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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5 17:50:40

염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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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국왕 }}}}}}}}}


<colbgcolor=#2531a2>발해염부왕
칭호 오사성부유부발해염부왕
(烏舍城浮渝府渤海琰府王)
직위
성씨 없음 / 염(琰)(?)
이름 염부(琰府)(?) / 부(府)(?)
생몰연도 미상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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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발해 유민이자 부흥운동의 지도자. 오사성(烏舍城)[1]을 근거지로 삼아 거란족 요나라에 대적하였으며 981년 북송 태종이 발해에 보낸 국서에서 언급된다.

2. 생애

태평흥국(太平興國) 6년(981)에 오사성(烏舍城) 부유부(浮渝府)의 발해염부왕(渤海琰府王)에게 조서(詔書)를 내려 이르기를,“짐(朕)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아 사해(四海)를 다 소유하니 온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없다. 더구나 태원(太原) 지역은 국가의 보장(保障)인데, 최근에 〈거란이〉 빼앗아 차지하여 마침내는 서로 주고받으며 요(遼)나라에 의지하여 후원(後援)으로 삼아 여러 대가 지나도록 정벌을 겪지 않았다. 짐이 지난해에 정예 군사들을 거느리고 모든 장수들도 대동하여 병문(幷門)의 외딴 성을 함락시켜 흉노(匈奴)의 오른팔을 끊어버리고, 선량한 백성들을 정성스럽게 위문하고 〈죄인들은〉 처단하여 백성들을 소생시켜 주었다. 어리석은 북쪽의 오랑캐가 도리에 어긋나게 원한을 품고 함부로 침식하며 우리 국토를 침범하므로, 지난해에 한 번 군사를 출동시켜 그들을 맞아 공격하여 목을 베고 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이제 북을 울리면서 깊숙이 쳐들어가 돗자리를 말듯이 빠르게 말을 몰아, 그 용정(龍庭)을 불사르고 오랑캐들을 크게 무찌르고자 한다. 평소에 듣건대 그대의 나라가 원수같은 오랑캐에 인접해 있는 까닭에 병탄되면서도 힘이 그를 제재하지 못하고 그대로 복종하여 땅을 떼어 주며 시달리고 있다 하였다. 〈짐의〉 깃발이 적을 쳐부술 때는 이웃나라에게는 울분을 씻을 기회가 되니, 부족의 군대들을 다 출동시켜 우리의 선봉(先鋒)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하다. 오랑캐들을 섬멸하게 되면 성대하게 상을 주되, 유주(幽州)와 계주(薊州)는 중원(中原)에 다시 돌리고 북방의 사막 지역은 모두 그대에게 줄 것이다. 가능한대로 협력하기 바라며, 짐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북송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거란(契丹)을 정벌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이런 조서를 내려 타이른 것이다.
송사 권491 열전250 외국7 발해국 中

981년 송태종이 오사성 부유부[2]의 염부왕에게 내린 조서에서 언급된다. 당시 송태종은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요나라 정벌을 시도했으나 크게 패배한지 얼마 안 된 상태였기에 발해의 옛 땅에서 일어난 발해부흥운동 세력과 연계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서의 내용에 의하면. 염부왕에게 송태종은 자신을 도와 요나라를 멸망시킨다면 유주와 계주 이북의 지역을 모두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지만, 염부왕측이 어떤 반응을 했는지는 기록의 부재로 알 수 없다.[3]

3. 기타

유득공의 발해고에서는 제1권 군고에서 '염부왕(琰府王)'이라는 이름으로 다루었다. 또한 그의 본명은 불명이나 태종의 조서로 그가 대씨의 후예라고 추측했다.

발해부흥운동을 주도한 인물인 연파(燕頗)와 동일인물으로 보기도 한다. 그 근거로 연파가 봉기한 곳이 발해의 부여부가 있던 요나라의 황룡부 지역이었고, 후에 요나라에 패해 오사성과 동일지역으로 추정되는 올야성으로 도피하였다고 나타나기 때문이다(975년 9월). 그리고 쭉 올야성을 근거지로 삼게 된 걸로 보이는데 또 송태종이 오사성에 사절을 보냈던 때(981년)와 타이밍이 정확히 일치한다. 이후 연파는 또 다른 부흥운동국인 정안국에 복속하였거나 연계해 요나라에 대항한 것으로 보인다.

염부왕이라는 호칭에는 하필 행정구획 단위로 쓰인 부(府)가 들어가 있어서 이름인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염(琰)의 경우 보통은 인명이나 지명, 행정구역명 같은 고유명사에나 쓰일 법한 한자에 해당한다. 단순히 이름이 그냥 염부였고 왕을 자칭했기에 염부왕이라 불린 것일 수도 있긴 하지만[4] 위의 염부왕=염파라는 가설과 더불어 생각하면 또 다른 추론이 가능한데, 만약 정말로 연파가 염부왕과 동일인물이 맞으며 정안국에 복속한 것도 맞다면 정안국에서 옛 부여부쪽의 땅에 염부(琰府)라는 행정구역을 설치했고 그쪽 지역에 빠삭했던 연파를 제후왕으로 삼았기에 제후왕으로서 염부왕이라 불린 것일 수도 있다. 북송측에서는 정안국이든 뭐든 어차피 부흥운동 세력은 모두 발해의 후신 세력으로 보았으니 합쳐서 발해의 염부왕이라 불렀다 해도 이상할 건 없다.
[1] 올야성과 동일한 장소로 보아 위치상 올야국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위치는 불명이나,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에 비정하기도 한다. [2] 음운상 발해 15부 중 하나였던 부여부와 유사하다. [3] 설령 호응하려 했어도 요나라의 공세에 밀려 그대로 통신이 끊어져 버렸을 가능성이 있다. [4] 위 국서에서 부유부라는 지명이 부여부를 비슷한 발음의 한자로 대충 옮겨적은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사신이 들은 염파의 이름을 대충 발음이 비슷한 염부로 옮겨적은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