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6-15 22:21:02

발렌티나 비스콘티

파일:발렌티나 비스콘티.jpg
이름 발렌티나 비스콘티
Valentina Visconti
출생 1366년 또는 1368년
밀라노 공국 파비아
사망 1408년 12월 4일
프랑스 왕국 블루아
아버지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
어머니 프랑스의 이자벨
형제 잔 마리아 비스콘티(이복형제),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이복형제)
남편 루이 1세 도를레앙
자녀 샤를 1세, 필리프, 장, 마르그리트
직위 오를레앙 공작부인
1. 개요2. 생애3. 가족

[clearfix]

1. 개요

밀라노 공국의 공녀, 오를레앙 공작부인. 남편 루이 1세 도를레앙을 암살한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에게 복수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2. 생애

1366년 또는 1368년 밀라노 공국 파비아에서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와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딸인 이자벨의 딸로 출생했다. 어머니는 그녀가 태어난 직후 세상을 떠났고, 친할머니인 사보이아의 블랑슈의 양육을 받았다. 성품이 자상하고 불우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을 좋아했으며, 신앙심이 강하고 박식했던 블랑슈는 발렌티나를 잘 키웠다. 프랑스 시인 유스타슈 데샹(Eustache Deschamps, 1340 ~ 1404)은 발렌티나를 "젊고, 유쾌하고, 상냥한" 여인으로 묘사했으며, 대다수 연대기 작가들도 그녀를 아름답고 지적인 공주로 묘사했다.

1379년, 발렌티나는 밀라노 영주 베르나보 비스콘티의 아들이자 파르마의 영주이며, 그녀의 사촌이기도 한 카를로 비스콘티와 약혼했고, 교황청으로부터 특별 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베르나보는 나중에 약혼을 취소하고, 1382년 카를로를 아르마냐크 백작 장 2세 다르마냐크의 딸인 베아트리스와 결혼시켰다. 1385년, 잔 갈레아초는 밀라노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고, 이로 인해 발렌티나의 지위는 상승했다. 잔 갈레아초는 발렌티나를 괴를리츠 공작 요한과 결혼시키는 문제를 놓고 보헤미아 국왕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바츨라프 4세와 협상했으며, 명목상 나폴리 왕국의 국왕을 칭하던 앙주 공작 루이 2세와 결혼 동맹을 협상하기도 했다.

얼마 후, 잔 갈레아초는 앙주 공국 대신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둘째 아들이며 오를레앙 공작인 루이 1세 도를레앙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바츨라프 4세는 잔 갈레아초가 자기와 결혼 협상을 하면서 프랑스 왕실과도 그런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강경한 어투가 담긴 편지를 보내며 협상을 중단했다. 이리하여 발렌티나의 결혼 협상 상대는 오직 루이 1세 도를레앙만 남았다. 발렌티나의 어머니 이자벨은 샤를 5세의 누이였기 때문에, 그녀와 루이는 친척 관계였고, 이 때문에 교황청의 특별 허가가 필요했다. 1386년 11월 25일, 교황청은 특별 허가를 발령했다. 1387년 1월 27일, 파리에서 결혼 계약이 체결되었다. 발렌티나는 베르투스 백국과 아스티 시를 지참금으로 받았고, 현금 450,000 플로린과 보석 75,000 플로린을 추가로 받았다. 이때 맺어진 결혼 계약서에 따르면, 비스콘티 가문이 나중에 공작위를 이을 후계자가 끊어진다면, 루이 1세 도를레앙과 발렌티나의 후계자가 밀라노 공국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이는 훗날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 프랑수아 1세가 밀라노 공국에 대한 프랑스의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가 되었다.

두 사람의 대리 결혼은 1387년 4월 8일 밀라노와 프랑스 궁정에서 동시에 거행되었다. 하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발렌티나는 1389년 6월 23일에야 밀라노를 떠날 수 있었다. 1389년 8월 17일 멜룬에서 루이 1세와 합류한 뒤 결혼식을 거행했으며, 8월 29일 프랑스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의 파리 입성식 때 이자보와 함께 마차를 타고 파리 시에 입성했다. 그 후 파리의 호텔 드 나바르에서 루이 1세와 함께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다가 1396년 남편과 함께 오를레앙으로 돌아갔다. 이에 대해 프랑스 연대기 작가 장 주브넬 데 우르생은 프랑스 왕비 이자보 드 바비에르 샤를 6세의 각별한 총애를 받던 발렌티나를 질투한 끝에 발렌티나를 궁정에서 내쫓았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이러한 기록은 이자보에 대한 근거없는 가쉽 모음에 불과하다면서, 발렌티나는 추문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떠났을 뿐이라고 본다.

