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18:30:56

배해

裴楷
(237 ~ 291)

1. 개요2. 행적
2.1. 위나라 시기2.2. 서진 건국 시기2.3. 사마염 사후
3. 일화

1. 개요

서진의 인물. 자는 숙칙(叔則). 배휘의 아들. 배수의 사촌 동생. 아들로는 장남 배찬(裴瓚)[1], 삼남 배헌이 있다.

사례 하동군 문희현 사람으로 밝고 깨우쳐 알면서 식견과 도량이 있었으며, 어려서부터 왕융과 함께 나란히 명성이 있었다. 풍채와 정신이 고매하면서 생김새가 빼어나 훤칠했으며, 처신과 취사를 마음에 맡겨 행동해 비방과 칭찬이 자신에 이를지라도 편안하게 대처한 것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여러 책을 두루 섭렵하면서 특히 이치를 따지고 옳고 그름에 자세했으며, 그 때 사람들이 그를 일러 옥인(玉人)이라고 하면서 배해를 보면 마치 옥으로 빚은 산이 사람을 비추는 듯하다고 했다.

2. 행적

2.1. 위나라 시기

종회 왕융과 함께 추천해 사마사를 섬겨 상국연이 되었다가 상서랑으로 옮겼으며, 가충이 율령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정과랑으로 삼았다. 일이 끝나자 어전집독에 임명되어 신하들이 올린 상소의 타당성 여부를 평론하게 했는데, 배해는 화술이 좋아 주위 사람들이 주위를 집중하고 듣는 사람을 피곤을 몰랐다.

사마염이 무군을 지내면서 참군사가 되었고 이부랑의 자리가 비웠을 때 종회가 배해는 맑고 사리에 정통하다고 하면서 왕융과 함께 추천하자 이부랑이 되었으며, 이후에는 중서랑이 되었을 때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숙연해져 얼굴빛을 고쳤다.

2.2. 서진 건국 시기

263년에 사마염이 황제가 되자 치세가 얼마나 길지 점을 쳤을 때 하나라는 점괘를 얻어 사마염이 기뻐하지 않은 것을 보고 "노자에 하늘은 하나를 얻어서 맑아지고 땅은 하나를 얻어서 편안하며, 임금은 하나를 얻어서 천하를 바르게 한다고 했다."라고 말해 사마염이 기뻐했다.

얼마 후에는 산기시랑에 임명되었다가 산기상시, 하내태수, 둔기교위, 우군장군, 시중 등을 역임했으며, 268년에는 상서랑을 지내면서 가충 등이 수정한 율령을 읽었고 후에 여러 번 옮겨서 태보, 중서령과 시중, 위위 등을 역임했다.

271년에 시중을 지낼 때 사마염이 현재의 잘못을 묻자 가충의 무리들을 조정에 있게 한 것을 지적했으며, 오나라가 평정되자 사마염이 태평성대의 교화를 수립하고 공경들을 모아 정치의 도리에 대해 의논하자 배해는 삼황오제의 정치, 한나라와 위나라의 창성과 쇠퇴에 대해 진술해 사람들이 탄복했다.

2.3. 사마염 사후

아들인 배찬이 양준의 딸과 결혼해 사돈 관계였지만 배해는 양준을 경시해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위위로 있다가 290년에 양준이 정권을 잡자 가을 8월 26일에 소사로 임명되었다. 태자소사로 옮기면서 아무 일 없이 침묵을 지켰고 291년에 양준이 주살당하면서 양준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벌을 당하게 되었는데, 배해는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움직여 지필을 찾아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배해는 부지의 도움으로 사형을 면하고 파면되었고 위관, 사마량 등이 배해가 올곧고 정의로워 아부하지 않는다면서 작위를 받아야 한다고 하자 배해를 임해후(臨海侯)에 봉하고 식읍을 2천 호로 했다. 사마위를 대신해 북군중후에 임명되고 산기상시가 더해졌는데, 사마위가 북군중후에 임명되지 못해 화가 난 것을 알고 받아들이지 않고 상서로 옮겼다.

