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전경
1. 개요
아랍어 بسكرة영어 Biskra
알제리 중북부 비스크라 주의 주도. 알제에서 동남쪽으로 400km, 콩스탕틴에서 서남쪽으로 200km 떨어져 있으며 남쪽으로 200km 더 가면 투구르트가 나온다. 인구는 약 35만명으로, 알제리에서 6번째로 큰 도시이다. 별명은 '사막의 관문'이며 아우레스 산지 서쪽 끝자락의 평지에 입지한다. 와디 사이드가 시내를 양분하며, 서쪽이 원도심이다. 동쪽에 모하메드 키데르 대학이 있으며 남쪽 외곽에는 무하메드 키데르 공항이 있다.
2. 역사
시디 오크바 모스크
먼 옛날부터 베르베르 인들이 거주하였고, 그들은 유구르타 전쟁과 1세기 탁파리누스의 반란 등 로마에 맞섰다. 로마 제국은 누미디아 병합 후 이곳에 베스케라 요새를 세웠으나 전진기지 성격이었고, 동북쪽 100km 지점에 팀가드를 주요 방어 거점으로 삼았다. 당시 요새에서 현 지명이 유래되었고, 주교구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7세기 말엽 이슬람 정복기에 비스크라는 누미디아 왕자 코세일라의 거점이었다. 683년 마그레브 전선에서 활약하던 무슬림 장군 우크바 이븐 나피 알 피흐리가 대서양 연안까지 진격한 후 회군하며 일대를 통과하자 코세일라는 비스크라 동쪽의 타후다에서 매복하여 그를 전사시켰다. 그와 여러 사하바들의 유해는 비스크라에서 서남쪽으로 15km 떨어진 오아시스에 매장되었고, 시디 오크바로 명명되었다. 현지 이맘에 의하면 메카, 메디나. 알 아크사에 이어 이슬람 제4의 성지라 한다. 다만 690년대 우마이야 왕조의 반격으로 비스크라는 이슬람화되었다.
10세기 파티마 왕조를 거쳐 11세기 함마드 왕조의 지배를 거쳐 비스크라는 알제리 내륙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다만 1055년경 주민들이 함마드 조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미르 불루긴에 의해 학살을 당하기도 하였다. 다른 사하라 지역 도시들과 달리 비스크라에서는 이바디파 대신 말리키 순니파가 주류를 이루었다. 함마드 조의 쇠퇴 이후 비스크라는 바누 힐랄 베두인들의 습격에 시달렸다. 이에 주민들은 무와히드 왕조의 보호를 청하였다. 뒤이은 하프스 왕조 시기 비스크라는 중요한 지배 거점이었고, 1542년 오스만 제국령이 되었으나 그 속국인 베니 압바스 왕국이 실효 지배하였다. 그러던 1680년 역병이 덮쳐 7천여명이 병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오스만 시기에도 비스크라는 상업 도시로 유지되었고, 비교적 아랍 색채가 짙었다.
3. 근현대 : 반프랑스 저항
1849년 7월 ~ 11월의 자아차 전투를 기리는 우표
프랑스측 기록화 (1856년작)
1844년 3월 프랑스 군이 비스크라를 점령하였고, 알제리 저항군 지휘관 아흐메드 벨 핫지는 사막으로 후퇴하였다. 프랑스 당국은 인근 아우레스 산지의 반군에 대비하기 위해 도시를 요새화하였다. 하지만 1847년 압델카데르가 항복한 후에도 저항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그에 알제리 저항군을 이끈 엘 핫지 모하메드 엘 오크비는 1847년 12월과 1872년 등 비스크라의 프랑스 군을 지속적으로 공격하였다. 1849년에는 비스크라의 부족장 부 지안은 대추야자 과세에 반발하던 주민들을 모아 비스크라에서 20km 떨어져 있는 해자가 둘러진 자아차 성채를 장악하였다. 이에 7천 프랑스 군이 진군하여 53일간 포위한 끝에 2천이 넘는 희생을 치르며 성채를 함락하고 부 지안을 죽였다. 1954년 10월 알제리 독립 전쟁 당시 비그크라에서는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나 경찰서를 습격하며 시가전으로 번졌고, 양측 모두 큰 희생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