파일:샤를 6세에게 정의를 간청하는 발렌티나.jpg
알렉상드르 콜린 작, <오를레앙 공작 암살에 대해 샤를 6세에게 정의를 간청하는 밀라노의 발렌티나>, 1836년.

그 후 오를레앙에서 여러 자식을 낳으면서 조용히 지내던 발렌티나는 남편 루이 1세가 1407년 11월 23일 파리의 마레 지구에서 부르고뉴 공작 용맹공 장의 부하였던 라울 당크통빌이 이끄는 이끄는 복면을 쓴 암살자 15명의 습격으로 암살당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했다. 이에 그녀는 1407년 12월 13일 검은 말이 끄는 검은색 천으로 장식된 마차를 탄 채 상복을 입은 대규모 수행단의 호위를 받으며 파리 시에 입성한 뒤 아이들과 함께 샤를 6세를 찾아갔다. 그녀는 새 오를레앙 공작이자 장남인 샤를 1세 도를레앙이 샤를 6세에게 경의를 표하게 한 뒤, 국왕 앞에 엎드리며 복수를 간청했다. 이에 파리 시의 왕족들과 고위 귀족들은 모두 동정심을 보이며 그녀를 지지했다.

그러나 막대한 세금을 뜯어가면서 가스코뉴 원정 실패 등 온갖 실책을 저지르던 오를레앙 공작을 경멸했던 북부 프랑스의 도시들과 파리 시민들은 장을 심정적으로 지지했다. 이러한 민심으로 인해 장을 섣불리 공격할 엄두를 못낸 오를레앙파 지도부는 1408년 1월 아미앵에서 장에게 협상을 제의했다. 초기에는 보복이 올 것을 두려워하고 있던 장은 뜻밖에도 정적들이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기세가 살아났다. 그는 수많은 귀족과 무장한 호위대를 이끈 채 아미앵에 입성한 뒤 왕족들 앞에서 오를레앙 공작은 악인이었으니 그를 죽인 건 의로운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파리 대학 총장이자 신학자 장 프티를 비롯한 파리대학 신학 교수들은 오를레앙 공작이 폭군이었으며, 폭군을 살해하는 건 정당하다며 장을 옹호했다.

이후 협상이 결렬된 뒤, 장은 기병 1,500명을 이끌고 파리로 진격해 2월 28일 파리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파리에 위풍당당하게 입성했다. 발렌티나를 비롯한 오를레앙 지지자들은 사전에 빠져나갔고, 국왕 샤를 6세와 이자보 왕비는 왕궁에 틀어박혔다. 그 대신, 도팽 루이가 호텔 생폴의 그레이트홀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장은 파리 대학 총장과 교수들, 파리 시민 대표 400인, 몰래 들어온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를레앙 공작을 살해한 이유에 대한 공개 변론을 했고, 모두의 지지를 받아냈다. 이후 그는 샤를 6세를 찾아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사면을 받았다.

1408년 6월, 리에주 시민들이 주교 요한 3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리에주 주교는 장의 주요 동맹자였기에, 장은 그를 돕기 위해 파리를 떠났다. 친 오를레앙 세력은 이 때를 틈타 파리로 쳐들어가서 곧바로 장악한 뒤 장에게 내려졌던 사면령을 취소하고 군대를 소집했다. 하지만 장은 오테여 전투에서 리에주 반란군을 궤멸시켰다. 이 소식을 접한 파리 시민들이 오를레앙 공작 암살을 정당화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에 저항 의지를 상실한 오를레앙 세력은 11월 16일 투르로 후퇴했고, 장은 11월 28일 파리에 입성했다.

파일:Fleury-François_Richard_-_Valentine_of_Milan_Mourning_her_Husband,_the_Duke_of_Orléans.jpg
플뢰리 프랑수아 리샤르 작,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는 밀라노의 발렌티나>, 1802년.

용맹공 장이 또다시 파리를 장악하면서 복수의 희망이 사라지자, 발렌티나는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1408년 12월 4일 블루아에서 사망했다. 그 후 양자간의 협상 끝에, 용맹공 장은 1409년 3월 정식으로 국왕의 사면을 받고 오를레앙 공작의 유족들과 공개적으로 화해했다. 그러나 발렌티나의 장남 샤를 1세 도를레앙의 의뢰를 받은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다르마냐크가 용맹공 장의 전횡을 규탄하며 지지자들을 규합하면서, 부르고뉴파와 아르마냑파간의 내전이 본격적으로 발발했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