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신라 병부(兵部)의 장관직.병부령은 현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신라 군부 최고위 관직으로, 관등이 대아찬(大阿湌)~태대각간(太大角干)인 자 중에서 임명되었고, 재상(宰相)과 사신(私臣)[1]을 겸직할 수 있었다. 상대등, 중시(시중)와 더불어 재상직이었다.
2. 관직 서열
관직 서열에 있어 종래에는 상대등/중시(시중), 병부령 순으로 이해하였다. 전제왕권이 확립된 중대에는 왕명을 받는 집사부 중시(시중)가 귀족세력의 대표인 상대등보다 우위에 있었고, 왕권이 약화되고 귀족연합적 정치가 운영된 하대에는 상대등이 중시(시중)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보았다. 다만 최근에는 중시(시중)가 상대등, 병부령보다 직급은 낮으나 행정부 수반으로서 기능하며 왕을 대신하여 정치적 책임을 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병부령에서 시중이 된 사례는 없지만, 시중에서 병부령이 된 사례는 있다.3. 역사
병부령은 516년( 법흥왕 3)에 신설되었다. 장관직인 병부령이 먼저 설치되었고, 이듬해인 517년(법흥왕 4) 담당 부처인 병부(兵部)및 하위 관직이 설치되었다. 장관인 영(令) 아래에 차관인 대감(大監)[2] 3명, 제감(弟監)[3] 2명, 노사지(弩舍知)[4] 1명, 사(史) 17명, 노당(弩幢)[5] 1명을 두었다.법흥왕은 관등을 정비하고 상대등을 설치하는 등 신라의 관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중앙집권화를 꾀한 왕이었는데, 이러한 중앙 관제 정비의 본격적인 첫 신호탄이 병부와 병부령 설치였다. 병부는 기록상 신라 조정에 처음으로 설치된 관부였으며 이후 품주, 위화부 등 다른 중앙관서들이 순차적으로 신설되었고 신문왕 때 14부가 완비된다.
법흥왕 당시에는 법흥왕 본인이 친히 군권을 장악하고 행사했기 때문에 병부령이 공석인 때도 있었다. 이후 진흥왕 대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치면서 신라군의 규모가 비대해지고 본격적인 삼국통일전쟁기에 들어서게 되면서 병부령직은 신라 조정에서 핵심 요직으로 자리잡게 된다.
병부령은 544년(진흥왕 5) 2명으로 증원되었다. 증원 당시 진흥왕의 나이가 어려 모후 지소태후가 섭정을 맡고 있는 상황이었다.[6] 당초 지소태후는 법흥왕이 사망하여 섭정에 오른 직후인 541년(진흥왕 2) 국방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명장 이사부를 병부령에 임명했었다. 이사부는 지소태후를 보좌하며 신라 조정을 훌륭히 이끌었고, 지소태후 역시 이사부를 신임하였고 국정 전반을 통해 이사부의 건의를 전향적으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북쪽으로는 고구려, 남쪽으로는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양면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기에 2명의 병부령 임명으로 인한 업무 분담 및 전사 등 유사시를 대비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또한 1인의 병부령에 지나치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병부령이 2명으로 증원된 이후에도 여전히 이사부는 지소태후의 신임을 받아 독산성 전투, 독살성-금현성 전투 등에서 공을 세웠다. 병부령이 2인으로 증원된 이후 신라 군부는 오늘날의 합동참모본부와 유사하게 2명의 병부령의 협의체로 운용되었다. 게다가 병부령 아래에 차관인 대감(3인), 제감(2인) 등 여러 관리, 관원들이 존재하여 현대의 참모본부와 비슷한 성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신라 군부 수뇌부가 합의체로 운영되면서 신라군은 특정 장수 1인의 독단적인 판단으로 상황을 오판하거나 작전을 그르치는 경우가 줄어들게 된다.
병부령은 659년(무열왕 6) 3명으로 증원되었고, 이듬해인 660년(무열왕 7) 백제 정벌을 단행하여 동년 7월[7] 백제를 멸망시켰다. 이후 신라 말기까지 병부령 3인 체제가 유지된다.
병부령뿐만 아니라 신라의 모든 관부는 기본적으로 장관을 2명 또는 그 이상으로 두어 권력의 독점을 막고 장관들이 서로 견제하도록 했다.
4. 병부령 역임 인물
※ 성명 / 재임기간
* 김이사부(金異斯夫)(541~?)
* 김후직(金后稷)(580~?)
* 김법민(金法敏)(654~?) *문무왕
* 김진주(金眞珠)(659~?)[8]
* 김군관(金軍官)(?~681)[9]
* 김옹(金邕)(?~771~?)[10]
* 김충렴(金忠廉)(785~?)[11]
* 김준옹(金俊邕)(792~796?)[12] *소성왕
* 김언승(金彦昇)(796~801?)[13] *헌덕왕
* 김헌정(金獻貞)(?~813~?)[14]
* 김양(金陽)(839~?)
