를 점령한 뒤 시의원들을 밖으로 내던졌다. 이후 산악 지대인 타보르에 성채를 세우고 민병대를 훈련시켜 전투에 대비했다. 1419년 12월, 후스파 농민군 300명은 얀 지슈카의 지휘하에 바겐부르크(Wagenburg)를 활용하여 자기들을 추격해 온 귀족 판관 보후슬라프의 2,000여 군대를 네크미르 전투에서 격파했다. 이리하여 단순한 소요로 그치는 듯했던 후스파의 봉기는 규모가 점점 커졌다.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1420년 3월 1일 교황 마르티노 5세는 지기스문트의 요청을 받아들여 후스파를 토벌하기 위한 십자군 결성을 촉구하는 칙서를 동유럽의 제후들에게 내렸다. 이에 동유럽 각지에서 십자군 모집에 응한 기사들이 지기스문트에게 모여들었는데, 그 숫자는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후 후스파 십자군은 보헤미아로 쳐들어가 타보르에 은거하고 있는 후스파를 먼저 격멸하려 했다.
1420년 3월 25일, 2천여 명의 십자군 기병대는 타보르로 진군하던 중 수도몌르 평원의 요새를 점거하고 있던 후스파를 발견했다. 당시 후스파 군대의 숫자는 400명에 불과해서, 도저히 승산이 없어보였기에 처음에는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십자군이 항복을 받아주길 거부하고 전원 몰살시키려 들자,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끝까지 항전했다. 그 결과 벌어진 수도몌르 전투에서 십자군은 뜻밖에 큰 타격을 입었고, 얀 지슈카의 후스파 민병대가 마차를 타고 유유히 빠져나가는 걸 막지 못했다.
그 후 1420년 6월 12일, 십자군이 프라하 인근에 도착했다. 당시 프라하를 지배하던 후스파는 얀 지슈카의 '타보르파'와는 달리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다면 지기스문트와 타협할 여지를 열어둘 의향이 있던 양형파였다. 그들은 지기스문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다음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1. 하느님의 말씀을 교회의 제약 없이 전파할 수 있다.
2.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 빵과 포도주로 성찬례를 베푼다.
3. 성직자들은 과대한 재물을 포기하고 사도로서의 삶으로 돌아간다.
4. 모든 인간은 신분의 관계없이 죄인이며, 죽음을 맞이한다.
2.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게 빵과 포도주로 성찬례를 베푼다.
3. 성직자들은 과대한 재물을 포기하고 사도로서의 삶으로 돌아간다.
4. 모든 인간은 신분의 관계없이 죄인이며,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지기스문트는 이미 이단으로 지정된 그들을 인정할 수 없다며 모든 조건을 거부하고 프라하 공격을 명령했다. 결국 양형파는 타협을 포기하고, 타보르에 숨어 있던 얀 지슈카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얀 지슈카는 즉시 병사들을 몰고 프라하로 이동하여, 십자군이 프라하에 도착하기 직전에 프라하 시에 입성했다. 프라하 시는 블타바 강변에 위치했고, 오래된 망루가 서 있는 비트코프 언덕이 블타파 강의 동쪽 둑을 형성했다. 얀 지슈카는 이 비트코프 언덕이 적에게 장악된다면, 프라하의 오른쪽 측면이 노출되어 함락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여기서 결전을 벌이기로 마음 먹었다.
그는 비트코프 언덕에 설치된 망루 인근의 328피트 높이의 산등성이를 가로지르는 도랑을 파고 그 뒤에 말뚝 울타리를 설치하여 방어력을 보강했다. 또한 진영 양쪽 끝에 탑을 나란히 세웠으며, 바겐부르크 16대를 전방에 내세우고 핸드 캐논과 석궁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여 다가올 전쟁을 준비했다. 이윽고 8만에 달하는 후스파 십자군이 프라하를 포위하기 시작하자, 그는 곧바로 비트코프 언덕으로 달려가서 전투를 준비했다.
