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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22:11:46

박인수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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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유사 사례4.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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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4년 4월부터 1955년 6월까지 해군 헌병 대위를 사칭하던 20대 남성 박인수( 1929년생, 당시 25~26세)가 70여 명[1]의 여성과 무분별한 성관계를 한 사건.

2. 상세

동국대학교 사학과에 다니던 대학생 박인수는 6.25 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했다가 애인에게 배신당한 후 변했다고 한다. 여자들은 주로 해군장교 구락부, 국일관, 낙원장 등을 무대로 춤을 추면서 꿰어냈다고 한다.

해병대 헌병대에서 복무했고, 전쟁이 끝나고 해병대 중사 계급으로 전역했다. 이 경력 덕분에 능숙하게 장교 행세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거기다 키가 176cm로 그 당시의 평균보다 10cm 이상 더 큰 장신이었고 외모도 출중했으니 넘어오는 여자가 많았다고 한다.[2]

법정에서 검사가 혼인을 빙자한 간음이라고 주장했으나 박인수는 이를 부인하였다. 박인수는 '자신은 결혼을 약속한 적이 없고 여성들이 스스로 몸을 제공했다'[3]고 하면서 많은 여자들의 대부분 처녀가 아니었으며 한 여성만이 처녀였다고 주장했다. 70여 명의 여성 중 미용사였던 한 명만이 처녀였으며, 이로 인해 '순결 확률 70분의 1'이라는 유행어가 탄생했다고 한다. 당시 혼인빙자간음으로 박인수를 고소한 사람은 2명뿐이었다.

1955년 7월, 1심 재판부는 '법은 정숙한 여인의 건전하고 순결한 정조만 보호할 수 있다'고 하면서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하고 공무원 사칭에 대해서만 유죄를 선고해 2만[4] 벌금형에 처하였다.[5] 그러나 2심에서는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 유죄를 인정해 징역 1년을 선고했고,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

박인수의 근황은 2000년대 들어 방송사와 언론사가 동사무소 컴퓨터와 옛 기록을 동원한 끝에 드러났는데, 그는 결혼했고 대구에서 부인 명의로 카바레를 운영하다가 화재로 건물이 불타자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한다. 이후 툭하면 찾아오던 언론에 신물이 난 건지 행방을 숨기고 살아갔기 때문에 생사도 불분명하다. 다만 1929년생인 것을 감안하면 이미 노환으로 자연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3. 유사 사례

4.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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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정에서 거론된 여성만 69명이고 실제로는 100명에 달했다고 한다. [2] 당시 평균 신장이 161cm이었으니 21세기로 치면 약 180대 후반(187~188cm)이다. 이 사건으로부터 70년이 지난 2022년 대한민국 남성 평균신장이 174~5cm(2002년생, 병무청 병역판정검사)로 현대 남성들과 비교해도 오히려 더 큰 신장이다. [3] '내가 좋아서 그랬던 것뿐인데 뭐가 문제냐'라는 식의 주장을 했다고 한다. 참조 [4] 당시 쌀 한 가마(80㎏ 기준) 값이 약 1만환이었다. [5] 이에 대해 여성인권을 무시한 망언이라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처녀성이라는 전근대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성적 자기결정권을 인정한 첫 판결이라는 의견이 병존했다. [6] 박인수 역은 성우 박일이 맡았다. [7] 당시 박인수 역은 배우 김원배였다.