그의 장자인 배여는 사마량의 딸, 배해의 딸은 위관의 아들과 결혼했지만 배해는 내란이 그치지 않는 것을 걱정해 바깥에 나가 진수하기를 원해 안남장군, 가절, 도독형주제군사에 임명되어 떠나려 할 때 사마위가 조서를 사칭해 사마량, 위관 등을 죽였으며, 사마위가 배해가 일전에 사마위의 자리인 북군중후를 빼앗으려 하면서 사마량, 위관과 인척이라는 이유로 몰래 사람을 보내 배해를 죽이려 했다.

배해는 사마위가 자신에게 원한을 가졌고 변고가 일어난 것을 듣자마자 낙양에 있는 장인인 왕혼의 집에 숨었으며, 사마량의 작은 아들과 함께 하룻밤에 8번이나 숨은 곳을 옮겨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사마위가 주살당하고 가남풍이 정권을 잡자 중서령, 시중에 임명되어 장화, 왕융과 함께 국가의 기밀을 관장했다.

권세와 이익을 구하는 곳을 기뻐하지 않았고 왕혼이 배해를 광록훈으로 추천했으며, 광록훈에는 임명되지 않고 광록대부, 개동의동삼사를 더했고 병으로 위독해 조정에서 왕연을 보내 병을 살펴보게 했다. 배해가 왕연을 보고 끝내 서로 알고 지내지 못했다고 하자 왕연은 깊이 그 정신이 영준함을 감탄했다.

결국 해를 넘기지 못하고 향년 55세로 죽었으며 시호를 원(元)이라 했다.

3. 일화

배해는 성정이 관대하고 두터워 다른 사람과 거슬러 원수를 맺는 일이 없었으며, 검소한 것을 고집하지 않아 부귀한 곳에 가서 놀면 진귀한 물건을 취했다. 거마나 기구, 복식들이라 해도 짧은 시간 내에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었으며, 별장을 경영했다가 종형인 배연이 보고 기뻐하자 별장을 배연에게 줬다.

양왕 사마융, 조왕 사마륜 등에게 조세 중에서 수백만 금을 청해 친척 중에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해 어떤 사람이 어찌 남의 물건을 구걸해 은혜를 베푸냐고 하자 남아도는 것을 덜어서 부족한 것을 보태는 것이 하늘의 도라고 했다. 훌륭한 횡령죄 다른 사람의 비방이나 칭찬에 신경쓰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모두 이같은 부류였다.

왕융이 모친상을 당할 때 배해는 만약에 한 번 통곡할 때 사람이 상하게 되면 왕융은 성명을 끊었다는 비난을 반드시 면치 못할 것이라고 했다.

석숭이 장수교위 손계서와 함께 주연을 즐긴 적이 있었는데, 손계서가 지나치게 오만불손해 석숭이 표문을 올려 그를 파면시키고자 했다. 배해는 그 말을 듣고 손계서의 술주정은 온 세상이 알고 있는데, 광약(술)을 먹이고 나서 바른 예절로 그를 나무란다면 또한 잘못된 게 아니겠냐고 했다.

사람을 알아보는 재능이 있어 처음에 하남에 있을 때 악광이 군의 경계에 거주했지만 명성이 없었는데, 배해가 악광을 만나보고 기이하게 여겨 재부(宰府)에 들어가게 했다.

일찍이 하후현을 만나고서는 엄숙하게 종묘 가운데 들어가서 보이는 것은 예악의 도구들 뿐이라 했으며, 종회는 무기고를 보는 것 같은데 창들이 앞에 보일 뿐이라 했다. 부하에 대해서는 너무 드넓어 보이지 않는 바가 없으며, 산도에 대해서는 마치 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 보는 것 같아서 유연히 깊고 멀다고 했다.


[1] 자는 국보(國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