한편, 지기스문트 황제를 위시로 한 십자군은 신성 로마 제국 전역에서 온 군대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주로 보헤미아인, 독일인, 헝가리인 등이었는데, 대부분 기사와 용병이었다. 그들은 부브니 마을 북쪽 높은 고지에 막사를 세웠다. 지기스문트는 부브니 고지에 대포를 설치한 뒤, 프라하 시를 압박해 들어갔다. 그는 곧 비트코프 언덕의 전략적 중요성을 간파하고, 그곳을 공략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리하여 비트코프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후스파 십자군
- 총사령관: 지기스문트
- 병력: 80,000명. 이중 비트코프 언덕에 투입된 병력은 1,000명.
3.2. 후스파
- 총사령관: 얀 지슈카
- 병력: 당대 기록에 따르면, 비트코프 언덕 수비를 맡은 인원은 남성 26명과 여성 3명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가 J. 두딕은 약 60명의 군인이었을 것이라 주장했다. 또한 비트코프 언덕과 성벽 사이에 규모는 알려지지 않은 매복군이 숨어 있었다.
4. 전투 경과
1420년 7월 13일, 지기스문트는 프라하 공략 명령을 내렸다. 그는 프라하 시 동쪽 둑의 흐라드차니와 비셰흐라드 남쪽에 두 차례의 공격을 가하게 하여, 적의 시선을 그쪽으로 유인하게 했다. 여기에 이센부르크의 하인리히가 지휘하는 1,000명 이상의 작센 기병대가 비트코프 언덕을 향해 진격하였고, 독일과 헝가리 기사들은 언덕이 장악되는 대로 성문을 향해 돌격할 준비를 했다. 작센 기병대는 비트코프 언덕을 기어 오르다가 고지에 바겐부르크를 세워놓고 대기 중이던 적의 핸드 캐논 공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곧장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당시 바겐부르크에는 수십 명만이 숨어 있었지만, 기사들은 거대한 바겐부르크를 돌파하지 못한 채 그 위에서 핸드 캐논과 석궁을 퍼붓는 적군을 상대로 고전했다. 그때, 얀 지슈카는 비트코프 언덕 아래의 포도밭을 통해 부대를 은밀하게 이동했다가, 바겐부르크 앞에서 정신없이 싸우고 있던 작센 기병대의 후미를 습격했다. 작센 기병대는 갑작스런 공격에 놀라 달아났고, 그 과정에서 기사 300명이 언덕에서 떨어져 즉사했다. 그들은 블타파 강둑의 리벤까지 도망쳐서야 전력을 수습할 수 있었다. 당시 부브니 고지에 대포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그들은 별다른 화력 지원을 하지 않아 아군이 궤멸되는 걸 막지 못했다.
비트코프 언덕 공략이 뜻밖에 수포로 돌아가자, 십자군은 사기가 급락했다. 지기스문트가 다시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주저하는 사이, 전염병이 창궐하고 급료를 받을 길이 막막해지면서 많은 용병이 군대를 이탈했다. 결국 지기스문트는 7월 말 프라하 공성전을 포기하고, 대신 비셰흐라드와 흐라드차니 성채를 점령하고 18,000명을 남긴 뒤 철수했다. 이리하여 비트코프 전투는 후스파의 완승으로 끝났다.
5. 결과
비트코프 전투는 후스파 십자군에게 치욕적인 결과를 안겨줬다. 그들은 이 전투에서 400~500명이 전사한 반면, 후스파의 전사자는 거의 없었다. 이에 사기가 크게 오른 후스파는 보헤미아 곳곳에서 십자군을 몰아냈고, 프라하 시민군도 비셰흐라드와 흐라드차니 탈환을 위해 공세를 개시, 11월 1일 두 곳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리하여 보헤미아 지방 대부분은 후스파의 영향력 아래 이르렀다.이후 후스파는 보헤미아의 새 국왕으로 리투아니아의 비타우타스 대공을 선출하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가자, 1421년 20명의 지도자로 구성된 잠정 정부 구성을 결의했다. 얀 지슈카는 이 정부에 참여하여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가톨릭 측은 이를 용납할 마음이 전혀 없었고, 그해 말부터 십자군 원정을 재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