* 김위홍(金魏弘)(871/872~?)[15] *(혜성왕)
* 이금현(李金現)(900년대 초)[16]
* 김이사부(金異斯夫)(541~?)
* 김후직(金后稷)(580~?)
* 김법민(金法敏)(654~?) *문무왕
* 김진주(金眞珠)(659~?)[8]
* 김군관(金軍官)(?~681)[9]
* 김옹(金邕)(?~771~?)[10]
* 김충렴(金忠廉)(785~?)[11]
* 김준옹(金俊邕)(792~796?)[12] *소성왕
* 김언승(金彦昇)(796~801?)[13] *헌덕왕
* 김헌정(金獻貞)(?~813~?)[14]
* 김양(金陽)(839~?)
* 김위홍(金魏弘)(871/872~?)[15] *(혜성왕)
* 이금현(李金現)(900년대 초)[16]
[1]
내성(內省)과 어룡성(御龍省)의 장관직이다.
[2]
대감→시랑(侍郞)→대감 순으로 개칭되었다.
[3]
제감→대사(大舍)→낭중(郞中)→제감 순으로 개칭되었다.
[4]
노사지→사병(司兵)→노사지 순으로 개칭되었다.
[5]
노당→소사병(小司兵)→노당 순으로 개칭되었다.
[6]
삼국사기에는 정확히 태후가 섭정을 맡았다고 하여 엄밀히는 지소태후인지 기록되지 않았으나 삼국유사에 지소부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7]
그레고리력 660년 9월.
[8]
660년 백제를 멸망시킬 당시에도 병부령이었다. 662년(문무왕 2)에 병을 핑계로 국사를 소홀히 했다고 하여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670년(문무왕 10) 12월 김진주가 반역을 꾀한 한성주총관 수세(藪世)를 처형했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실제로 김진주가 처형된 것은 670년 12월 이후일 것으로 추정한다.
[9]
681년 김흠돌의 역모를 알고도 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
[10]
771년(혜공왕 7) 성덕대왕 신종의 주조를 주관할 당시 김옹의 관직과 관등이 검교사(檢校使) 병부령(兵部令) 겸(兼) 전중령(殿中令) 사어부령(司馭府令) 수성부령(修城府令) 감사천왕사부령(監四天王寺府令) 병(幷) 검교진지대왕사사(檢校眞智大王寺使) 상상(上相) 대각간(大角干)이었다.
[11]
792년(원성왕 8) 사망하였다.
[12]
795년 1월 태자가 되었고, 799년 1월 제39대 소성왕으로 즉위하였다. 태자가 병부령을 겸할 수 있었다고 한다면, 동생인 김언승이 병부령으로 임명된 796년까지 병부령이었던 셈이다.
[13]
800년(애장왕 원년) 새로 즉위한 왕이 13세로 아직 어리므로 병부령 김언승이 섭정하였다. 801년(애장왕 2) 병부령 김언승을 어룡성(御龍省) 사신(私臣)으로 삼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았다. 즉 김언승은 801년까지도 병부령이었다. 병부령에서 상대등으로 전임한 것인지 겸직한 것인지 알 수 없다.
[14]
813년(헌덕왕 5) 해동(海東) 고신행선사(故神行禪師)의 비문을 찬(撰)한 김헌정의 관직과 관등이 황당(皇唐) 위위경(衛尉卿) 국상(國相) 병부령(兵部令) 겸(兼) 수성부령(修城府令) 이간(伊干)이었다.
[15]
황룡사(皇龍寺) 찰주본기(刹柱本記)에 김위홍의 관직과 관등이 871년(경문왕 11)에는 상재상(上宰相) 이간(伊干)으로, 872년(경문왕 12)에는 감수성탑사(監脩成塔事) 수병부령평장사(守兵部令平章事) 이간(伊干)으로 기록되어 있다. 871~872년 사이에 병부령으로 전임된 것으로 보인다.
[16]
이금현(李金現). 본관은
경주. 신라 말
소판을 지낸 이거명(李居明)의 아들이자
삼한공신 이금서(李金書)의 아버지이고, 신라
경순왕과는 사돈관계이다. 1375년(우왕 1) 목은
이색(李穡)이 찬한 이제현 묘지명에
이제현(李齊賢)의 가계를 언급하면서 "...신라 시조인
혁거세의
좌명대신인
이알평(李謁平)의 후손인 소판 거명(居明)이 병부령 금현(金現)을 낳고, 병부가 삼한공신인 태수 금서(金書)를 낳았다. 신라왕 김부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으로 귀순한 뒤 태조의 딸인 낙랑공주에게 장가들어 딸을 낳았다. 그 딸이 금서에게 출가하여 윤홍(潤弘)을 낳았다..."라고 기록하였다. 2007년, 황해북도 개성시에 위치한 이제현 무덤에서 위 묘지명을 새긴 길이 1.65m, 너비 63.2cm, 두께 20.5cm, 무게 600kg 규모의 거대한 묘지석이 발굴된 바 있다.(
고려시대 사료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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